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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여섯 혜영씨는 왜 숨졌나(상)

기록하는 사람 2008. 11. 17.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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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너무 일찍 인생의 쓰라림을 알아버린, 그래서 오직 일과 공부에만 매달리다 허망하게 숨져야 했던 한 여성의 짧은 삶에 대한 이야기다.

하혜영. 사고 당시 스물 여섯 살.

그녀는 지난 2004년 10월 30일 새벽 0시 8분, 자신이 몰던 비스토 승용차가 창원시 천선동 대우주유소 앞 인도의 전신주를 들이받은 후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과다출혈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법은 이 사고의 업무 관련성을 가리는 데 4년의 긴 세월을 요구했다.

그러는 사이 그녀를 매일 밤늦게까지 부려먹었던 회사는 부도로 사라져 버렸고, 이미 신경통으로 노동력을 잃은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잃은 고통에 몸부림치다 후두암이라는 새로운 병을 얻었다. 정신적·물질적 지주와 같았던 누나를 잃은 남동생은 방황 끝에 몸담고 있던 군부대 하사관직에서 옷을 벗었다.


4년이 넘는 지루한 법정 투쟁 끝에 국가는 그녀의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지만, 남은 가족은 여전히 혜영씨와 이별하지 못한 채 방 안 곳곳에 놓인 딸의 사진과 함께 잠들고 눈을 뜬다.

혜영씨가 떠난지 4년이 지났지만, 혜영씨의 사진들은 아직 엄마의 방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최종 원고승소 판결 소식이 전해진 날, 저녁에 만난 혜영씨의 어머니 오씨(59)는 귀까지 덮이는 둥근 모자를 쓰고 있었다. 항암 치료로 머리가 다 빠졌기 때문이었다. 딸이 죽은 후 걸핏하면 울다 보니 지난 5월부터 밥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아 병원에 가봤더니 후두암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혜영이가 왜 죽어야 했는지 그 책임이 가려졌으니, 이젠 같은 또래에 숨진 좋은 총각을 찾아 영혼결혼이라도 시켜줘야 겠어요. 그래야 에미 마음이 좀 편해지겠네요. 누나를 먼저 보내야 동생 장가도 들 수 있을테고…."

혜영씨의 시신은 사고 직후 화장돼 남동생(28)에 의해 진해 명동 앞바다에 한줌의 재로 뿌려졌다.

"누나가 다니던 회사(파비뉴21) 측 사람들이 영안실에 찾아와 모든 걸 잘해주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막상 화장을 하고 나니 회사에서 우리를 철저히 피하고 따돌렸어요. 찾아가도 사장이 없으니 다음에 오라고 하고, 다음에 또 찾아가면 또 없다고 하고…."

당시 그의 가족이 회사로부터 받은 것은 혜영씨가 다닌 20일간의 월급 100만 원 정도가 전부였다. 심지어 장례비나 조의금조차 받지 못했다.

혜영씨가 그 회사에 출근하기 시작한 것은 10월 10일. 입사 당시 혜영씨의 자기소개서 끝부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초 1초를 밀도있게 사용할 그런 일을 기다렸습니다. 철저한 상권 분석을 통해 쇼핑뿐 아니라 지역의 문화까지 주도할 거라는 귀사의 야망을 보는 순간, 저는 전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망에 찬 귀사의 도전에는 제가 꼭 필요할 것입니다. 사업체의 특성상 밤 늦은 근무, 휴일근무 기꺼이 하고 싶습니다. 개장에 앞서 홍보, 점검 및 관리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정말 환영입니다. 2004년, 그 신선한 역사에 제가 함께 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고대합니다."

회사는 그런 혜영씨를 채용했고, 실제로 10일부터 29일까지 휴일도 없이 일을 시켰다. 일요일과 토요일에도 출근해 밤 11시가 넘어서야 퇴근했다. 가장 빨리 퇴근한 날이 저녁 9시 정도였다고 한다. 무려 하루 14시간 30분 이상을 근무했으며, 출퇴근 시간까지 빼면 집에서 수면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은 5~6시간에 불과했다.

사고가 난 날은 개업식(28일) 다음날이었다. 회사는 개업식을 무사히 마친 것을 자축한다며 회사 부근 고깃집에서 관리실 직원들에 대한 회식을 열었다. 혜영씨도 회식에 참석했으나 원래 술을 못하는데다, 남은 일이 많아 술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은 채 밤 10시쯤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혜영씨뿐 아니라 다른 직원 3명도 함께였다. 밤 11시 30분 잔무를 마치고 통상 그랬던대로 비스토 승용차를 몰고 퇴근길에 나섰다.

사고 시간은 38분 뒤인 0시 8분, 장소는 창원시 천선동 성수원 부근에서 안민터널 방향 도로였다. 그동안의 피로가 누적된 탓일까? 가족들은 순간 졸음운전을 했던 걸로 추측한다. 인도를 넘어 돌진한 승용차는 전신주를 들이받았고, 그녀는 장 파열에 따른 과다출혈로 끝내 소생하지 못한 채 허망하게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문제는 회사와 근로복지공단의 태도였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과 판례를 들이대며 혜영씨의 재해는 업무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 통보해온 것이다. 산재보험법 시행규칙에는 아래의 딱 두 가지 경우에만 업무상 재해로 인정한다고 돼 있다.

1. 사업주가 소속 근로자들의 출퇴근용으로 제공한 교통수단의 이용 중에 발생한 사고일 것.
2. 사업주가 제공한 교통수단에 대한 관리 이용권이 사상한 근로자에게 전담되어 있지 아니할 것.

하지만, 똑같은 출퇴근 사고라 하더라도 공무원의 경우 공무원연금법상 통상적인 경로와 방법에 의한 출퇴근 중 발생한 모든 재해를 '공무상 재해'로 인정해주고 있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처럼 죽음마저 평등하지 못했던 혜영씨는 그 짧았던 삶 역시 평탄하지 못했다. <계속>

※다음기사 : 스물 여섯 혜영씨는 왜 숨졌나(중)
※관련기사 : 스물 여섯 혜영씨의 짧은 삶, 긴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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