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준한 산·절벽서 제사 올리며 백성 생각해 규모 최소화
하늘은 무심 “물 대기 고르게” 타일러도 날마다 다투는 송사
기우제 지낸 여항산·와룡정·주물진 등 실제와 거의 같은 묘사
가뭄은 모내기가 끝나는 5월부터 어린 벼가 쑥쑥 자라야 하는 6월까지 거의 두 달에 걸쳐 이어졌다. 하늘이 내린 재앙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농토가 갈라지고 곡식이 타들어갔으며 사람들 마음 또한 그와 마찬가지였다.
오횡묵은 만사 제쳐두고 윤6월 2일부터 이틀에 한 번씩 기우제를 지냈다. 그 하루 전날부터 기우제가 끝날 때까지 공무는 일절 보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공무는 조세를 거두거나 형벌을 집행하는 등 백성들을 족치는 일이었다. 반면 백성들과 더불어 가뭄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그치지 않고 이어졌다.
신통찮았던 기우제의 효력
처음 기우제를 지낸 윤6월 2일부터 마지막 열다섯 번째 기우제를 올린 다음날인 7월 1일까지 29일 동안 비가 내린 날은 10일이었다. 제대로 내린 것은 4일이 전부였고 오나마나 한 수준은 6일이었다.
4일 “한 번 밭을 갈만한 비가 왔지만 심각한 가뭄 끝이라 겨우 해갈(解渴)이 될 뿐이다.” 20일 “소나기(驟雨)가 오고 빠른 번개가 쳤다. 밭을 한 번 갈 정도가 되어 매우 기뻤다.” 26일 “벼락이 치고 비가 내렸다. 오늘 비가 해갈을 가장 잘해 주었다.” 그리고 7월 1일에 “비가 오다가 도로 그치고 흐렸다. 비가 내린 덕택으로 거의 해갈이 되었다.”
이밖에는 “소나기가 먼지를 적셨고”(2일) “비가 오고 흐렸다가 개였으며”(5일) “가랑비(微雨)”가 드문드문 있었을(7·14·15일) 뿐이거나 “간간이 비가 뿌리는”(21일) 정도였다.
나머지 19일은 비가 없었다. “처음부터 밤까지 구름이 검었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6일) 얼마나 간절하게 비를 빌고 기다렸는지 그 절절한 심정을 알 수 있다. 기우제를 지낸다 해도 그 정성만큼 비례해서 비가 내리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 어려울 땐 ‘고르게’가 최선
그래서 농사는 형편이 없었다.
“제방과 보가 마르고 벌판과 습지도 갈라져 다시 농사를 일으키려 해도 가망이 없어 보였다. 어쩌다 시내 가운데를 파서 두레박을 매달아 물을 퍼대지만 한 수레의 나무에 한 국자의 물을 뿌리는 것과 같았다. 모내기를 못한 곳은 모판이 타서 문드러지니 장차 벼농사 대신 다른 것을 파종해야만 하였다. 밭곡식은 잎만 남고 가을에 바랄 바가 없게 되었다.”(6일)
이쯤 되면 들판에서는 물을 둘러싸고 전쟁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물이 턱없이 모자라는 상태에서 자기 논밭에 조금이라도 더 물을 대기 위해서였다. 그대로 버려두면 세력이 센 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이고 민심 또한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십상이다.
오횡묵이 오로지 ‘고르게(均)’를 내세운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일찍이 불환빈 환불균(不患貧 患不均)이라고들 하였다. 가난한 것(貧)이 아니라 고르지(均) 못한 것이 재난이라는 말이다.
“일찍 상평(上坪)·대평(大坪)에 나가 물을 대는 일에 고르지 못한 폐단(不均之弊)이 없도록 단단히 타일러 조심시켰다.”(7일) 객관성 확보를 위하여 농민을 참여시키기도 하였다. “강한 쪽이 완전히 삼키고 약한 쪽이 모퉁이를 보고 돌아서서 하소연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수집사와 병교들을 따로 정하여 영기(令旗)를 주고 부지런하고 성실한 농민 4명을 안동(眼同=입회인)으로 삼아 나누어 보냈다.”
