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학생증 쳐다보니 선생님 생각나네

김훤주 2009. 1. 1. 08:24
반응형

책장 서랍을 정리하다보니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학생증도 쏟아져 나왔습니다. 저는 부산 사하중학교를 다니다가 2학년 2학기에 대구 청구중학교로 전학했습니다.

청구중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언제나 어디서나 양심과 정의와 사랑에 살자!’ 당시는 남문동 남문시장 근처에 있던 대건고등학교에 들어가 82년 2월 졸업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청구중학교에서는 학생증을 만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게 남아 있는 학생증은 대건고교 3개와 사하중 2개가 전부입니다.

사하중학교는, 아주 멋진 학교였습니다. 지금은 학교보다 높은 건물이 너무나 많이 들어서서 전혀 그렇지 않지만, 그 때는 4층 교실에서 멀리 다대포 앞바다가 보였습니다.

중1 때 학생증. 중2 딸이 다섯 학생증 가운데 이 사진이 가장 잘 생겼답니다.


바다가 보이는 교실, 생각만으로도 멋지지 않은가요? 국어 선생님 시 낭독하는 소리를 듣다가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끝이 하얗게 도르르 말리는 파도가 보입니다.

‘자그르르, 자그르르르’ 바닷물이 자갈들 핥아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이런 환청을 타고 소금기 머금은 바닷바람이 교실 안에까지 서슴없이 들어옵니다.

학생증 뒷면. 담임선생님 성함이 도장으로 찍혀 나와 있습니다.


중학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문득 떠오릅니다. 무뚝뚝하신 분이셨습니다. 테니스를 매우 즐기셨습니다. 어떤 때는 종례하는 시간까지 잊으실 정도였습니다.

1학년 전체 대항 오래 달리기가 있었습니다. 우리 담임선생님은 그 때도 테니스를 치시고 있었습니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제가 선두권에 들어갔습니다.

중2 학생증.

아 그랬는데, 테니스장에 계시던 담임선생님 하얀 반바지에 한 손에는 테니스 라켓을 드신 채로 어느새 제 곁에 와 계셨습니다. 어린 마음에 무척 황송했지요.

그러면서 저더러 이리 해라 저리 해라 일러주셨습니다. 처지지 말고 가볍게 걸음을 옮겨라 이런 말씀도 하셨던 것 같고요, 장하다 잘한다 격려도 하셨던 것 같습니다.

결국 2등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한 번 싱긋 웃어 주시더니 원래대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마 속정은 누구 못지 않게 깊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것을 몰랐습니다.

저는 사랑을 표나게 받아본 적이 적기 때문에, 사랑을 표현할 줄 몰랐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때때로 이렇게 사랑을 주셨지만, 저는 ‘고맙습니다.’ 이런 표시를 전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했습니다. 저는 그 때 어머니 아버지랑 떨어져서 작은누나랑 유학(遊學)을 하고 있었는데, 선생님 이런 사랑 덕분에 외로움이 조금은 덜어질 수 있었습니다.

청구중학교는 좋지 않은 기억이 많은 편입니다. 국어 선생님은, 때린 자리만 골라서 또 때리는 분으로 악명 높았습니다. 그러나 교감선생님께서는 진짜 대단한 인격자이셨습니다.

아이들은 부산 아이들과는 아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난(亂)했습니다. 교실에서 패싸움을 하기도 하고, 교실에서 ‘불특정 다수를 겨냥해’ 나무의자를 집어던지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고1 학생증

고2 학생증

고3 학생증.


그렇게 중학교를 마치고 진학한 대건고등학교는 반대로 참 좋았습니다. 공부를 잘한다든지 이런 것이 아니고, 학생 잡아매는 규율이 없고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야말로 있기 어려운 일인데, 변소에 담배를 비벼 끄거나 한 자취는 있어도, 선생님 욕이라든지 무슨 이상한 막대기와 구멍이 뒤섞인 그런 낙서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지만, 변소 낙서는 제가 입학식 하던 1979년 3월에도 없었고, 제가 졸업식 하던 1982년 2월에도 없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러하기를 바랍니다만.

역사를 공부하는 즐거움을 처음 일깨워주신 세계사 선생님, 고문(古文)의 아름다움을 알려주신 ‘페스탈모찌’ 선생님, 김지하의 오적(五賊)을 얘기해주신 국어선생님, 예술가다운 면모를 보여주신 미술선생님 등등 좋으신 선생님도 많이 만났습니다.

제 삶에 엄청나게 도움을 주신 분은 고3 담임선생님이십니다. 아마 담임선생님 아니었으면 저는 ‘퇴학’을 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학교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저는 고3 올라가자마자 열아홉 나이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난 일을 겪었습니다.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학교는 이 일을 두고 저를 잘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4월 어느 날 담임선생님께서 부르셨습니다. “학생부장이 니 잘라야 한다 하더라.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번 일에서 니 책임은 없다.” 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생활기록부도 보고 1학년 2학년 담임한테 얘기도 들었다. 걱정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 니 자른다 하면 나부터 먼저 잘라내라 할 테니까.” 하셨습니다.

졸업하고나서 고3 담임선생님을 한 번도 찾아가 뵙지 못했습니다. 졸업하던 그 해부터 줄곧, ‘올해는 가야지.’, ‘올해는 가야지.’ 해마다 이러고만 있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이마저 하기 어려운 까닭이, 당시 이미 연세가 만만찮으셨기 때문에, 이제는 돌아가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동기들 수소문해 묻기조차 민망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김훤주

어린왕자 (비룡소 클래식 14) 상세보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