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실리지 못한 글 ‘비겁한 글쟁이들’

기록하는 사람 2008. 3. 3.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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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의 지역에서 본 세상]‘3·15의거의 도시’ 마산은 지금…

마산은 1960년 4·19혁명을 촉발시킨 ‘3·15의거’의 도시다. 1979년에는 부산과 함께 ‘부마민주항쟁’을 일으켜 박정희 독재에 조종을 울린 도시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마산시민들은 오래 전부터 마산을 ‘민주성지’라고 부르며 자랑으로 삼아왔다.

‘민주성지 마산’의 대표적인 민간단체 중 ‘사단법인 3·15의거기념사업회’라는 곳이 있다. ‘3·15의거 희생영령을 추모하는 기념사업과 3·15의거 정신을 영구히 계승 발전시키는 일’을 추진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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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의거기념사업회 홈페이지(http://www.masan315.net/)


다른 지역의 비슷한 ‘기념사업회’들이 대개 그러하듯, 마산의 이 단체도 ‘정신을 계승·발전’하는 일 보다 ‘기념’에만 치우쳐 오히려 3·15정신을 박제화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간간이 있어 왔다.

기념사업회로부터 받은 원고청탁

그런 기념사업회로부터 나는 지난해 가을, 원고청탁을 받았다. 사업회에서 연간지로 발행해온 <3·15의거>라는 책자에 시론(時論)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원고료는 10만 원이라고 했다. 나는 “기념사업회를 비판하는 글이라도 괜찮느냐”고 물었고, “좋다”는 답을 받았다.

스스로에 대한 비판적인 글도 수용할 줄 아는 단체라면 그나마 최소한의 건강성은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글을 써서 편집진에게 보냈다.

비겁한 글쟁이들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인간형이 있다.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일이지만, 안 그런 척 하기 위해 이상한 논리(사실은 궤변)를 내세우는 인간들이다. 나는 이런 사람을 ‘비겁하다’고 부른다.

물론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 그 자체를 나무랄 순 없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자기 이익에 충실한 이를 일컬어 ‘성실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소위 사회지도층 내지는 지식인이라는 인간들의 위선적인 언행이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논리와 명분을 내세우면서 속으로는 철저히 자신의 작은 이익에 집착하는 인간들. 더군다나 글을 써서 대중을 깨우치거나 감화하려는 명색이 글쟁이라는 인간들의 이중적인 행태는 역겹기조차 하다.

내가 몸담고 있는 기자사회에도 그런 인간들은 있다. 기자가 취재원에게 금품이나 향응을 받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그걸 ‘관행’이니 ‘인간적인 정리(情理)’니 하는 말로 합리화하는 부류들이 있다. 심지어 ‘취재원과 좋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고급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는 둥 해괴한 논리에 이르면 그가 왜 기자라는 직업을 택했는지 부쩍 의심이 들기도 한다. 차라리 그냥 ‘돈이 궁해서 받았다’고 하면 그 솔직한 태도에 동정심이라도 생길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이는 거의 없다.

얼마 전 우연히 <3·15의거 제47주년 기념 제23회 전국백일장 입상작품집>이라는 책자를 보게 됐다. 펴낸 곳이 ‘3·15의거기념사업회’와 ‘마산문인협회’ 공동으로 되어 있었다.

3·15정신 부정하면서 3·15백일장 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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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 회원들이 3.15의거 기념비 옆에 나란히 복원된 '은상이샘' 철거를 주장하고 있다. /경남도민일보


이상했다. 마산문협이라면 ‘3·15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이승만과 박정희·전두환 독재를 옹호하는 데 앞장섰던 이은상을 기념하기 위해 일관되게 그의 호를 딴 ‘노산문학관’을 짓자고 주장해왔던 단체 아닌가. 또다른 문인단체인 ‘경남민족문학작가회의’와 ‘경남시사랑문화인협의회’가 반대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노산’을 포기하지 않았던 단체였다.

심지어 ‘3·15의거기념사업회’가 2003년 7월 10일 “(이은상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독재권력의 편에 서서 자신의 이익을 쫓은 권력지향형 기회주의자의 속성을 보였다”며 공식적으로 반대입장을 밝혔을 때도 마산문협은 그 대척점에 서 있었다.

