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는 산중호걸?
호랑이는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동물 가운데 하나다. 호랑이가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모습으로 한반도를 표현하기도 하고 호랑이가 호시우행하는 그림은 대한민국 축구국가대표팀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렇게 호랑이는 친근하게 여겨지고 사랑도 듬뿍 받는 바람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2015년 12월 개봉된 <대호>였다. 덩치가 엄청난 이 호랑이는 영물이었다. 인간의 얄팍한 간지(奸智)에 휘둘리지 않고 그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물론 결국에는 인해전술로 몰아붙이는 인간들에게 목숨을 잃고 말았지만, 대호는 마지막 장면조차 감동과 장엄 자체였다.
영화 <대호>에서 호랑이는 지리산에서 살아가다가 지리산에서 죽는 것으로 나왔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호랑이는 깊은 산중에 산다는 일반 상식과 맞아들어가는 설정이었다. 하지만 호랑이는 실제로 깊은 산중이 아니라 습지에서 살았다고 하면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와, 정말?” 하고 놀랍다는 반응을 보인다.
생각해보면 이치는 간단하다. 호랑이도 먹어야 산다. 호랑이 먹이가 산중에 많을까? 습지에 많을까? 습지는 깊은 산속과 달리 넉넉한 물과 풍성한 초지를 두루 갖추고 있다. 멧돼지나 노루·고라니가 대표적인데 고라니는 영어 이름이 ‘water deer’일 정도로 물을 좋아한다. 호랑이가 먹을거리 풍부한 데를 찾는 것은 바늘 가는 데 실 가는 것과 똑같은 이치인 것이다.
게다가 갈대밭·억새밭 같은 습지는 시야까지 트여 있어 사냥하기에도 좋다.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조선왕조실록> 같은 옛 문헌에 대한 생태학적 연구·분석을 진행했고 그 결과는 이를 사실로 입증하고 있다.
사람은 산중토굴?
사람도 마찬가지다. 음식을 먹어야 살고 물을 마셔야 산다. 그래서 사람 또한 습지에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살았다. 노력을 많이 들이지 않고 조금만 움직여도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는 이른바 가성비가 좋은 삶터였다.
물론 물가 습지에도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 있다. 낙동강이나 한강 같은 큰 강 주변은 큰물이 지면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기에 살 수가 없었다. 2000년 전~1500년 전 낙동강변에 조성된 가야의 옛 터전들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경북 고령 지산동고분군은 제1지류 회천과 제2지류 안림천·내곡천이, 경남 합천 옥전고분군은 제1지류 황강과 제2지류 성산천이, 함안 말이산고분군은 제2지류 함안천과 제3지류 신음천이, 창녕 교동과송현동고분군은 제1지류 창녕천과 제2지류 남창천이 만나는 어귀에 있다.
바닷가의 경우도 장애물 없이 트여 있으면 파도가 거세서 살기 어려웠다. 해상교역으로 일대 세력을 이루었던 경남 김해 대성동고분군과 고성 송학동고분군은 옛 김해만과 옛 고성만의 안쪽 깊숙한 데에 자리 잡고 있다.
이렇듯 사람들은 습지의 일부에 빌붙었을 뿐인데도 그보다 나은 삶터는 없었다. 제1지류와 제2지류가 만나면 강물의 흐름이 느려지기 때문이다. 강물과 함께 떠내려온 자갈·모레·흙들이 쌓여 기름진 땅이 되어주었다. 거세찬 흐름도 잔잔해지면서 먼 거리까지 배를 타고 나갈 수 있도록 안전한 물길도 보장해 주었다.
8000년 전 비봉리
비봉리 패총은 낙동강의 제1지류인 청도천이 비봉마을에서 흘러내리는 이름 없는 제2지류와 합류하는 자리에 있다. 북쪽에는 월봉산이 자락을 펼치고 마주 보는 남쪽에는 비룡산이 솟아 있다. 동쪽으로 청도천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면서 마을서 나오는 개울물을 받아들인다.
2007년 사적으로 지정된 비봉리 패총은 지금으로 치면 쓰레기장이었다. 먹고 남은 뼈나 껍데기를 쓸모가 없어진 생활용품과 함께 내다버렸던 것이다. 8000년 전부터 4000년 전까지 인간들이 정착해서 생활했던 증거물이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7700년 전 통나무 속을 파내어 만든 소나무 쪽배가 나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똥 화석과 신석기인들의 예술 감각을 보여주는 멧돼지가 그려진 토기 조각도 나왔다. 찌르개와 그물추, 돌도끼와 갈돌, 노(삿대), 망태기와 낚싯바늘도 나타났다.
