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할부지 계시는 데는 한장딴일까 두장딴일까

김훤주 2023. 2. 18.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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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집에서 읍내 장터까지는 길이 제법 멀었다. 아부지는 8키로라 하셨고 할부지는 20리라 하셨다. 걸어서 두 시간이 걸렸는데 읍내 중학교 다니는 형들은 새벽밥 얻어먹고 6시 반에는 집을 나서야 했었다.

 

할부지는 꼭두새벽에 일어나셨다. 어둑어둑한 으스름에 사랑방에서 나는 에헴!” 소리는 집안을 깨우는 신호였다. 식구들이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부산함을 어린 꼬맹이였던 나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할부지 옆자리 이불 밑에서 꼼지락거리며 게으름을 부렸고 할부지는 사랑채 아궁이에서 소죽을 끓이셨다. 콩깍지랑 볏짚이 삶아지고 구수한 냄새가 퍼지면 할부지는 소마구의 구시를 김이 펄펄 나는 소죽으로 가득 채우셨다.

 

아침 세수는 소죽 끓인 솥에서 따끈하게 데워진 물로 하셨다. 아침밥 먹는 자리는 안채 대청마루였다. 할부지는 가장 안쪽에서 막내손자였던 내가 끼인 겸상을 받으셨다. 그리고 한가운데는 집안 남자들 밥상이, 끄트머리 걸터앉는 자리에는 여자들 밥상이 차려졌다.

함안 가야장날 풍경 .  함안 가야장은  5일과  10일(31일로 끝나는 달은 31일)에 선다.

할부지는 소금을 손가락에 묻혀 이를 닦으셨다. 그러고는 내게 주야, 가자.”라고 말씀하실 때가 있었다. 그런 날은 읍내에 장이 서는 장날이었다. 어떤 때는 쌀을 한 말 가웃 짊어지기도 하셨지만 보통은 제법 큼지막한 장바구니를 들고 나서셨다. 안에는 달걀 몇 꾸러미 또는 닭이나 강아지가 들어 있고 옆에는 낫이나 괭이도 끼어져 있기 십상이었다.

 

장터 가는 길은 시골에서 늘 보는 범상한 풍경이었다. 이어지는 시내와 들판과 야산과 마을은 푸근한 정감이 스며들어 있었다. 할부지는 닭전·싸전에서 닭·강아지 또는 쌀을 돈으로 바꾸셨고 그 돈으로 집안 기물을 장만하는 장을 보셨다. 물론 어린 나는 할부지가 무엇을 사시는지 어떻게 흥정을 하시는지 따위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흰 광목을 둘러친 국밥 가게는 무럭무럭 김이 나는 소고기국밥이 맛있었고 할부지 소줏잔 기울이실 때는 옆에 앉아 먹는 해삼 한 토막이 신기했다. 처음 기억에는 해삼을 탱자나무 가시로 찍어 먹었는데 나중 기억에는 옷핀으로 찍어 먹었다.

 

어린 산골 촌놈에게는 이밖에도 신기한 것이 더 있었다. “강칼치 사이소, 강칼치바다에 칼치가 나는 줄 알았는데 강에서 나는 칼치도 있었다. 그런데 생김새는 소금을 뒤집어쓴 품새가 바다 칼치와 다르지 않았다. 나중에 산오징어도 등장했는데 오징어가 산에도 산다니 놀라웠다. 나는 무식이 탄로 날까 봐 할부지한테 묻지 않았다.

 

할부지의 장날 순례 마지막 코스는 대장간이었던 것 같다. ‘쉿쉿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불길은 무시무시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쇳덩이가 거듭되는 망치질에 모양이 바뀌다가 물속에 들어가 거품을 일으키며 식어가는 과정은 어딘지 모르게 엄숙한 느낌이 들었다.

 

할부지는 연장을 고치거나 새로 사러 들르셨다. 이래저래 흥정 끝에 할부지는 언제쯤 되겠는가?” 물으셨고 대장장이는 대체로 한장딴이모 안 되겠습니꺼.” 대답했다. 그러면 할부지는 알겠네. 다음 장날에 보세.” 하시면서 두루막 자락을 털고 일어나셨다. 나는 따라 일어나면서 이번 장날에서 다음 장날까지가 한장딴이구나.’ 짐작하면서 스스로를 기특하게 여겼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장날이 세상의 중심이었다. 흐르는 시간도 장날을 기준으로 삼아 구분하고 가늠할 정도였으니까. 읍내 장터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읍내 장터에 없으면 세상에 없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읍내 바깥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읍내에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읍내에는 갖은 공장들이 있었다. 술도가는 물론이고 오뎅공장 참기름공장 아이스케키공장 과자공장 등이 크게 있었다. 하천변에는 제법 규모가 되는 제재소가 있었으며 가구공장도 눈에 띄었다. 옷감을 짜는 편물점, 닭을 잡고 튀기는 닭집, 라디오 따위를 팔거나 고쳐주는 소리사·전파사, 옷을 맞추는 의상실·양복점 등등이 줄줄이 있었다.

 

이러던 것이 1970년대 중반, 내가 국민학교 5학년 6학년 즈음이 되면서 조금씩 사라져갔다. 읍내 단위로 자급자족하던 시스템이 무너지고 무슨무슨 대리점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읍내 바깥에서 생산된 것들이 시장 곳곳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모든 장터마다 물건이 비슷해지게 되었고 장날은 그만큼 활기를 잃어갔다.

 

이제 장날에 가서 주문하고 장날에 가서 찾을 필요가 없어졌다. 이번 장날에 만나 약속하고 다음 장날에 확인할 필요도 없어졌다. 천천히 흐르던 시간이 그만큼 빨리 흐르게 되었다. 시골 집에서 읍내 장터까지 어릴 적 두 시간 걸리던 거리가 이제는 10분밖에 걸리지 않게 되었다. 할부지 뒤를 따라 걸어가던 자갈길은 아스팔트길로 바뀐 지 이미 오래다.

 

할부지는 1985년에 여든 연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지금 예순 나이로 시골 장터를 이곳저곳 취미 삼아 돌아다니며 기웃거린다. 할부지가 거니셨던 장날과 내가 노니는 장날 사이는 한장딴일까, 두장딴일까. 할부지가 계시는 저 세상까지는 한장딴이 걸릴까, 두장딴이 걸릴까. 세월은 이렇게 흘러가는가 보다.

 

김훤주

※ 전라도 사람 자연 문화를 담는 월간지 <전라도닷컴> 2022년 7월호에 실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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