11일에는 “상평(上坪)·하평(下坪)에 차례대로 나가 물 대기를 고르게 하라고 타이르면서 장교와 보(洑) 감독관들을 따로 불러 모아 단단히 타일러 경계시켰으며” 23일에도 “읍 가까이 보가 있는 논에 나가 물을 고르게 대어 쓰라고 특별히 깨우쳐 일렀다.”
열세 번째 기우제를 지낸 26일에는 “전후로 각처에 경건히 기도하며 오가는 길에 만나는 사람마다 고르게 물을 대라고 타일러 밝혔다”고 적었다. 기우제를 지내는 내내 그렇게 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으니 “물을 다투는 송사는 도리어 날마다 일어났다.”
금품을 나눠주고 관폐도 줄여
물 대기를 고르게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았다. 농민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위로·격려할 필요도 있었다. 이 때 요긴하게 쓰인 것이 돈과 담배였으며 때로는 참외도 동원되었다.
6일은 “돈을 1전씩 두레박질하는 사람(槹夫)에게 주었다.” 담배를 주었다는 기록은 7일 “담배를 한 단(團) 별도로 주니 무릇 500명 남짓이 되었다”와 11일 “담배 한 단(團)씩을 들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로 두 차례 나온다. 26일에는 당시로서는 귀한 과일이었던 “참외(眞瓜)를 농부들에게 나누어 먹였다.”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도 보인다. 기우제 규모를 조촐하게 했으며 동행하는 인원도 최소로 줄였다. “음식 등은 관아 주방에서만 갖추게 하였고 아랫것도 통인·관노·사령 1명씩만 데리고 민간은 함께하지 않도록 하였다. 다만 밤이 되어 돌아왔기에 어쩔 수 없이 초롱은 들어야 했고 그 일꾼이 4~5명이었다.”(26일) 고을 수령은 행차 때는 어지간하면 가마를 타고 다녔다. 그런데도 기우제 때는 말을 타는 정도에서 그쳤다.
기우제 자리는 지금 어디일까
오횡묵이 기우제를 지낸 장소는 모두 일곱 군데인데, 비공식으로 지낸 14차와 15차의 자이선을 빼면 여섯 곳이다. 사직단(1·7차), 여항산 용연단=용연(2·8차), 주물진 용단=주물단(3·9차), 벽사단(와룡정)=벽사강=벽사단=와룡강(4·6·10·12차), 여항산 상봉=여항산(5·11차), 주산 별단(13차)이다.
이 가운데 지금도 위치를 제대로 짚을 수 있는 데는 주물진 용단, 벽사단(와룡정), 여항산 상봉과 사직단 세 곳이고 나머지 사직단, 여항산 용연단과 주산 별단은 아무리 해도 짐작만 가능한 정도다.
먼저 짐작만 되는 장소를 보면 첫째 사직단은 오횡묵이 부임 이튿날 읽은 <군지>와 한강 정구 주도로 펴낸 <함주지>에 각각 “서쪽 1리다”와 “서쪽 100걸음 즈음이다”고 나오는데 지금은 흔적이 없다. 둘째 여항산 용연단은 앞에서 말한 <군지>와 <함주지> 모두에 기록이 없으며 오횡묵은 기우제를 지낸 날 “15리 거리”라 적었다. 이것이 맞다면 여항산과 맞먹는 거리여서 그 산중이 되는데 위치를 특정하기는 어렵다. 셋째 주산 별단의 경우 함안의 진산은 여항산이고 주산은 비봉산이므로 비봉산 기슭에 따로 차렸던 제단으로 짐작된다.
주물진은 풍탄 나루
위치를 제대로 짚을 수 있는 나머지 세 곳 가운데 주물진 용단은 오횡묵이 읽은 <군지> ‘방리(坊里)’조에 “마륜면(馬輪面) 외동(外洞):30리다. 용암(龍巖)에 기우단(祈雨壇)이 있다”고 나오고 ‘단묘(壇廟)’조에는 “주물단:북쪽 30리”라 적혀 있다.
주물진 용단=주물단에서 지낸 두 차례 기우제의 축문에는 모두 풍탄(楓灘)이 언급되어 있다. “저 풍탄을 돌아보니/ 푸른 절벽이 깎아지른 듯 서 있다.”(6일) “풍탄 여울이 만 번 꺾어지니/ 그 가운데 신룡(神龍)이 계신다.”(18일).
