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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여섯 혜영씨는 왜 숨졌나(중)

기록하는 사람 2008. 11. 18.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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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무거웠던 혜영씨의 삶 "청춘의 무게가 이쯤은 되어야지"

이 글은 너무 일찍 인생의 쓰라림을 알아버린, 그래서 오직 일과 공부에만 매달리다 허망하게 숨져야 했던 한 여성의 짧은 삶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다.


혜영씨는 여고 3학년이던 1996년 아버지를 잃었다. 수험생 시절을 무사히 보내고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던 시기였다. 그녀가 회사에 제출한 자기소개서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사회를 경험해본 뒤 대학에 진학하였다는 것은 약간의 독특한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가장을 잃는다는 것은 정신적 지주를 상실케 함은 물론 상처와 어려움을 가족에게 남기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저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정신적으로도 꽤 성숙해 있었기 때문에,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지만 일을 하리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가장을 잃은 충격은 컸다. 아버지가 남겨준 것이라곤 18평 시영아파트 한 채가 전부였다. 어머니가 간간이 식당에 허드렛일을 나갔지만 신경통으로 일을 오래 할 수 없었고, 고등학생인 남동생은 너무 어렸다.

그녀는 대학 등록금조차 내주지 못한 엄마를 원망하기도 했다. 어머니 역시 "우리 팔자가 이러니 우짜겠노"하며 함께 울 수밖에 없었다.

◇대학 캠퍼스 대신 공장으로 = 결국 대학 대신 마산 수출자유지역의 한 전자제품 생산공장에 들어갔다. 그 때부터 혜영씨는 스무 살 가장이 됐다. 잔업에다 특근·야근도 마다하지 않으며 남동생의 학비와 생활비를 댔다. 그렇게 4년이 지나갔다.

새천년을 몇 개월 앞둔 어느날, 혜영씨는 대학 진학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어머니 오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공장장에게 무릎을 꿇고 애원을 했다네요. 회사에 다니면서 야간대학에 진학하는 걸 허락해달라고…. 그런데 그 공장장이 '우리 회사는 대학 나온 인재가 필요한 게 아니라 열심히 일하는 직원이 필요하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하더라는 겁니다. 그 때문에 공장을 그만뒀어요."

그 후 어느날 아침 어머니가 눈을 떴는데, 딸이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 날이 수능 시험일이었던 겁니다. 학비를 어떻게 할 지 걱정했는데, 4년 내내 특대장학금을 받았어요. 은행에 등록금을 내러 가서 학생회비 8000원 만 내면 은행 직원들이 다들 부러워했죠."

실제 혜영씨의 전 학년 성적표는 딱 한 과목 B플러스를 받은 걸 빼고는 올A였다. 평점은 4.362.

혜영씨의 성적증명서.

◇힘들었지만 신났던 대학 시절 = 하지만 장학금을 받아도 가장의 역할은 벗어날 순 없었다.

백화점 판매사원에서부터 화장품회사의 사장실 비서, 대기업의 문서번역 및 통역, 호프집이나 레스토랑 서빙에 이르기까지 대학시절 내내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다.

남동생은 고등학교 졸업 후 군대에 지원해 직업군인이 됐다.

"제가 군 생활하던 시절, 새벽 두 시나 세 시쯤 되어서 오면 그 때까지 누나는 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 모습을 여러 번 봤어요. 낮에는 학교수업 마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 그렇게 공부를 했죠."

이렇게 힘들었던 대학시절이었지만, 혜영씨에게는 그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자기소개서에서 그녀는 '하늘을 날던 대학시절'이라는 소제목 아래 이렇게 썼다.

"영어영문학부의 학생이 되어서 자유로운 학문의 분위기에 젖어 공부를 하는 짜릿함을 맛보았습니다. 캠퍼스의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키츠의 시를 읽었고, 세익스피어의 희극 <한 여름 밤의 꿈>에서 퀸스역을 멋지게 해내었습니다. (…) 저의 무거운 책가방에 오히려 속상해하는 동기들에게 '청춘의 무게가 이쯤은 되어야지!'라고 말하면서 웃어주었습니다. (…)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느냐는 말을 모든 사람들에게서 들을 정도로 즐기면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나가는 아르바이트도 대충 하지 않았다. 혜영씨를 고용했던 호프집 주인은 "워낙 애살있게 일을 하는 바람에 손님들이 혜영이를 사장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백화점에선 혜영씨가 판매한 핸드백의 매출이 급증하기도 했다고 한다.

혜영씨가 남긴 자기소개서에는 이런 마음가짐이 잘 나타나 있다.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면, 최소한 그 회사 직원이 아닌 사람들에게 '억지로 일을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열광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저 자신이 활기에 넘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혜영씨를 잃고 후두암으로 투병 중인 어머니는 4년 전 혜영씨가 받은 졸업우수상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다.


◇마침내 들어간 회사에서 커피 심부름만 = 이런 대학시절을 거쳐 2004년 2월 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생 대표로 총장상도 받았다. 그러나 우수생에게도 취업의 문턱은 높았다. 그해 4월 창원의 한 중견제조업체에 취업했으나 비정규 계약직이었다. 혜영씨의 일은 커피를 나르거나 사무보조가 고작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창의력과 열정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마침 창원의 유통회사 파비뉴21이 개점을 준비 중이었고, 홍보와 기획 파트에 지원했다. 기획 파트가 아닌 총무직으로 채용됐으나 정규직이라는데 신이 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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