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가난한 시절 밥 남겨주던 따뜻한 배려

김훤주 2008. 12. 31. 21:32
반응형

세밑입니다. 춥습니다. 12월 초순 사랑하는 후배 이헌수랑 같이 점심을 먹는데, 갑작스레 옛날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마 먹던 점심이 시래기국밥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70년대 초반까지는, 밥을 짓기 앞서 보리를 먼저 삶아뒀습니다. 그렇게 삶아둔 보리쌀을, 밥을 지을 때에 가장 아래에다 깔아둡니다. 그야 물론, 쌀을 아끼기 위해서입니다. 부풀어 오르는 정도도 보리가 쌀보다 더하지요. 

보리를 깔면 쌀은 그보다 훨씬 적게 들어가도 분량은 비슷해지게 된답니다. 
나중에 나온‘납작보리쌀’은 미리 삶지 않고 쌀이랑 같이 안쳐도 되었는데, 미리 삶아두지 않으면 보리가 제대로 익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지금은 밥 푸는 순서가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그 때는 꽤 중요했습니다. 밥을 주걱으로 미리 저어두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가장 먼저 푸는 밥은 쌀밥일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푸는 순서는 이랬습니다. 아버지, 장남, 차남, 막내, 장녀, 차녀, 어머니. 아버지와 가까울수록 보리가 섞이지 않은 하얀 쌀밥이고, 어머니랑 가까워지면 쌀알이 보기 드문 거뭇한 보리밥이지요.

그런데 때마침 집에 손님이 오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택호가 ‘새마’였는데, 어둑어둑한 문밖에서 굵직한 어른 소리가 들립니다. “새마 양반 계신가?” 저희 집이 읍내 장터에 있었기 때문에, 친척들이 많이 드나드시는 편이었습니다.

당시는 우리 살던 창녕에서 대구나 부산에 나가려면 너덧 시간이 꼬박 걸렸습니다.
당일치기로 대구나 부산까지 가서 일을 보고 돌아오려면 고암 감리나 유어 한터 같은 데서는, 전날 저녁 읍내 나와 있다가 이튿날 새벽 첫차를 타지 않으면 어려웠지요.

친척 어르신들이 이리 찾아오시면, 우리 어머니는 아무래도 귀찮으셨겠지만 그런 티가 전혀 나지 않았습니다. 김가 집안 장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그런 일로 여기신 모양입니다.

어린 우리는 이런 친척 방문이 마냥 좋았습니다. 당시 어른들은 친척 집에 묵을 경우 미리 푸줏간에 들러 소고기를 한 근(또는 반 근) 정도 잘라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룻밤을 묵으면 적어도 두 끼를 축냅니다. 그 대가로 소고기를 내놓는 셈입니다. 어머니는 그것으로 국을 끓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소고기국이 좋습니다.

좋은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 때는 밥을 먹고 난 직후에도 배가 고픈 시절이었습니다. 손님으로 오신 친척 어른에게는 대체로 하얀 쌀밥이 나갑니다.

친척 어른은 주로 아버지랑 겸상을 하시는데요. 당시는 누구든 남의 집에 가서 밥을 먹을 때는 3분의2 정도만 먹고 나머지는 남기는 것이 관례고 미덕(美德)이었습니다.

그런 미덕은 친척 어른보다 우리가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서둘러 자기 앞에 놓인 밥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다음 친척 어른 밥그릇을 곁눈질로 쳐다봅니다.

아버지와 친척 어른은 얘기를 나누시느라 아무래도 느리십니다. 밥그릇이 3분의2 즈음 비워지면 대부분 친척 어른은 잘 먹었다는 표현을 하시면서 숟가락을 놓습니다.

그렇다고 그 밥그릇이 곧바로 우리 앞으로 오지는 않습니다. 아버지 한 마디 거드십니다. “시장할 텐데 한 술 더 뜨이소.” 그래도 친척 어른은 손사래를 칩니다.

어머니가 다시 나서십니다. “와예? 반찬이 안 좋습니꺼? 조금만 더 드시 보이소.” 친척 어른은 대부분 여기서도 사양을 하십니다. 그러면 그 밥이 우리에게 옵니다.

드물지만 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친척 어른도 시장기를 참기 어려운 때가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아버지 어머니 권하시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다시 숟가락을 드시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주섬주섬 후배 이헌수에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한테도 이런 기억이 있느냐?’ 물었더니 ‘없는데요.’ 했습니다. 저랑은 10년 차이가 납니다.

새 밥도 아니고, 침까지 묻어서 더럽다고 해도 될 그런 먹던 밥을 남기는 일이 왜 ‘따뜻한 배려’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우리 후배 헌수는 지어보였습니다.

저는 자랑했습니다. “보라고. 먹던 밥 남기기는 가난했기에 할 수 있었던 따뜻한 배려 그 자체라네. 당신은 모자람 없이 자라서 좋은 면도 있지만 이런 배려에 대한 추억 DNA는 없잖아. ”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배가 언제나 고픈 시절이었고, 당신 어린 시절과는 달리 집에는 먹을 것이 밥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시절이었어. 이런 사정을 빼놓고는 설명도 안 되고 생각도 안 되지.”

옆에서 밥집 주인 아주머니가 듣고 있다가 슬그머니 웃었습니다. 저보고 나이를 묻기에 “마흔여섯”이라 일러드렸습니다. 주인 아주머니는 저보다 대여섯 많아 보였습니다.

“그래 맞아요. 가난하지 않았으면 할 수 없는 그런 배려지. 요즘 생각으로 보면 먹다 남긴 더러운 밥이지만 그 때는 그게 정표였지.” 이랬습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안 남길 때도 있어요.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하마나 남길까 간절히 기다리며 빤히 쳐다보던 아이가 ‘앙’ 울어요. ‘와, 다 무우 뿠다.’ 이러면서 말이에요.

상황이 꼬였습니다. 친척 어른은 억수로 당황해 합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나무라십니다. “이놈 자식, 와 이라노?” 어머니는 우는 녀석을 건넌방 즈음에 끌고가 매질을 합니다.

주인아주머니와 저는 이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웃었습니다. 제게는 그렇게 크게 울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친척 어른 텅 빈 밥그릇이 서러워서, 고개를 숙인 채로 울먹울먹한 적은 있습니다만. 하하.

김훤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