풍탄(법수면 주물리 804-1)은 법수산 일대에서 흘러내린 물이 들판을 지나 남강으로 합류하는 자리다. 1990년대까지 의령군 정곡면 백곡리로 이어지는 나루가 있었다. 지방도 1011호선의 부분이었는데 1995년 바로 옆에 백곡교가 놓이기 전에는 작은 승용차는 물론 커다란 시외버스도 여기서 배에 실어 건네야 했다. 당시를 일러주는 콘크리트 선착장이 양쪽에 자취로 남아 있다.
풍탄 바로 옆 북쪽 기슭에는 바위 절벽이 거의 수직으로 위태롭게 강가에 바짝 붙어 있다. 거뭇거뭇한 색깔인데 꽤 높아서 멀리 의령 쪽에서 바라보면 바로 식별이 되었다. 올라가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더니 요즘도 무속인들이 기도를 바치는 모양이었다. 조촐하게 진설해 놓은 제물과 향초를 태운 흔적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기록 풍부한 벽사단(와룡정)
벽사단(와룡정)(군북면 월촌3길 71-85)에 대한 기록은 <함안총쇄록>에 많이 나온다. 거기서 처음 기우제를 지낸 8일 “제단이 절벽 위에 있고 아래가 회담(匯潭)이다. 제사를 지내는데 어떤 북소리 같은 소리가 들렸다. 제사를 마치고 집사들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 무슨 소리였나?’ ‘소리가 물속에 있었으니 반드시 용이 읊조렸습니다.’ ‘용이 하늘에 읊조려도 비가 오지 않으니 무슨 이치인지 이해하기 어렵구나’ 하며 탄식했다.”
두 번째 기우제를 지낸 12일에는 와룡정에서 잠깐 쉬면서 산족면 집강(執綱)이 바치는 수박(手朴)으로 더위를 씻기도 하였다.
이태 전인 1890년 3월 8일에는 경치가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몸소 찾아가기도 한 장소였다. 와룡정 주인 황주영(黃周永)을 만났고 그 아버지 황정래(黃鼎來)가 1867년 생전에 정자를 세운 다음에 쓴 기판(記板)도 읽었다.
황주영은 오횡묵에게 와룡정을 둘러싼 경관을 이렇게 설명했다. 동서남북을 돌아보며 그 특징을 얘기한 것이었다.
“남쪽 방어산(防禦山)은 푸르게 솟은 것이 마치 옥대를 맨 선인(仙人)이 단정히 손을 꽂고 선 듯합니다. 북쪽은 산머리가 불쑥 올라왔다가 다리미 손잡이처럼 평평하고 둥근 것이 강에 들어가 멈추니 용머리 같아 용수산(龍首山)입니다. 동쪽에 층층이 쌓인 암벽은 높이 100길에 길이 활 여러 바탕인데 적벽(赤壁)이라 합니다. 서쪽은 빛나는 모래가 눈처럼 깔려 하얗게 보입니다. 모래가 다하면 갈대와 나무가 가득하고 손바닥처럼 평평한 뜰이 있습니다.”
지금도 가면 이와 비슷한 느낌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건너편 모래는 조금만 남았다. 갈대와 나무가 가득하던 데는 대부분 논밭이 되었다. 이쪽 강변 또한 거의가 농지로 바뀌엇다. 따라서 용수산이 강으로 스며들던 자취는 찾아보기 어렵다. 와룡정은 옛날 모습 그대로지만 많이 낡고 허름해졌다. 옆에 자리잡은 절간 운흥사도 경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험하고 높은 여항산
여항산 상봉에서 기우제를 지낸 10일 오횡묵은 이렇게 적었다 가파르고 좁은 것이 두 사람도 나란히 설 수 없을 정도여서 이렇게 굴비두름처럼 한 줄로 서서 오르내렸다고 표현했을 것이다.
“산이 아주 험준하여 물고기를 꿴 듯이 올라가고 물고기를 꿴 듯이 내려왔으니 험하고도 높았다.”
2019년 5월 6일 올라가 보았더니 영락없이 그대로였다. 정상은 크고작은 바위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등산길은 봉성저수지 서쪽 좌촌마을이 시작점이었다. 오횡묵도 아마 함안읍성에서 가장 가까운 이리로 해서 올랐을 것이다.
