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뼈에 무슨 이데올로기가 있나요?"

기록하는 사람 2008. 11. 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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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이 만난 사람]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전문가 이상길 교수

이상길 경남대 인문학부 교수는 원래 고고학과 고대사가 전공이다. 하지만 요즘 그는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전문가로 통한다. 그가 반세기 넘게 묻혀 있던 유골들과 인연을 맺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지난 2002년 9월 4일 태풍 '루사'로 인해 폭우가 쏟아진 날,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 산골짜기에서 주인 없는 유골 수십여 점이 빗물과 토사에 휩쓸려 내려왔다. 한국전쟁 당시 이곳에서 진주지역 보도연맹원으로 추정되는 200여 명이 무장한 군인들에 의해 집단학살됐다는 사실은 1999년 10월 <경남도민일보>에 의해 보도된 바 있지만, 실제 유골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태풍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민간인학살 관련 단체들이 본격적인 유해발굴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유해발굴은 고도의 전문성과 정밀함을 요구하는 일이었지만, 경험도 지식도 없는 관련단체는 그냥 인부들을 동원해 삽으로 매장추정지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60여 구의 유해가 나왔다. 2000년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에서는 시민단체들이 포크레인을 동원해 매장지를 파헤치기도 했다. 무지막지한 짓이었다.

지난 8월 산청군 외공리 현장에서 발굴된 유해 상태를 설명하고 있는 이상길 교수. 그는 "인간적으로 이래선 안된다"고 말한다.


고고학자로서 문화재 발굴 경험이 있는 이상길 교수는 그런 유해발굴 작업을 두고볼 수 없었다. 자진하여 여양리 유해발굴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혔고, 제자들도 동참했다. 문화재를 발굴하듯 원형 그대로 일일이 유해를 찾아내는 그의 방식은 이후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작업의 전범이 됐다.

이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출범과 함께 전국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자에 대한 유해발굴 작업이 시작됐고, 이상길 교수팀은 여기에 자연스레 합류했다. 그는 지난해 경산 코발트 광산에 이어 올해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와 원리의 유해발굴을 맡았다. 그가 지금까지 발굴한 유해는 약 500여 구. 전국에서 나온 1000여 구 가운데 절반 정도의 유해를 그의 팀이 발굴한 셈이다. 아마 내년에도 진실화해위의 발굴작업이 계속된다면 또 맡아야 할 상황이다.

발굴된 유해, 보관할 곳이 없다

문제는 이렇게 발굴된 유해를 처리할 방안이 없다는 것이다. 현재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가 진실화해위와 임시계약에 의해 산청 외공리와 경산 코발트광산, 충북 청원 분터골에서 발굴된 유해를 플라스틱 상자에 담아 보관하고 있고, 마산 여양리의 163구는 경남대 예술관 아래의 한 컨테이너에 보관돼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거기에 둘 수는 없는 처지다.

진실화해위도 이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책이 없다. 미비한 '과거사 정리법' 때문에 발굴된 유해를 처리할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화장해 없애버릴 수도 없다. 킬링필드를 겪은 캄보디아에는 '킬링필드 박물관(Tuol Sleng)'이라는 게 있어 다시는 그런 역사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차원에서 유해들을 전시해놓고 있다. 하지만, 새로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과거사 규명 자체에 부정적이어서 과거사 재단이나 그런 박물관을 설립하게 해줄지 회의적이다.

이상길 교수는 만나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역사와 화해 차원에서 집단희생 박물관 만들어야

이상길 교수는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집단희생 유해 안치를 위한 공공납골시설을 마련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산청 외공리에서 나온 유해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지난 27일 충북대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거기도 진실화해위와 한시적인 계약에 따라 임시안치하고 있을뿐 별다른 방안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캄보디아처럼 박물관을 설립해 전시함으로써 역사의 교훈을 삼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유골을 드러내 전시하는 데 대한 일부의 정서적 반감도 있을 수 있지만,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거제포로수용소도 복원하고, 제주에도 4·3평화공원이 있지만, 거기에 전시된 어떤 사료보다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유해가 가장 핵심이죠. 어떻게 죽었고, 어떻게 묻혀 있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역사의 비극을 가장 생생하게 드러낼 수 있는 거죠.

