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산 기장 죽성리 두호마을 바닷가 황학대에 새겨져 있는 글자들이다. 붉게 주칠(朱漆)이 되어 있어서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돌아다니면서 이런 각자를 통해 지역 역사를 짐작해보고 살피기를 즐기는 처지에서는 그런 까닭에 이런 주칠이 무척 반갑다.
옛날 처음 새길 적에는 주칠이 되어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지워져 지금은 바위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지금 우리가 보는 비석과 바위벽 각자가 거의 모두 그렇다.
그래서 원래부터 글자에 아무 색칠이 되어 있지 않은 줄 알았다. 찾아봤더니 그렇지 않았다. 옛날에는 반드시 주칠을 했다. 옛사람들이 길가 바위벽에 글자를 새기고 빗돌을 세운 까닭은 오가는 사람들더러 보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요즈음 플래카드와 같은 역할이었다.
옛날 비석이나 바위 각자에 원래대로 주칠을 해도 무리이거나 잘못일 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좀더 그 존재를 쉽게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아가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좀더 쉽게 해독할 수 있는 기회로도 작용할 것이다.
문화재 당국은 고을마다 남아 있는 선정비들만이라도 주칠을 좀 해 주면 좋겠다. 그게 비석이나 바위벽 각자의 원래 취지와 맞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태까지 내가 본 ‘현역’ 주칠은 여기 황학대 말고는 함양 상림 들머리 척화비가 유일하다.
2.
지금 말고 나중에라도 한 번 알아보기 위해 여기 어떤 글자가 새겨져 있는지 한 번 살펴보았다. 한가운데에는 크게 進士(진사)方致周(방치주)라 적혀 있고 왼쪽에 隆熙元年丁未秋(융희원년정미추) 글자가 작게 적혀 있다.
융희 원년 정미는 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이 황제에 즉위한 1907년을 가리킨다. 뒤이어 나오는 가을(秋)은 음력 7월~9월에 해당된다. 순종 즉위식이 음력 7월 19일에 치러졌으므로 이 글자를 새긴 날짜는 그 이후일 것이다.
양쪽 모두에도 작은 글씨가 세로로 새겨져 있다. 오른쪽은 주인공 방치주의 친인척이고 왼쪽은 그에게서 공부를 해운 학생들인 것 같다.
먼저 오른쪽은 이렇다.
金在瓚(김재찬)
婿(서)韓鎭杓(한진표)
禮震(예진)
成震(성진)
侄(질)有震(유진)
從弟(종제)錫周(석주)
侄(질) 慶震(경진)
孫(손) 學壽(학수)
서(婿)·질(侄)·손(孫)은 각각 사위·조카·손자이고 종제(從弟)는 사촌동생이다. 그래서 사위 2명 아들 2명 조카 2명, 사촌동생 1명과 손자 1명 등 8명이다.
다음 왼쪽은 이렇다.
學徒(학도 : 학생)
朴道旭(박도욱) 發文(발문)文渭祥(문위상)
金景玟(김경민) 金鎔采(김용채)
朴聖浩(박성호) 洪鍾翰(홍종한)
林達源(임달원) 化主(화주)李在煥(이재환)
金有銅(김유동) 權在鶴(권재학)
金邦右(김방우)
모두 11명인데 위에 있는 6명은 학생으로 보인다.
나머지 아래에 있는 5명은 각각 3명과 2명씩 발문과 화주인 것 같다. 발문(發文)은 모임 소식을 알리는 사람이고 화주(化主)는 모임에 드는 돈이나 재물을 대는 사람이라 한다.
나중에 여기 다시 살펴보면서 사연 한 줄기 건져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면 좋지만 그러지 않아도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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