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노소 즐겨 찾으니
절 문턱 맨들맨들
소박한 당시 유일 사찰
칠석날 어린아이도 치성
수령도 시주에 적극 동참
원효암(元曉菴)과 의상대(義相臺)는 여항산이 북쪽으로 뻗어내리는 미산(眉山) 골짜기 가파른 비탈에 붙어 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일대에서 북한군과 유엔군이 격전을 벌이는 바람에 불에 타서 칠성각(七星閣)만 빼고 옛날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원효암과 의상대는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 한적하다. 하지만 130년 전 오횡묵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도 콘크리트 좁은 도로를 한참 올라가야 하는 깊은 산속인데도 그때는 그랬다. 오횡묵은 여기서 재를 지내기도 하였고 일반 백성들 또한 친근하게 여기며 즐겨 드나들었다.
오횡묵이 치성 들였던 자리
1890년 1월 22일 아침 오횡묵은 왕대비의 생일을 맞아 하례를 올리고 밥을 먹은 다음 곧바로 원효암 치성처로 갔다. 경건하게 정성을 들이는 일(虔誠事)을 시작하는 날이었다. 제사를 지낼 사람과 제물(祭物)은 이틀 전에 올려보냈다.
“신각(申刻=오후 4시 전후)에 강회림(姜晦林)이 경건하게 정성을 들이는 일로 올라갔고 통인 신응두(申應斗)와 관노 성용(性容)이 따라갔다. 제물로 향과 초, 백지(白紙)·장지(壯紙) 세 묶음(한 묶음은 100장)씩, 황소 한 마리, 삼색 비단 석 자씩, 삼색 과일과 쌀 한 섬, 그 밖에 제기와 자리 등을 새로 장만하여 보냈다.”(1890. 1. 20.)
장소는 원효암도 의상대도 아니고 그 위에 있는 여항산 꼭대기였다. “회림이 올라가 황토로 삼층단을 쌓고 제물을 진설하고는 단소(壇所)에서 재계하고 있었다. 내가 곧바로 단소에 올라가 회림을 보았는데 그가 재의를 입고 단상에 꿇어앉아 도량을 정리하니 매우 정결하였다. 한 번 즐겁게 둘러보고는 그대로 암자에 내려왔다.”
본격 치성은 한밤중에 이루어졌다. “밤 자각(子刻)에 회림이 단에 올라 치성을 들였다. 이날부터 무릇 21일을 밤마다 자시에 설행한다. 제사를 마친 뒤에도 물러나 별실에 거처하며 사람과 접하지 않고 말도 안 하니 정성이 참 극진하였다.” 회림은 이렇게 밤길을 오르고 날마다 정성을 쏟은 끝에 한 달이 지난 2월 23일에야 “산에서 내려왔다.”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빌었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제물을 마련한 주체가 오횡묵이라는 사실만 분명하다. 짐작할 수 있는 실마리는 어렴풋이 남겼다. 첫날 새벽까지 재를 지내고 지은 한시에 있는 일곱 글자다.
‘나라와 집안과 일신을 위하여(爲國爲家又爲身)’.
강회림은 어떤 인물일까? 회림은 이름이 아니고 호(號)가 아닐까 짐작된다. 오횡묵은 1889년 6월 25일 여러 인물을 평하면서 “회림은 생김새가 빼어나고 어깨가 우뚝 솟은 미장부이며 말주변이 좋고 문장이 아름다워 태평성세에 조정에 나가 모범이 될 만하다”는 등 호평을 쏟아냈다. 같은 해 11월 7일에는 “나는 사귀기를 좋아하지만 50년 남짓이 되도록 오직 한 사람뿐이니 바로 강회림”이라고 써서 본인에게 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믿고 좋아하는 사람이다 보니 자신이 발원하여 경건하게 정성을 들이는 일(虔誠事)을 대신 맡길 수 있었다. 회림은 이듬해 4월 7일에도 같은 일로 원효암에 올라갔다가 사흘 뒤에 내려왔다. 부처님오신날 사월초파일에 맞춘 일정이었던 듯하다.