먹이로 삼았던 재첩·굴·꼬막 껍데기와 상어·가오리·잉어(물고기), 사슴·멧돼지·개·늑대·호랑이·소·물소·고라니·쥐(네발짐슴), 꿩·오리(새) 등의 뼈와 도토리·가래·솔방울·조 같은 식물이 나왔다. 등고선을 따라 이어지는 구덩이도 90개가량 확인되었다. 당시는 바닷물이 드는 자리였는데 짠물에 도토리를 담가 떫은맛을 내는 타닌 성분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신석기시대 비봉리 사람들은 이렇게 살았다. 청도천 쪽에서 잉어를 거두고 민물과 짠물이 섞이는 데서 재첩과 꼬막을 잡았으며 갯벌에서는 조개를 캤다. 때로는 쪽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상어나 가오리도 잡았다. 비룡산·월봉산에서는 도토리·솔방울·가래를 따고 사슴·멧돼지를 사냥했으며 산과 산 사이 들판에서는 조 같은 곡물 씨앗을 얻었다.
움막은 지금도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따뜻한 남향 산기슭에 마련했으리라. 움막·망태기는 갯벌에 자라는 갈대·물억새 따위로 만들 수 있었다. 비봉리 유적은 인간의 삶이 습지에서 비롯되었음을 제대로 일러주고 있다.(비봉리패총전시관 : 경남 창녕군 부곡면 비봉길 7)
2000년 전 다호리
비봉리 사람들이 쪽배를 타고 다녔을 바다(지금 낙동강) 맞은편(직선거리 11km) 창원 주남저수지 옆에는 다호리 고분군이 있다. 초기 철기 시대 유적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풍부한 유물을 품은 곳으로 유명하다. 주남저수지 일대는 오랜 옛날부터 사람살이의 터전이었고 다호리고분군은 옛날 삶터의 뚜렷한 물증인 것이다.
언덕배기에 앉은 다호마을이 배후습지(동판저수지)를 향해 흘러내리는 비탈의 우묵한 풀숲에 해당된다. 2000년 전~2100년 전 무덤들로 화폐 구실을 했던 덩이쇠가 무더기로 출토된 최초 유적이다. 가야권역에서 가장 먼저 번영을 이루었다는 물증이다. 국제교역을 일러주는 중국제 청동거울과 중국 동전 오수전도 출토되었다.
활·화살촉·청동칼·쇠칼 등 무기와 쇠낫·괭이와 같은 농기구는 다호리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주고 고유한 붓질 자국이 남아 있는 옻칠제품은 토종 옻칠 예술의 시작을 알려주었다. 붓과 긁개도 나와 눈길을 끌었는데 다호리 사람들은 평평하게 깎은 나무에 붓으로 글자를 적고 틀린 글자는 긁개로 긁어내 지웠다. 우리나라 문자 생활의 최초 증거물이다.(다호리고분군 : 경남 창원시 의창구 동읍 다호리 68-1)
고분군 둘레에는 다른 유적도 많다. 산남저수지 한쪽 구석의 합산패총(동읍 산남리 315-1), 주남저수지 수문 주천강 시작 지점에서 700m가량 아래 주남돌다리(동읍 월잠리 73-9), 숲 그늘이 대단한 천연기념물 신방리 음나무군(동읍 신방리 652), 커다란 바위들과 둘레를 감싼 당산나무가 울창한 모암 당산숲(동읍 신방리 451) 등이다. 다호리고분군 이후 7세기까지 뚜렷한 흔적을 남기며 여기에 터 잡고 살아온 이들이 남긴 문화·생태유적들이다.
사상 최초 저수지 밀양 수산제
물은 밭농사에도 있어야 하지만 논농사에는 더욱더 필요하다. 인공으로 만든 저수지가 필요했던 까닭이다. 그 첫머리에 밀양 수산제가 놓인다. 다호리고분군에서 다시 낙동강을 건너 직선거리로 8km 지점이다. 벽골제(전북 김제)·의림지(충북 제천)와 더불어 2000년 전에 만든 3대 저수지다(수산제 역사공원 :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 927).
