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선생님 떠올리게 하는 30년 전 통지표

김훤주 2008. 12. 28.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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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책장 서랍을 정리했습니다. 그랬더니 생각지도 못했던 보물(?)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1975년 국민학교 6학년 때 받은 통지표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중2 딸 현지는 이 통지표를 두고 ‘문화재’라 하네요.)

제가 창녕국민학교 6학년 1반 57번으로 돼 있는 이 통지표를 물끄러미 쳐다봤습니다. 쳐다보고 있으려니 ‘그 때 그 시절’로 제 마음이 절로 돌아갑니다.

사실 통지표나 학교 생활에 얽힌 기억들이 별나게 있지는 않습니다. 당시 탁구 선수로 차출돼 4학년부터 6학년 1학기까지 2년 반 동안은 수업을 전혀 받지 않은 탓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부터 지금껏 친하게 지내는 벗 영규가 그냥 한 번 더 떠오르고, 어릴 적 저 혼자 사무치게 짝사랑했던 어떤 여자아이가 기억에 스쳐지나갈 뿐입니다.

제가 참가했던 제4회 전국소년체육대회는 부산에서 열렸습니다.

오히려 선생님에게 단체 기합 받은 일이라든지,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까닭도 모르고 오줌이 지리도록 얻어터진 일 따위가 먼저 기억 회로 속을 돌아다니는군요.

원산폭격이나 무슨무슨 선착순 다섯(또는 열) 명은 예사였고, 오리걸음으로 운동장 다섯 바퀴 돌기, 토끼뜀으로 3층까지 오르기, 한강철교(요즘은 군인들도 이게 무슨 기합인지 모를 것입니다만.) 등등이 있었습니다.

물론 땅따먹기라든지 올패 넘기기(요즘 말로 비석치기), 오징어육지, 말타기, 소타기 따위 놀이를, 학교 운동장 축구 골대 뒤쪽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서 줄기차게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정작 땀을 뻘뻘 흘리는 우리는 전혀 괜찮은데, 날이 먼저 지쳐 버리는 때도 많았습니다. 어둠이 거뭇거뭇 내리고, 매미 울음 소리도 잦아들고, 여기저기 들어와 밥먹어라는 어머니들 외침이 들려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쌩쌩한데!!

당시 우리한테 주어지는 장난감이라고는 구슬(그 때는 일본말 ‘다마’가 공용어였지요.), 딱지(우리는 ‘떼기’라 했습니다요.), 그리고 제기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여자애들은 여기에 고무줄이 더해졌을 뿐입니다. 그래도 우리 놀이는 참으로 다양하고 활동적이었습니다.

'수'와 '우' 받은 자취는 하나씩 남겼습니다. 자랑하려고요. ^.^

이런 일반적인 것들을 벗어나면, 가장 많이 기억나는 것은 아무래도 선생님이십니다. 당시 담임선생님은 탁구부 주임도 함께 맡으셨습니다. 4학년부터 6학년까지 사실상 3년 동안 제 담임을 하신 셈입니다.

선생님은 많이 엄하신 편이었습니다. 30대 후반으로 제게는 기억돼 있는데, 우리가 무엇인가를 크게 잘못하면 솥뚜껑 같은 손바닥으로 여리디 여린 저희들 뺨을 사정없이 때리실 때도 적지 않았습니다.

통지표 세 번째 면.

그러나 주로는 웃는 낯으로 저희를 대하셨습니다. 인상 자체가 웃는 상이시기도 하셨지만.  친절하게 이러저러하다고 설명해 주실 때가 또 대부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그 분 앞에서 특별히 주눅 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기억으로는, 편애가 없으신 편이었습니다. 우리 반에는 집이 부자라고 좀 뻐기고 다니는 그런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가 이 선생님한테 특별하게 인정받았던 구석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친구는 반장이나 부반장은커녕 분단장도 하지 못했던 것으로 제 기억에는 돼 있고, 친구들 사이 이간질을 하다가 선생님한테 혼도 많이 났었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통지표 제일 뒷면.

특별하게 저를 끔찍하게 위해 주시지는 않았고 또 제가 그래 주시기를 바랄 처지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생전에 한 번밖에 찾아뵙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참 아쉽습니다.

7년 전으로 기억하는데요, 창녕 명덕초등학교에 계신다는 말씀을 듣고 연락도 미리 드리지 않고 불쑥 찾아 뵌 적이 있습니다. 마침 점심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아이들 복작거리는 틈새에서 저를 보시더니 단번에 알아보시고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그러더니 점심 식판 두 개를 숙직실로 가져오셔서 저랑 둘이서 아주 맛나게 먹었습니다.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이들 소식을 주로 물으신 것 같은데 제가 국민학교 동기들이랑 아무 연락도 없이 살다보니 제대로 된 대꾸는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곧장 헤어졌습니다. 채 1시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또 뵙게 되리라 생각했고, 사회적으로 출세하지는 않았지만 그 때는 약주라도 한 잔 대접해 올려야지 마음을 먹었더랬습니다.

그런데, 그럴 기회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것입니다. 정말 더없이 정정하셨는데, 교감으로 승진하시고 얼마 안 돼 그리 되셨다는 얘기를 제가 들은 것입니다. 참으로 송구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통지표 내용은 대부분 사실과 다르거나 부풀려져 있습니다. 탁구부는 경남 대표로 소년체육대회 갔다 와서 수업에 들어가기 시작했거든요. 한 학기 가운데 절반 안 되는 기간만 학교에서 지낸 셈입니다. 이런 정도 지어내기는 예사로 여겨지는 시절이었나 봅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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