오횡묵의 눈에 비친 원효암·의상대
원효암은 지금도 그때도 자그마했다. 1890년 1월 22일 원효암에 이른 오횡묵에게 “작기가 손바닥만하게” 보였다. “다섯 칸 선방(禪房)인데 원효대사가 수도한 고찰로서 매우 청결하였다.”
절간은 어지간하면 부처님 모시는 전각과 스님들 묵는 요사채가 따로 들어서 있다. 하지만 원효암은 너무 작아 스님들 묵는 선방이 불전을 겸했다.
“암자는 법당이 없고 다만 선방 한 칸의 탁자에 작은 금불상 하나를 모셨다. 머무는 스님과 찾아온 속인은 불상을 모신 방에 묵었다. 또 곁방(耳房)이 하나 있어 거처하였다.”
원효암 근처에는 바위와 샘이 있었다.
“남쪽으로 수십 걸음에 암석이 축축 늘어져 있고 우뚝하게 튀어나온 큰 바위 아래에는 샘이 있었다. 맛이 매우 깨끗하고 차가워서 마시면 이가 시리고 향이 뱃속까지 퍼져 더러움을 씻어준다. 황홀하여 신령을 생각하도록 하고 꽃비가 온몸에 두루 퍼지는 것을 문득 깨닫게 한다.”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의상대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
“동쪽으로 활 한 바탕 거리(一武地=대략 100미터)에 50길 석벽 위에 홀로 우뚝 선 네 칸 암자가 있는데 의상선사가 수도한 의상대다. 오래되고 무너져내려 매우 황량해 보였고 수리해야 마땅하지만 스님은 힘쓸 방도가 거의 없다고 했다.”
의상대 바로 옆에는 소나무와 바위가 있었다.
“서쪽 지척 석벽 위에 소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열 길 남짓 높이에 수십 아름 크기다. 위로 삼층으로 가지와 줄기가 지붕처럼 축축 늘어졌는데 암석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그림처럼 울창하였다. 아래에 암석이 있고 가운데가 솟아 방석 같다. 의상이 일찍이 불경을 읽었다고 한다.”
그 방석 바위를 찾아봤더니 의상대 아래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일반 백성들에게도 각별했던
이처럼 바위와 암자, 소나무와 샘물이 어우러져 있는 원효암과 의상대는 따로 떨어진 둘이 아니고 하나였다. 이런 두 절간을 즐겨 찾은 것은 오횡묵도 마찬가지였고 함안 백성들도 다르지 않았다.
오횡묵은 1892년 7월 14일 이렇게 적었다. “내일은 백종(百種)이다. 토속에 원효암에서 목욕하면 상서롭지 못한 것들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관속들은 공무에 매여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오횡묵은 크게 선심을 썼다. “풀어 보내고 마음껏 놀다가 다음 날 오시에 돌아와 대령하라는 뜻으로 분부하였다.”
백종은 갖은 과일과 채소가 많이 나서 모든 씨앗을 두루 갖춘다는 뜻이다. 백중이라고도 하는데 바쁜 논메기가 끝나고 여름 농한기라 할 수 있는 때이다. 불교에서는 세상을 떠난 조상의 영혼을 천도하는 법회를 여는 우란분절로 삼는다.
견우와 직녀가 한 해 한 번 만나는 칠석에도 함안 사람들은 원효암을 찾았다. 주인공은 여자가 아니고 남자, 어른이 아니고 아이였다. “부중(府中)의 남자아이들은 대부분 원효암으로 달려가 치성을 들이고 바깥 마을에서도 그렇게 하는 이가 많다. 이것이 이 고을의 풍습이라 한다.”(1890. 7. 7.)
