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하는 놈들은 다 쏴죽여 버려야 돼!" 경찰 정보과장 출신인 김석본 경남경우회장. 김석본 경남경우회장. 김석본 경남경우회장. 경우회는 마산시 소유 건물 4층을 무상임대해 사용하고 있다.
너무 극단적인 말이지만, 가끔 택시를 타거나 술자리 이야기를 옆귀로 듣다보면 요즘도 종종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궁금했다. 서울 용산 철거민 참사와 강경한 시위 진압 등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확연히 달라진 경찰의 태도, 그리고 이에 대한 비난여론에 대해 경찰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과 논리를 갖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객관적 논리나 합리적 의견을 듣고자 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철저히 경찰의 편에서 가장 경찰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어떤 논리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래야 공감까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왜 그런 주장이 여전히 우리사회에서 힘을 발휘하는지 알 것 같았다.
현직 경찰은 아니지만 가장 경찰의 입장을 잘 대변해줄 만한 사람은 누굴까. 아마도 전직 경찰관이 아닐까. 그래서 찾아간 곳이 재향경우회(警友會)였다. 경상남도 재향 경우회는 마산 오동동지구대(옛 오동동파출소)와 오동동주민센터가 함께 사용하고 있는 건물 4층에 있었다.
1990년대 초 마산중부경찰서 정보과장으로 있을 때부터 기자와 안면이 있는 김석본 경남경우회장(70)은 만나자마자 몇일 전 내가 썼던 신문기사를 들이밀었다. 지리산 기슭의 노인들을 상대로 해방 직후와 한국전쟁 전후 현대사를 취재한 소감을 담은 "왜놈 순사보다 경찰이 더 무서웠지요"라는 기사였다.
김 회장은 한쪽의 일방적인 이야기만 듣고 경찰을 이렇게 매도해서야 되겠느냐고 따졌다. 인터뷰도 거절했다. 공교로운 상황이었다. 그는 같은 지면에 실렸던 '과학 경찰인가, 정치 경찰인가' 라는 블로그의 글도 문제삼았다.
"그래서 오늘은 경찰의 입장을 충분히 들으려고 왔다"며 한참동안 사정한 끝에 정말 어렵사리 인터뷰가 성사됐다. 인터뷰는 가급적 포폄(褒貶)을 배제하고, 그와 나눈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전하기로 했다.
그는 경찰이 다른 정부기관의 공무원에 비해 국민의 욕을 많이 들을 수밖에 없는 '생태적(태생적) 한계'가 있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국민은 경찰의 생태적 한계를 인정해줘야 한다"
"경찰의 역할은 기존의 질서를 지키는 것이지,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수구, 보수의 입장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경찰이 하는 일 자체가 국민의 욕망과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경찰을 싫어할 수밖에 없다."
경찰이 부정과 비리로 구설수에 많이 오르는 데 대해서도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다른 국가기관의 공무원이 저지르는 부정과 비리는 상대방에게 이익이나 혜택을 주고 자기도 나눠먹는 것이다. 하지만 경찰은 베풀어줄 이익이 없다." 그러니까 작은 비리를 저질러도 쉽게 들통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이런 것들이 그가 말하는 '경찰의 생태적(태생적) 한계'였다. 그걸 국민들이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서구의 경찰은 사회 질서만 책임지면 되지만, 우리나라 경찰은 안보까지 책임져야 한다"고도 말했다. 남북 분단 상황이 경찰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우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또한 일제시대를 지나오면서 일본 경찰에 당한 감정들로 인해 권력기관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유독 심하다는 말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경찰이 그 어떤 국가기관의 공무원들보다 어려운 여건에서 고생은 가장 많이 하고도 정당한 평가는 커녕 욕을 가장 많이 듣는 직업"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옛날 이야기도 나왔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건 바로 경찰조직이었다는 것이었다.
"해방 직후 혼란기에 군대는 제대로 조직이나 정비도 안 된 상태에서 대구 폭동이나 제주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걸 실질적으로 진압한 것도 군대보다는 경찰이 주였어. 좌익이 한창 설칠 때 좌익을 소탕하고 질서를 유지했던 경찰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겠어?"
