지역에서 본 세상

마지막 시국선언 후 강단 떠난 신경득 교수

기록하는 사람 2009. 6. 8.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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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은 시대의 목탁이 될 수밖에 없어"

정년퇴임을 앞둔 경상대 국어국문학과 신경득(65) 교수의 고별강연이 5일 오후 4시에 열린다는 휴대전화 문자를 받았다.

매번 학기말이나 학년말이 되면 퇴임하는 대학교수는 많지만 이처럼 '고별강연'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점에서 꼭 참석해 들어보고 싶었다. 신 교수의 졸업생 제자들은 8월말 그의 퇴임에 맞춰 기념문집 출간도 준비 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하필 그 시간에 급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 5일 오후 3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관련 수사를 해온 경남지방경찰청이 최종 수사결과 발표와 함께 당일 노 전 대통령의 모습을 담은 CCTV 동영상을 공개한 것이다. 이 때문에 경남도민일보 인터넷뉴스 편집을 맡고 있는 뉴미디어부는 바빠졌다. 같은 부서의 정성인 차장도 출장 중이었다.

@경상대


어쩔 수 없이 고별강연을 듣지 못한 기자는 경상대 홍보실의 도움으로 강연 녹음파일과 사진, 강의원고 등을 전해받았다. 다음날인 6일이라도 신경득 교수를 만나려 했으나 이미 충북 청주의 집으로 떠난 뒤였다. 결국 전화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야 지식인" = 신경득 교수가 '고별강연'을 하던 날 오전 11시 경상대 교수 66명의 시국선언문이 발표됐다. 여기에 서명한 교수들의 명단에 신 교수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행정적인 퇴임일자는 8월 31일자이지만, 사실상 이 시국선언은 '교수 신경득'의 마지막 사회적 발언이 됐다. 그는 최근 '한반도 대운하를 반대하는 전국 교수모임'에도 들어있고, 지난해 촛불정국 때 '미국산 쇠고기협정 폐기 촉구 선언'을 한 지식인 1002명의 명단에도 들어 있었다.


5일 시국선언문은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추모와 애도의 물결은 다름 아닌 훼손된 민주주의를 회복하고자 하는 국민의 정치적 의사표현"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보수 언론을 비롯해 현 집권세력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인간적으로 멸시하고 모멸감을 준 것도 그가 우리 사회의 비주류 출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라며 현 정권을 비판했다.

하지만 신 교수가 이른바 '노빠'는 아니다. 특히 그는 2003년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파병을 가장 호되게 비판했던 지식인이었다. 당시 <경남도민일보>에 쓴 칼럼에서 그는 "파병안을 확정지은 노 대통령과 국회는 마땅히 국민에 대한 책임 있는 행동을 이행해야 한다"며 대통령 자제부터 파병의 선두에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모택동이 중국 의용군을 한반도에 파병하면서 자신의 큰아들 모안녕도 함께 파병했고, 결국 미군의 폭격으로 전사한 사실을 들었다. 그는 또한 파병안에 찬성한 여야 국회의원과 정부 고위층 관료, 검사와 경찰, 고위 간부층의 자제나 법원 고위층의 자제들도 파병에 동참하라고 촉구했다.

@경상대

최근 '친정부 언론'이라는 비난을 사고 있는 KBS에 대해서도 이미 2003년 참여정부 시절 이렇게 비판한 바 있다.


"KBS가 국영방송에서 공영방송으로 바뀐 뒤에도 여전히 해바라기성 방송을 일삼고 권력의 나팔수 노릇을 하였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때는 김대중을 '불순분자 빨갱이'로 몰아세우다가 김대중이 막상 집권을 하자 역사의 한가운데 서 있는 '민주주의의 상징'이라고 말을 바꾸었다. 5·18 이후 전두환이 신군부의 독재권력 창출을 위해 군복을 벗을 때에는 '떠오르는 태양'이라고 찬사를 바쳤던 KBS가 김영삼 정권아래서 전두환이 감옥에 갈 때에는 '군사정권의 폭압'이라고 짓밟은 바 있다. 또 민주화를 위해 시위하는 학생들을 '극렬 난동분자'로 매도하고, 노동자들의 파업을 집단이기주의로 몰아세운 바 있다."

이런 KBS를 바로잡기 위해 방송인에 대한 반민족·반민주 행위를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사장이건, 간부이건, 연출자이건, 해설자이건 나라와 겨레를 배신한 반민족·반민주 방송인은 사형·무기징역·재산몰수 등 엄단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일벌백계로 청사를 밝히지 않으면 한국언론이 바로 설 수 없다."

@경상대


◇친일화가 비판했다 돌멩이 세례 받기도 = 이처럼 그는 '아니다' 싶은 일에 대해 거침없이 발언해온 학자였다. 그러다보니 지난 93년에는 <충북대신문>에 기고한 칼럼으로 자신이 사는 집에서 돌멩이 세례를 받기도 했다.