함안에 하나뿐이었던 절간
이처럼 원효암과 의상대는 상하 구분 없이 두루 즐겨 찾는 절간이었다. 물론 자리 잡은 데가 멋지고 좋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함안 사람들에게 달리 찾아갈 사찰이 없다는 사정도 한몫하였다.
오횡묵이 1889년 4월 22일 부임 이튿날 읽은 <군지(郡誌)>에서 확인된다.
“원효암 : 미산(眉山)에 있다. 의상대암 : 미산 위에 있다. 바위와 산봉우리가 기이하고도 예스럽다. 경계가 시원하게 트였다. 천연으로 생긴 석문이 있어서 절승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이밖에 주리사(主吏寺)·미산사(眉山寺)·사자사(獅子寺)·아현사(阿見寺)·청송사(靑松寺)·심원사(深源寺)·은적암(隱跡庵)·흥성사(興聖寺)·약사암(藥師庵)도 나오지만 모두 ‘지금은 없다(今無)’고 적혀 있다.
그리고 대사(大寺)가 하나 현존한다고 적혔는데 “위치가 여항산 남쪽 기슭(南麓)이다.” 당시는 함안군 비곡면(比谷面)이었고 지금은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이다. 함안 사람들이 찾아가려면 여항산을 넘어야 했던 것이다.
원효암·의상대는 언제부터 있었을까? 기록을 보면 아무리 올려 잡아도 임진왜란이 끝난 1600년대가 상한이다. 함안군과 창원대학교박물관이 2006년 펴낸 <문화유적분포지도-함안군>에 “창건 연대는 미상(未詳)이며 사기(寺基)에 의하면 1370년에 세웠다”고 되어 있으나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먼저 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지 않는다. 함안군 조항 ‘불우(佛宇)’ 항목에 주리사·미산사·사자사·아현사·청송사만 적혀 있다. 1587년 편찬된 <함주지>에도 그 존재가 없다. 거기에는 존폐 여부를 떠나 주리사·미산사·사자사·아현사·청송사에 더해 송방사(松坊寺)·북사(北寺)·쌍안사(雙岸寺)만 있을 뿐이다.
원효암과 의상대가 나오는 것은 <함주지> 2권이 처음이다. 오횡묵이 읽은 <군지>와 비슷하게 적혀 있다. 1587년 <함주지> 1권이 편찬되고 나서 150년가량이 지나 이휘진(李彙晉)이 1738~43년에 함안군수로 있을 때 증보된 내용이다.
원효암 주지는 허풍을 떨고
실태가 이런데도 스님들은 허풍을 쳐댔다. 절간 작명부터가 원효·의상이라는 신라 시대 걸출한 두 스님의 이름팔이일 수 있다. 1890년 1월 22일 오횡묵을 만나서 주지스님 인오(仁旿)가 한 말들이다.
“의상선사의 밥은 반드시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루는 원효가 와서 설법하다 가려고 하자 의상이 만류하여 함께 배불리 먹자고 하였다. 때가 지나도 내려오지 않아 오래 기다리다 원효가 갔다. 뒤에 선녀가 공양하러 내려오니 의상이 ‘오늘은 무엇 때문에 늦었는가?’ 물었다. 선녀가 ‘화엄신장이 허공에서 호위하여 멋대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고 답하였다. 의상이 ‘아차! 원효가 이룩한 도가 정묘(精妙)한 것을 생각 못했구나’ 하였다.”
“원효가 열반할 적에 ‘이 암자가 남김없이 무너져 내릴 때는 나는 반드시 세상에 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중생들이 지금까지 전해오면서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나이 든 사람들은 모두 ‘내가 어렸을 때 노인에게 듣기를 암자 서쪽 버팀목이 무너지면, 당장이라도 이 암자는 무너질 것이다’라 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도 들은 적이 있다. 이 모양으로 무너져내린 지가 몇백 년인지 모르니 참 이상한 일이다.”