이런 험준함은 <함주지>에도 실려 있다.
“산꼭대기 바위는 깎아지른 듯하다. 남쪽으로 뿔 같은 돌은 마치 낙숫물을 받는 돌 같다. 그 위는 조금 평평하여 열 사람 남짓이 앉을 수 있다. 사람들이 여기 다다라서는 두려워서 벌벌 떨며 어지럼증이 날 것 같다.”
오횡묵은 기우제를 정상 바위에서 평평한 데를 골라 올렸을 수도 있고 능선 따라 북쪽 방향 300m 정도 지점(헬기장 아래)에서 지냈을 수도 있다. 함안군·창원대박물관이 2006년 펴낸 <문화유적분포지도-함안군>에서 ‘여항단(餘航壇)’으로 표기된 자리다. 1587년 한강 정구가 제단으로 쌓았다는 돌무더기가 거기 있다.
다시 700m 정도 능선을 타고 북쪽으로 갔더니 한쪽 벽이 허물어지지 않은 돌무더기가 나왔다. <문화유적분포지도-함안군>에서 ‘여항산성Ⅱ’라 적은 부분인데 정상에 자리잡은 ‘여항산성Ⅰ’의 관문성으로 간주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하지 말고 달리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국시대 또는 통일신라시대 석성이라는데, 그것이 허물어지고 나서 이후 세대가 제단으로 재활용했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이번에 본 여항산은 소나무를 빼면 대다수가 소사나무였다. 오래된 나무는 없고 어린나무가 많았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북한군과 싸우면서 통째 불태웠기 때문이다. 그 뒤 식생이 새로 형성되면서 소사나무가 대세를 이루게 된 모양이다.
소사나무는 하늘을 향해 있는 힘껏 팔을 벌린 모습으로 숲을 이루었다. 아래는 조용하고 그윽하였으며 위로는 풍성하였다. 가지 사이사이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면 느낌은 더욱 산뜻해지고 보기도 좋았다. 이토록 무리를 이룬 소사나무는 여태 본 적이 없지 싶다. 70년 전 아픈 역사를 품은 여항산과 함께 이런 소사나무를 잘 가꾸고 널리 알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훤주
※ 2020년 발행한 도서출판 피플파워의 <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에 들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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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를 발행하고 나서 2020년 12월에 사직단 터가 발견 발굴되었다. 함안읍성 정밀지표조사 과정에서였다. 우리문화재연구원이 맡아 진행한 작업이었는데 함안읍성 일대에 대해서만 하면 되는데도 굳이 바깥까지 조사한 덕분에 찾아낼 수 있었다.
위치는 함안면 북촌리 1257이었는데 함안읍성 서쪽 성벽에서 100걸음 정도 떨어졌다고 해도 무방한 자리였다. 덕분에 오횡묵 군수가 기우제를 지낸 자리 하나를 더 특정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군수 한강 정구가 주동해서 1587년에 만든 <함주지>에서 사직단을 찾아보면 이렇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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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社稷壇) = 읍성에서 서쪽으로 100걸음 정도에 있다. 제단(壇=제사를 지내는 장소)과 토담(壝=제단을 둘러싼 울타리)이 좁고 누추하며 지키는 사람 또한 없었다. 만력 정해년(1587년) 봄에 그 터를 크게 넓혔는데 함안군 사람 이희성(李喜成)과 오진(吳溍)이 그 일을 감독했다.
제단은 높이가 3척이고 한 방면이 25척이다. 토담은 한 방면이 75척이고 담장 높이는 5척8촌이다. 신실(神室=신위를 모시는 방)은 한 칸인데 단의 서남쪽에 있다. 신주(神廚=제사 음식을 만드는 부엌)는 3칸인데 담장 밖 서북쪽에 있다. 재실(齋室=제사와 관련해서 쓰려고 옆에 지은 집)은 3칸으로 신주 북쪽에 있는데 자물쇠로 문을 굳게 잠그고 방토를 발랐다. 가을 칠월 무신일에 위판(位版=위패=신위)을 봉안했다.
