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이들은 왜 열여덟 청상과부가 되었나

기록하는 사람 2008. 12. 15.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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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점순·김서운은 동갑내기다. 노점순은 열 다섯, 김서운은 한 해 먼저 열 네 살 어린 나이에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 신촌마을로 시집을 갔다.

그녀들의 시댁은 아래 윗집 사이였다. 김서운은 병곡댁, 노점순은 도북댁이라는 택호로 불렸다. 철없는 소녀의 나이로 각 가정의 며느리와 아내가 된 그들은 같은 해인 1949년 열 여덟에 첫 아이를 낳았다. 노점순은 그해 4월, 김서운은 9월초에 각각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김서운의 남편 최재일(당시 26세)은 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하루 전날인 9월 6일 오후 노점순의 남편 박판갑(당시 23세) 등 마을 사람들과 함께 경찰에 끌려갔기 때문이다.

노점순의 남편은 집을 나서기 전 방에 누워있던 생후 4개월짜리 아들에게 입을 쪽 하고 맞추며 "아부지 갔다올께" 하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린 아내에겐 "내일 아침에도 지서에 부역을 나가야 하니까 아침밥을 좀 일찍 해야 될끼다" 하고 말한 후 사립문을 나섰다.

각각 열 다섯, 열 넷에 시집와 첫 아이를 낳을 무렵 남편을 잃고 평생 홀몸으로 살아온 노점순(왼쪽), 김서운 할머니.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들은 모두 경찰에 학살당했다. 죽은 날짜도, 장소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함양읍 당그래산 또는 복곡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그래서 제사는 이들 남편이 집에서 나간 음력 윤칠 월 열 나흩날로 잡아 지낸다. 김서운의 작은집 바깥양반도 그렇게 죽었다. 그 집은 자손도 없어 당시 핏덩이였던 김서운의 아들이 제사를 함께 지내고 있다.

핏덩이 아들과 입맞추고 나간 남편

왜 이들 어린 새댁의 남편들은 우리 경찰에게 학살당했을까.

"한 열흘 전인가 보름 전인가, 밤중에 총을 든 빨치산들이 들어와 동네에서 밥을 해달라고 했어요. 총을 들이대면서 밥 해달라고 하는데, 안해줄 도리가 있나요. 구장과 반장들이 각 집마다 몇 그릇씩 내놔라 해서 밥을 해준 죄밖에 없어요."

1948년 10월 여순사건 이후 지리산에 숨어든 빨치산들이 보급투쟁을 위해 걸핏하면 마을에 들어가 양식을 빼앗가 가던 시절이었다. 그런 일을 겪은 마을은 반드시 지서에 신고토록 했다. 만일 신고를 않았다가 들통나면 마을사람 전체가 '빨갱이 동조자'로 몰려 몰살당할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신고를 하더라도 무사한 건 아니었다. 밥을 몇 그릇 해줬냐, 빨갱이에 동조해서 해준 건 아니냐, 왜 거절하지 않았냐는 둥 끊임없는 취조와 고문·폭행에 시달려야 했다. 이 마을에서도 신고를 한 사람들과 구장·반장을 포함, 모두 9명이 경찰에 잡혀가 온갖 고문을 당한 후 학살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때 희생된 9명 중 5명은 자손도 없어 아예 대가 끊기고 말았다.

그 후 노점순·김서운은 열 여덟의 나이에 시부모 부양과 젖먹이 아들의 양육을 홀몸으로 책임져야 했다. 각각 대 여섯 마지기에 불과한 농사였지만 여자의 몸으로는 초인적인 노동이었다. 연로한 시부모들이 돌아가신 후, 새댁들의 나이 마흔이 됐을 때 농사를 그만두고 함양읍에 각각 셋방을 얻어 나왔다. 남의 집 식모살이와 식당의 허드렛일, 봉물장수 등을 하며 근근히 생계를 이어왔다. 그 사이 아들은 각각 도시에 나가 결혼을 했다.

노점순 할머니의 월세 8만 원짜리 단칸방 입구.