이밖에도 이상한 얘기는 많았다. 여색을 탐하거나 개고기를 먹은 사람이 오면 한밤중에 50길 아래 구덩이로 던져지는데 그래도 상처는 없다든지, 험준한 산악이지만 호랑이나 표범이 나오지 않는다든지, 의상·원효와 동시대 인물인 윤필((允筆)이 가까이에서 도를 닦았다든지 하는 말들이다.
인연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고
원효암과 의상대는 뒷배가 든든하지 않았다. 1890년 1월 22일자 <함안총쇄록>에서 오횡묵은 주지 인오 스님이 “한 해 전 7월에 해인사에서 왔다”고 적으면서 “본디 전토나 돈이 없어서 쓸 물건은 매번 본부(本府=해인사)로부터 가져왔다”고 했다.
이런 사정을 알고 오횡묵은 1890년 윤2월 3일 의상대 수리를 위해 공형을 불러 분부하였다. “해가 갈수록 무너져 내려 하루도 못 버틸 것 같다. 스님들이 도와 달라고 여러 차례 간청했지만 지금까지 도와주지 못했다. 관아도 특별하게 수십 냥을 시주하고 각청들도 이를 따라 다소나마 도움을 주어야겠다.”
오횡묵은 민간에서 금품을 거두는 것도 독려하였다. 시주할 사람을 모으도록 권선문(勸善文)을 지었다. “만세토록 경건히 비는 이 땅을 황무지가 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재산은 가볍고 의리는 중하다는 말을 들은 적 있나. 복전(福田)을 넓혀 여러 생에 즐거움이 끝이 없기를. 지혜의 달이 길고 밝게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네.”
그러고는 1890년 8월 27일 올라가 보았다. “결구(結構)가 정밀하고 시내와 산은 채색을 더하였다. 새로 산신각(山神閣) 한 채를 지었는데 더욱 기이하였다.” 한시도 읊었다. “남여로 삐걱대며 가파른 산 깊숙이 올라가네/ 스스로 시주가 되어 보태니 더욱 기쁘네/ 내 소원은 산왕으로 이곳에 편히 지내며/ 때로 도력으로 이 백성들을 구제하고 싶네.”
원효암·의상대는 오횡묵 이후로도 명승으로 꼽혔다. 동아일보 1927년 6월 10일자 “위인걸사(偉人傑士)가 족출(簇出)하던 함안(3)”을 보면 “미산(眉山)의 원효암(元曉庵) 의상사(義湘寺)가 …절승(絶勝)으로 유명하다 한다”고 되어 있다.
앞서 오횡묵은 의상대를 중수하면서 산신각도 새로 지었다고 적었다. 그런데 이후 기록을 보면 산신각이 아닌 칠성각으로 나온다. 오횡묵이 잘못 적었을 수도 있고 산신각이 칠성각으로 이름을 바꾸었을 수도 있다.
<동아일보>는 1934년 7월 20일자에서 “의상대사 원효암에서는 대담한 절도범이 침입하여 칠성각에 걸어놓은 산왕화상 신중화상 석가화상 3매를 가져간 사실이었다”고 했다. 또 <매일신보>는 1935년 8월 17일자에 ‘함안의 명승 칠성각 낙성’ 기사를 실었다.
오횡묵은 이웃 고을 창원에서 옥사가 났을 때 원효암으로 몸을 숨기기도 하였다. 1892년 5월 15일 진주와 함안의 경계 성전암(聖殿庵)에 왔다가 이튿날 산족면(山足面) 신동(申洞) 도훈장(都訓長) 청재(聽齋) 조상규(趙相奎)의 집으로 옮겼다. 그러다 18일에는 “해각(亥刻=밤 10시 전후)에 달이 뜨기를 기다려 25리를 가서 원효암에 이르렀는데 밤인데다 길까지 험해서 후회하는 마음도 약간 들었다”고 했다.
이런 역사와 사연을 품은 것이 바로 함안의 원효암이고 의상대이다.
김훤주
## 2020년에 펴낸 책 <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도서출판 피플파워)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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