-정작 전범국가인 일본은 평화를 주제로 한 각종 시설물들이 많은데, 우리는 의외로 그런 시설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전쟁의 참상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게 민간인학살이고, 그 실상을 보여주는 게 가장 강력한 평화의 메시지라는 거죠. 그래서 전쟁박물관 내지는 민간인 집단희생 박물관을 만드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현 정권에서 그게 가능할까요? 과거사 재단 설립도 어려운 걸로 아는데.

△하지만, 이건 좌·우익이나, 정권 차원의 문제로 접근할 일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인간적인 문제죠. 한나라당이라고 해서 전국 곳곳에 억울한 유골이 묻혀 있는 걸 좋아할 일은 아니라는 거죠. 당시의 가해자를 찾아 이제 와서 처벌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민간인을 재판없이 학살한 국가책임이 명백한 문제입니다. 그렇게 묻혀있는 유해를 발굴해 화합과 화해를 이끌어내는 것도 국가의 책임이라는 겁니다.

-집단희생 박물관 말고 다른 방안은 없을까요?
△지역별로, 각 시·도별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 유해들을 안치하는 납골시설을 만드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겠죠. 아직도 그렇게 죽어간 부모의 시신을 찾지 못한 유족들이 많으니까, 그런 지역별 납골시설이라도 있으면 유족들이 와서 추모라도 할 수 있게죠. 사실 위령공원 같은 시설을 지나치게 대규모로 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런 소박한 납골시설 설치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도 그게 좋겠네요. 그런데 그것도 현 정부가 나서서 해주려 할까요?

△사실 진실화해위원회에 아쉬운 점이 그겁니다. 그런 전체의 틀을 잡고, 각 지방자치단체와 지역 대학, 유족들간의 협력체계를 만들어 주는 역할을 진실화해위가 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너무 건당 사업에만 매달려온 측면이 있어요. 진실화해위는 한시적인 기구라 언젠가 없어진다 하더라도 그런 기반조성을 해놓으면 위원회가 없어져도 진상규명이나 화해 작업은 계속될 수 있다는 거죠.

경남대 이상길 교수.


지방자치단체, 집단희생자 위한 공공 납골시설이라도

-지자체가 나서주면 좋겠지만, 단체장들이 그런 데까진 인식이 못미치는 것 같습니다.

△사건 전체의 규명작업은 중앙정부 차원에서 하더라도, 유해발굴과 공공 납골시설 설치는 지역화합 차원에서 경남도지사가 나서야 할 일입니다. 이건 지역의 문제입니다.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녜요. 뼈에 무슨 이데올로기가 있습니까?

솔직히 돈이 많이 드는 일도 아녜요. 지금은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미리 책정한 용역사업비에 따라 발굴을 하지만, 융통성을 발휘하면 지금보다 훨씬 적은 예산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없어져 돈을 안 준다고 해서 암매장된 채 묻혀있는 게 뻔한 유해를 발굴하지 않고 그대로 둘 겁니까? 경남지역 유해발굴센터, 이런 걸 만들어서 우리지역에 묻혀 있는 유해를 발굴하고, 소박한 안치시설이나마 마련하여 희생자들의 유족이 거기 와서 절이라도 올릴 수 있게 해주면 경남도지사를 얼마나 고마워하겠습니까?


거듭 말하지만 뼈에는 이데올로기가 없습니다. 이건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 정말 인간적으로 잘못된 일 아닙니까? 여러 수만~수십만 명을 구덩이에 암매장해놓은 채 모른 채 하는 건 인간적으로 할 짓이 아닙니다.

산청군 외공리에서 나온 민간인 집단희생자 유골.


-지자체 차원에서 민간인 집단희생자를 위한 공공 납골시설을 만든다면 규모는 어느 정도여야 할까요?
△고민해봤는데, 사실 발굴 후 면밀하게 유해와 유류품에 대한 감식을 한 뒤, 필요한 유해는 유전자 감식을 해놓고 화장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납골시설의 규모도 그리 클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소박한 위령비나 위령탑 하나 정도 세워놓고 거기서 참배라도 할 수 있도록 하면 됩니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이 정도에서 정리를 마무리한다. 이 교수의 연구실을 나와 캠퍼스를 걸어내려오면서 '뼈에는 이데올로기가 없다'는 말이 자꾸 귓속에 맴돌았다. 그렇다. 이건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휴머니즘의 문제다. 하지만, 이런 휴머니즘이나마 우리 김태호 경남도지사는 갖고 있을까? 또 이명박 대통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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