사직단기 = 만력 병술년(1586년) 겨울에 서원(西原) 정구는 조정에서 함안군의 명을 받고 10월 계미일에 임지에 도착했다. 그 다음날은 목욕재계를 하였고 사흘째인 을유일에 사직신을 알현했다. 예절을 마치고 삼가 제단과 토담을 살펴보니 모르는 사이에 한탄스러워 탄식하고 두려워서 몸이 떨렸다.
규정과 법도에 어긋날 뿐 아니라 좁고 누추해 법식에도 맞지 않았다. 제단은 기울어지고 섬돌은 뒤집어지고 문은 떨어지고 담장은 부서졌는데다 재실과 부엌도 모두 그 자리에 없었으니 구차하고 엉성해서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변방을 지키는 신하가 왕명으로 높이 받드는 제사인데 이와 같으니 어찌 합당하겠는가. 수해와 가뭄이나 전염병 같은 재난에 인심과 풍속이 무너지는데 어찌 부끄럽지 않겠으며 어찌 구제하지 않겠는가.
진실로 어리석고 불민하지만 이미 여기 수령이니 감히 용납하지 못하고 고쳐서 바로잡는 것을 줄곧 도모했다. 부로(父老)에게 물어 이희성·오진을 얻고는 그 일을 부탁했다. 이희성은 정밀하고 민첩하며 오진은 조심스럽고 확실한데 모두 일찍이 업유(業儒=양반의 서자로 유학을 공부한 사람)들로 일에 밝았다. 서로 마음을 맞추고 힘을 써서 내가 손으로 그려보이며 가리킨 것에 혹시 모자라는 것이 있어도 법도대로 경영하였으며, 잘 헤아려서 처리하여 자세히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옛 터를 담으로 두르고 섬돌을 3척으로 해서 제단으로 삼았으며 담은 섬돌보다 갑절로 해서 토담을 감쌌다. 제단은 지름이 25척이고 토담은 한 방면이 75척이다. 제단 서남쪽에 방을 한 칸 세우고 신위를 봉안했다. 토담에는 사방에 제각각 문으로 기둥 두 개를 세우고 붉은 시렁으로 가렸다.
담 바깥 서북쪽 모퉁이에는 재실과 신주를 각각 3칸씩 세우고 다시 작은 담장으로 둘렀다. 재실은 마루와 방을 갖추었고 신주는 살피는 장소가 있다. 북문의 안에는 패백과 축문의 구덩이가 있고 서문의 밖에는 여생(麗牲=희생=제사에 제물로 바치는 동물)의 말뚝이 있다. 제단의 네 면은 제각각 방색(方色=방위를 나타내는 색깔로 동 청(靑), 서 백(白), 남 적(赤), 북 흑(黑))의 흙을 바르고 위에 천막과 돗자리를 갖추었는데 모두 새것이다. 또 사방을 30보씩 한정하여 나무꾼과 목동을 금했다.
정해년 2월 상무일(上戊日=戊(무)자가 들어가는 첫 날)에 사당에 일을 아뢰었지만 일을 꼭 서두르지 않고 백성들의 힘을 빼앗지 않으면서 오로지 틈을 엿보아 차츰 이룩해 가을 7월 무신일에 축문을 닦아서 마쳤음을 아뢰었다.
이에 자물쇠를 엄격하게 잠가서 마당과 곁채가 정결하였으며 고지기가 떠나지 않아 가까이에서 감히 야단스럽고 떠들썩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다섯 방토(동·서·남·북·중)의 신을 안치하고 들판과 진펄(=습지)의 신을 봉안하는 일이 거의 다 이루어졌다. 또 제기를 갖추어 보관하고 제사 예절을 써놓았으니 선비들이 익혀서 올라가고 내려오며 나가고 물러나는 것에 종사할 때 옛일을 잘 헤아려 헷갈리지 않도록 했다.
또 뒤에 와서 지금을 계승하는 사람(후임 군수)과 한 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이 오늘날 정성을 다한 뜻을 깊이 헤아리지 못한다면 제사 지내는 예식을 할 때와 (건물을) 수리할 때 혹시 허둥거리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되고 또 이·오의 부지런함도 알지 못하면 안 되므로 이에 삼가 전말을 갖추어 아울러 쓴다. 정해년(1587년) 7월 일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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