지금도 동갑의 두 할머니는 함양읍 변두리의 서로 멀지 않은 곳에서 단칸 셋방살이를 하고 있다. 겨울이 왔지만 보일러를 때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잠들기 전 전기장판을 데워 이불 속이 따뜻해지면 스위치를 끄고 잠든다. 그나마 얼마 전부터 노령연금으로 나오는 8만 4000원으로 달세(각 6만, 8만 원)를 낸다. 생활비는 객지에 나간 아들이 가끔 보내주는 용돈으로 쓴다.

두 할머니의 소원은 영세민(기초생활수급대상자)으로 지정받는 것이다. 하지만 둘 다 부양가족인 아들이 있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게다가 노점순 할머니는 얼마 전 방안에서 미끄러지 오른쪽 다리에 세 군데 골절상을 입어 거동도 쉽지 않다. 김서운 할머니도 60년 전인 당시 빨치산과 경찰들에게 놀란 가슴이 지금도 진정되지 않아 가슴 답답증을 호소하고 있다.

"처음 10년 동안은 살아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사도 지내지 않았어요. 바깥에서 바람소리만 나도 그 양반이 돌아오는가 싶어 방문을 열어본 게 골백 번도 넘어요. 그러다가 10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니 그 때부터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어요."

이들은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은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국가기관은 물론 민간단체로부터도 당시의 억울함을 물어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들 역시 어디에 어떻게 호소해야 할 지 몰라 민원 한 번 제출해본 적도 없다. 참여정부 출범 후 발족된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사건 피해자 신고를 받았으나 이들 할머니는 그 소식도 몰랐다.

국가가 해줘야 할 최소한의 도리는 뭘까

두 할머니에게 60년이 다 된 지금, 나라에서 어떻게 해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죄없는 사람을 보호해줘야 할 우리나라 경찰이 애먼한(죄없는) 사람을 그렇게 죽였고, 그 뒤 온갖 고생을 하며 살아온 세월을 생각하면 어떤 보상을 받아도 모자라지요. 그런데 그게 우리 마음처럼 되나요? 보상은 못해주더라도 그 양반이 언제, 어떻게, 어디서 죽었는지라도 알았으면 좋겠네요."

"얼마전에 텔레비전을 보니 저기 산청인가 어디서는 그렇게 죽은 사람들의 해골도 파내고 하데요? 우리 그 양반도, 지금은 섞여서 누가 누군지도 알 수는 없겠지만 지금이라도 어디서 죽여서 파묻어 놨는지 찾아서 태워 재라도 한 줌 주든지, 합장이라도 시켜놓고 비석 하나라도 세워 거기서 아들, 손자와 절이라도 한 번 해볼 수 있다면 반분이라도 풀리겠어요."

노점순 할머니의 방. 기름값이 없어 보일러도 때지 못한 채 전기장판을 쓴다.


이들 할머니들이 각각 열 넷, 열 다섯의 어린 나이게 시집을 간 것은 나라 잃은 시대였던 일제말기 일본군의 '위안부' 공출을 피하기 위해 이뤄진 조혼(早婚) 풍습 때문이었다. 그리고 성년도 되기 전에 남편을 잃은 것은 해방 후 좌·우익 이념 전쟁 때문이었고, 그 후 혼자된 몸으로 자식교육도 제대로 못시킨 탓에 대대로 절대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에게 과연 국가란 무엇일까. 국가라면 마땅히 이들의 억울한 한을 풀어주고 어루만져 줘야 할 의무가 있다. 혼란했던 시기에 국민을 보호해주지 못한 국가가 뒤늦게라도 해줘야 할 최소한의 도리는 당시 민간인 집단학살의 진실을 규명하고, 어디엔가 암매장돼있을 희생자의 유골이나마 찾아 가족에게 돌려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인해 60년이 다된 지금까지 생계조차 막막한 이들 할머니에게 구호 차원의 생활지원이라도 해줘야 한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출범 후 과거사 관련 기구들을 모두 통폐합하거나 예산·인력을 줄여 활동 자체를 마비시키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보이고 있다.

두 할머니의 나이는 이미 77세. 이들뿐 아니라 당시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도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몇 년만 지나면 더 이상 그런 역사를 증언해줄 이도 없을 것이다.

역사의 진실규명을 가로막으려는 세력이 원하는 것은 바로 그런 증언자들이 모두 없어지는 상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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