뿐만 아니다. 이은상이 어릴 때 물을 떠먹었다는 ‘은상이샘’을 복원해 ‘3·15의거 기념비’와 나란히 세워둠으로써 ‘3·15정신에 먹칠을 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단체도 바로 마산문인협회다. 또한 ‘3·15의거기념사업회’가 2004년 4월 ‘은상이샘을 철거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한 뒤인 2006년 마산문협은 “은상이샘은 현재의 위치에 엄연히 보존되어야 하며 우물에 대한 한치의 훼손이나 본 협회의 여하한 양보도 없음을 알려드린다”며 ‘분연한’ 입장을 밝혔다.

이처럼 마산문협과 3·15의거기념사업회는 ‘3·15정신’과 ‘이은상’을 둘러싸고 완전히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단체다.

마산문협은 ‘은상이샘을 철거해선 안된다’며 문인들을 상대로 서명운동까지 했다. 가관인 것은 여기에 서명한 문인들의 명단이 ‘제23회 3·15의거 기념백일장 심사위원 명단’과 대부분 겹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학·일반부 운문 심사위원인 이광석·서인숙·오하룡은 물론, 산문 심사위원인 하길남·임신행·조현술이 그렇다. 또한 고등부 운문 심사위원인 김복근·이달균, 산문부 심사위원인 김홍섭·김현우·김태두·백종흠이 또한 그렇고, 초등부 심사위원도 대부분 그러했다.

더 이상 3·15를 팔지 마라

무릇 ‘3·15의거 기념 백일장’이라면 ‘3·15정신’을 되살리고자 마련한 백일장일 터다. 조현술 마산문인협회장도 백일장 입상작품집 발간사에서 마산의 정신을 ‘정의 정신’이라고 규정하면서 “그 정의가 마산의 정신이고 3·15의거를 이끌어간 주체정신이기 때문”이라면서 “정의 정신 계승을 위한 글짓기를 하였고, 3·15 정의 정신의 위대함을 글로써 표현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3·15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독재권력의 편에 서서 자신의 이익을 쫓은 권력지향형 기회주의자(3·15의거기념사업회의 성명서)’인 이은상을 마산의 정신적 어른으로 세우려는 이중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이쯤에서 나는 3·15의거기념사업회의 정체성은 도대체 뭔지 묻고 싶다. 겉으로는 ‘노산문학관’에 반대하고 ‘은상이샘’을 철거해야 한다고 하면서, 뒤로는 이은상을 부활시키기에 여념이 없는 단체와 손잡고 ‘3·15정신 계승’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극심한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마산문협 소속 문인들에게도 묻고 싶다. 정녕 그대들이 이은상을 그토록 추앙하고 싶다면, 이제 그만 3·15에서 손을 떼는 게 어떨지. 3·15를 팔아 이익을 취하고 폼도 잡으면서, 이은상도 놓치고 싶지 않은 당신들이야 말로 ‘전형적인 기회주의자’가 아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기 바란다.

명분과 이익을 둘 다 챙기려면 궤변을 만들 수밖에 없다. 이건 정말 비겁하다. 제발 좀 솔직해지자.

하지만 이 글은 <3·15의거> 책자에 실리지 못했다. 글을 보낸 지 한 달이 넘도록 아무 소식이 없어 전화를 해봤더니 기념사업회 간부 중 내 글을 껄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책 발간도 계획보다 수개월이나 늦어져 엊그제야 책이 나왔다고 한다. 그 책에 이 글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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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왔지만, 아직 3·15의거기념사업회로부터 청탁했던 원고가 빠져서 미안하다는 전화 한 통화 받지 못했고, 빠진 이유에 대한 설명도 공식적으로 듣지 못했다. 물론 원고료도 받지 못했다.

그래도 그들의 백일장 심사는 계속된다

책이 나온 시기에 기념사업회의 의결기구인 이사회가 열렸고, 거기서 마산문협에 계속 3·15의거 기념 백일장 심사를 맡기느냐, 마느냐는 안건이 논의됐다고 들었다. 일부 논란도 있었지만 올해도 마산문협에 맡기기로 했다고 한다.

<경남도민일보>의 기사를 보니 지난 1월 22일 3·15의거기념사업회 제9대 회장으로 뽑힌 백한기(66) 씨는 “현재 경남도 지정 기념일로 돼 있는 3·15의거 기념일을 반드시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도록 노력하겠다”며 “뿐만 아니라 3·15 희생정신의 내용을 초중고 교과 과정에 싣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3·15의거기념사업회에는 이미 ‘3·15정신’이 없다. 이게 ‘민주성지 마산’에서 ‘민주의거 정신’을 계승한다는 ‘민주단체’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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