당시 지역에서는 '친일 화가 운보 김기창'을 기리기 위한 '운보의 집' 건립이 추진 중이었다. 그는 당시 칼럼에서 "한봉수 의병대장과 손병희 어른이 탄생하신 충북의 성지에 친일파 환쟁이 하나가 기념관을 세운다고 한다. 치가 떨리고 분하다"며 비분강개했다. 그러자 김기창을 추앙하고 따르던 사람들이 그의 집에 돌멩이를 던진 것이었다. 또 한 번은 정보과 형사들이 집안에 들이닥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40년 간 학자 생활을 해오면서 80년대 말~90년대 초에 이르던 그 시절이 가장 힘들었지만, 반대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고 말했다.

"지식인으로서 마땅히 할 일을 했으니 힘들었던 일이 오히려 행복한 일이지. 상아탑에서 순수한 공부도 중요하지만 지식인이 시대정신을 저버리면 학문이 될 수가 없는 거라고 봐. 학문이라는 것도 시대정신에서 출발하는 것이니까…. 지식인은 시대의 목탁이 될 수밖에 없어."

그는 요즘 대학생들이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데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원인을 정확하게 모르겠어. 다들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에 빠져 자기 외에 다른 걸 돌아보지 않는 것 같아. 강의시간마다 누누이 그래선 안된다고 이야기했지만 그 때 뿐이야. 자본주의의 물신풍조에 침몰한 것인지, 인터넷의 영향으로 개인 쪽방에만 파묻혀 살다 보니 자폐아가 되어버린 것인지 알 수가 없어."

그는 마지막 고별강연의 모두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화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인문학을 바탕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민주주의와 인문학을 꽃피운 그리스는 지중해의 중심국가로 성장하여 헬레니즘문화를 이룩하였다. 정부를 수립하던 어려운 시기에 백범 김구는 문화대국을 주창한바 있다."

신경득 교수 @이우기

하지만 최근들어 오히려 대학이 아닌 바깥에서 '인문학 강좌 붐'이 일고 있는 현상에 대해 그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사실 인문학이라는 게 근원적인 학문, 그러니까 철학이나 국문학이나 역사 같은 데서 출발해야 하는데, 요즘은 인문학도 돈되는 장사쯤으로 전락해버린 것 같아.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같은 것도 그래. 나라에서 기초를 마련하는데 지원해주면 그런 건 자연스럽게 될텐데, 돈이 된다니까 무더기로 쏱아붓다가 그렇게 된 거 아냐?"

이명박 정부의 가장 큰 문제는 뭐냐고 물어봤다.

"아마 지금 대통령은 오히려 국민을 원망하고 있을 것 같아. 자기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국민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제일 큰 문제는 대통령이 민중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 같아. 못사는 사람, 집 잃은 사람, 이런 서민들의 한맺힌 소리를 들어줘야 하는데, 그걸 외면하고 못들은 체 하는 게 가장 큰 문제야."

◇"청년 때부터 미뤄놨던 소설 쓰겠다" = 신 교수는 박사학위 논문으로 썼던 <한국전후소설연구>를 시작으로 <한민족문학사상론>, <조선종군실화로 본 민간인학살> 등 수많은 연구서를 남겼고, 퇴임 직전까지 지난 4년간 혼신의 힘을 바쳐 연구한 <서사문학연구>가 800쪽 분량으로 곧 일지사에서 발간될 예정이다. 이밖에도 그는 <소백산맥 아래서>와 <낮은 데를 채우고야 흐르는 물은> 등 시집과 수필집 <누야 별이 변해서 눈이 되는기가?>도 있다.

그러나 그는 원래 소설가 출신이다. 1971년 단편소설 '풍속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등단했던 것이다.

퇴임 후 무슨 일을 할 계획이냐는 질문에 그는 "이제야 미뤄놨던 소설을 쓰겠다"고 말했다.

"원래 내가 청년시절 작가로 출발했으니 이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해볼 생각이야. 지금은 청년작가가 아니라 노인작가가 됐지만, 그동안 기획해놨던 것도 있고…."

그는 작고한 청주의 정진동 목사의 전기를 바탕으로 한 3권 짜리 장편소설과 한국전쟁 초기 서울서부터 진주·마산까지 민간인학살의 과정을 다룬 소설도 계획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또 광개토대왕에 대한 대하소설도 예정하고 있단다.

퇴임하고 고향에 가니 각종 단체에서 함께 하자는 요구도 있지만, 지난 25년을 진주에서 살아오면서 정작 청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 고사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그의 말대로 이미 '노인작가'가 됐을지는 모르지만, 청년의 혈기와 감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노인의 경륜과 지혜가 배여있는 대작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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