"6·25 때도 그래. 군인들은 칼빈이나 엠원(M1) 같은 신식무기로 싸웠지만, 경찰은 일본 구구식 소총으로 군인과 똑같이 최일선에서 싸웠지. 그런데도 지금 전국 곳곳의 전적비는 모두 군인들을 기리는 것뿐이야. 당시 마산 진동지구에서 창녕 남지까지 낙동강전선의 주력부대도 경찰과 미군이었지 국군은 아니었어. 국군은 대구쪽에 투입됐지. 경찰이 그렇게 해서 마산을 지켜냈는데, 지금 진동에는 해병대 전적비만 서 있어. 이게 말이 돼? 또 얼마 전 통영시에 전적기념관이 생겼는데, 거기도 당시 경찰이 주력부대였는데 경찰 전적은 하나도 없다는 거야. 이게 말이 되냐 말이지."
그는 산청·함양 등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경찰이 무고한 민간인을 빨치산에 협력한 혐의로 고문·학살한 사례가 많다는 <경남도민일보> 보도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대규모 학살은 대개 군인에 의해 이뤄졌고, 경찰은 양민을 괴롭힌 사례보다 오히려 살려내고 보호한 사례가 더 많다는 것이었다.
"일부 (경찰에 의한)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군인이 민간인을 죽이려 할 때 경찰이 나서서 '이 사람은 내가 잘 안다'고 해서 살려낸 사례가 더 많아. 오히려 군대가 없는 지역에서 경찰이 지역방위를 맡아 대한청년단이나 의용경찰의 도움을 받다보니 좌익이나 빨치산의 타켓이 되어서 경찰은 물론 경찰가족까지 학살된 일도 많았어."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실제로 1951년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한 거창·산청·함양 민간인학살 사건 당시 함양군 휴천면과 유림면에서 경찰 지서장이 주민들의 목숨을 구하는 데 앞장섰다는 정황도 나타나고 있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이나 지방좌익에 의해 인민재판에서 경찰관이 희생된 경우가 적지 않았고, 인민군이 후퇴할 무렵 구금돼 있던 경찰관과 우익단체 간부들이 집단학살된 사례도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나라 정부는 군경에 의한 민간인학살 뿐 아니라, 그런 적대세력에 의한 우익과 경찰 및 경찰가족의 희생에 대해서도 진상규명에 소극적이었던 게 사실이다. 그건 적대세력에 의한 학살을 밝혀냄으로서 아군에 의한 학살까지 함께 드러날 것을 우려한 정부의 꼼수 때문이라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이처럼 적대세력에 의한 경찰 및 경찰가족의 학살을 밝히는 일에 왜 경우회가 나서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앞으로는 그런 일도 해야 할 것"이라고만 대답했다.
시너 같은 게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텐데….
3·15마산의거 당시 수많은 시민을 고문하고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바다에 유기하는 등 악행을 저지른 마산경찰서 노장현 사찰계장과 박종표 경비주임 등의 예를 들어 해방 후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고 일제 때의 악질 경찰관들이 대한민국 경찰로 임용돼 각종 악행을 저지른데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물어봤다.
"일제 잔재 청산도 필요하지만, 3·15때 그런 건 개인의 포악적인 성격보다는 그것도 경찰이 가진 생태적 한계 때문이라고 봐야 해. 상부의 지시를 거역할 수 있나?"
이번 서울 용산 철거민 참사를 빚은 경찰의 무리한 진압작전에 대해서도 물었다.
"참사를 빚은 건 불행한 일이야. 불법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진압)해야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조치가 좀 더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는 정도로만 하지. 시너 같은 게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텐데…. 아마 그러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있었을 거야."
철거용역업체 직원들과 공동작전을 벌였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그런 업체 직원이 있으면 일사불란한 지휘체계가 확립이 안되고 오히려 방해만 된다"며 "그럴 리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시너에 불이 붙었는데, 물대포를 쏜 것은 문제가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현장 상황은 현장에 나가 봐야 판단이 선다"면서 구체적인 답변을 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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