1530년에 편찬된 조선시대 지리책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나온다. “‘고려 김방경 장군이 농지에 물을 댈 수 있도록 제방을 쌓아 일본 정벌(1차 1274년, 2차 1281년)에 나서는 고려·몽골연합군의 군량을 갖추었다’고 세상에 전한다. 가운데에 죽도(竹島)가 있는데 세모마름·연·마름·귀리가 멀리까지 가득하다. 세조 때인 1467년 물길을 트고 수문을 설치하여 국둔전으로 하였다가 뒤에 봉선사에 내려주었다.”
백성들한테 개간해서 농사짓게 한 다음 소출의 일부를 바치도록 했던 국둔전은 국농소라고도 했다. 원형은 배후습지였다. 주변 산지뿐 아니라 낙동강변 자연제방보다 지대가 낮다. 바닥에서도 물이 솟고 비가 내리면 산기슭에서 물이 쏟아지고 낙동강에서도 본류가 역류한다. 한두 해만 관리하지 않아도 토사가 쌓이고 물길이 막혀 금세 황폐해진다.
임진왜란 이후 국농소는 휴한지가 되었고 수산제는 황무지가 되었다. 130년 전 함안군수 오횡묵이 쓴 <함안총쇄록> 1889년 7월 1일 자에 기록이 있다. “10리 긴 보를 온전히 쌓았고 둑 안에는 농사를 짓는데 거의 300섬지기가 된다. 바라보면 트여 있고 아직 개간하지 않은 땅이 개간한 땅보다 몇 배나 넓다. ……지세가 푹 꺼진 곳은 큰물을 만나면 안에서 물이 넘치고 밖에서는 강물이 불어 수문이 망가지고 당장 물바다가 된다.”
개간하지 않은 땅이 많고 소출이 300섬이라 했다. 300섬 소출은 임진왜란 이전의 5~10% 수준이다. “1487년은 소출이 7500여 석이었고 1488년은 4400여 석이었습니다. 올해는 지나친 가을비로 거의 물에 잠겼으므로 반드시 지난해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성종실록> 1489년 9월 21일자 경상도 관찰사 김여석의 보고)
역사·문화유적은 사천만에도
옛날 사람들에게 바닷가 갯벌은 내륙 습지보다 더 훌륭한 삶터였다. 오랜 세월 사람이 살면서 남긴 자취는 사천만 일대 갯벌에도 많다. 지금도 여기는 지역 사람들에게 사철 마르지 않는 고방이고 자식들 공부시키는 돈줄이며 다함께 어우러지는 놀이터이다.
1760년 설치된 조창 가산창(경남 사천시 축동면 가산리 997-2)은 사천만 깊숙한 안쪽에서 가화천이 바다를 만나는 어귀에 있었다. 지금도 주춧돌이랑 축대 같은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조선 시대 경남에는 가산창 말고 창원 마산창과 밀양 삼랑창 두 군데가 더 있었지만 가산창만 터가 제대로 남았다. 이는 전국적으로도 드문 사례다.
육로와 수로가 두루 좋아 물품을 모으기 안성맞춤이었고 남·서해를 거쳐 한강으로 오가는 바닷길도 바로 이어졌다. 조창에는 재물이 모여들기에 사람 또한 끓게 마련이다. 가산창은 가산오광대(무형문화재 가산오광대보존회 : 사천시 축동면 조창길 187-28)라는 놀이를 낳았고 마을 앞에는 석장승(가산리 626-1)을 세웠다.
가산창은 1895년 없어졌지만 석장승은 남았다. 지금도 장승 앞에 촛불을 켜놓고 북어를 진설하고 막걸리를 뿌리며 제사를 올리고 기도를 드린다. 모두 네 쌍인 가산리 석장승은 마을 들머리 언덕배기와 당산나무 아래에 있다. 언젠가 한 쌍을 도둑맞은 적이 있는데 1980년 새로 만들었다. 믿음이 끊어졌다면 굳이 새로 세울 까닭이 없다.
사천만 갯벌에는 이밖에 사천매향비(곤양면 흥사리 산 48-2), 일제강점기 비행기 격납고(정동면 예수리 60-6과 180-2), 퇴계 이황의 작도정사(서포면 외구리 105-1) 등도 저마다 사연을 품은 채 남아 있다.
이렇듯 습지에 남아 있는 문화유산은 우리가 조금이라도 알아보고 찾아가면 어둠 속에 숨어 있다가 느닷없이 빛을 만난 값진 보석들처럼 저마다 색다른 숨결과 살결을 뽐내며 반짝이고 있다.
※ <작은 것이 아름답다> 2022년 가을호에 실었던 글을 조금 고쳤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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