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근대농업유산의 첫머리 주천갑문

김훤주 2022. 12. 28.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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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천강변 산기슭의 근대농업유산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1192-1 언덕 아래에 가면 잊혀진 근대농업유산이 하나 있다.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와 창원시 대산면 우암리를 잇는 주호교와 우암교가 맞물리는 주천강변 산기슭이다. 하류에서 보면 정면 가운데에 가로로 촌정농장(村井農場)’주천갑문(注川閘門)’이 두 줄로 새겨져 있고 왼쪽에는 메이지 455월 준공(明治 四十五年 五月 竣工)’이 세로로 새겨져 있다. 메이지 45년은 서기 1912년으로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이태 뒤이다.

 

정면은 상류쪽과 하류쪽 모두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표면을 마감했다. 특히 낙동강을 향하는 하류쪽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끈하게 가다듬었다. 물이 흐르는 위쪽 부분은 큰 석재로 이어붙여 무지개 모양을 갖추었다. 한가운데는 앞으로 살짝 튀어나오도록 입체적으로 처리했으며 양쪽 가장자리는 단정하게 나란히 내려서 쌓았다. 그리고 무지개 위쪽으로는 좀더 작은 석재를 4~8겹으로 겹쳐 쌓아 마감했다.

 

터널 안쪽은 이와 달리 마감이 되어 있지 않다. 천연암반을 발파해 뚫으면서 떼어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당시 조성된 우툴두툴하고 거친 표면이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 같으면 안쪽까지 잘 다듬은 석재를 이어 붙였을 수 있겠지만 당시는 그런 것이 감당하기 어려운 사치였던 모양이다.

 

주천갑문의 현재 모습
전면 한가운데에 두 줄로 적혀 있는 '촌정농장' '주천갑문'
전면 왼쪽 어깨에 세로로 적혀 있는 '메이지 45년 5월 준공'

2) 경술국치보다 앞선 진영촌정농장 설립

 

갑문이란 수위 조절을 위하여 강물을 가로질러 설치하는 수문을 이른다. 보통 바다의 항만이나 선박이 드나들 수 있는 커다란 강에 설치하는 것인데 이 갑문은 어떻게 해서 낙동강의 크지 않은 지류인 주천강에 놓여 있는 것일까.

 

메이지 455월 준공이라는 글자가 알려주듯이 주천갑문은 일제의 조선 침략과 관련되어 있다. 일제의 공식 강점은 경술국치를 당한 1910년부터이지만 실제로는 이전부터 침략이 진행되고 있었다. 1895년 청일전쟁에 이어 1905년 러일전쟁에서 사실상 승리하면서 본격화됐다. 낙동강 하류에도 일본 사람들이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김해 진영 일대에는 무라이 기치베에(村井吉兵衛, 1864~1926)가 가장 먼저 발을 들여놓았다.

 

무라이는 일본에서 담배로 큰돈을 벌어 담배왕이라고도 일컬어졌던 재벌이었다. 190412월 무라이은행을 설립해 금융업에 나서는 동시에 무라이본점도 창설했다. 무라이본점은 무라이재벌의 신사업을 담당했었는데 그 최초 사업이 낙동강 유역의 황무지와 농경지를 사들여 식민지 농장을 경영하는 것이었다.

 

무라이는 1904년 토지를 사들이기 시작해 1905년부터는 그 땅에 개간과 경작을 함께 진행했다. 그해 11월 김해시 진영읍 진영리 주천강변에 사무소를 차리고 1906년까지 이태 동안 2,600정보(町步, 1정보=3,000)를 집중 매입했다.

 

3) 황무지 개간은 엄청난 이권 사업

 

무라이가 사들인 2,600정보는 김해시 진영읍의 서쪽 거의 전부와 창원시 대산면·동읍의 들판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넓은 면적을 한 개인이 소유하는 것은 조선 전체를 통틀어서도 드문 일이어서 상당히 관심을 끌고 주목을 받았다. 1909110일 순행에 나선 순종황제가 마산역에서 내려 창원부를 찾았을 때 촌정농장 사업의 경영 및 장래 계획의 개요문서가 헌상품으로 봉정됐을 정도였다. 국사편찬위원회 1999년에 발행한 통감부문서9권에서 ‘8. 한국 황제 남순 관계 서류, 한국 황제 서남 순행 관계 서류‘(52) 창원부에서의 상황에 적혀 있다.

 

그런데 대부분은 갈대나 잡목이 우거진 황무지였고 농지는 밭 200정보가 전부였다. 진영읍 일대와 창원시 대산면 일대는 농지가 제법 있었지만 동읍의 토지는 거의가 개간이 되지 않은 저습지였다. 그리고 농지조차도 제 때에 물을 대거나 빼기가 어려워 가뭄과 홍수의 피해가 잦은 땅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땅값이 쌌다. 이를테면 157명으로부터 62000 마지기 남짓을 사들이면서 81000냥밖에 지출하지 않았으니 마지기당 평균 1.3냥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라이는 더 싸게 사려고 했고 그래서 조선인들의 반발과 저항은 끊임이 없었다.

 

무라이가 사들인 황무지는 해발 3m 안팎에 이르는 낙동강의 배후습지였다. 낙동강의 잦은 범람 덕분에 토질은 비옥한 편이었다. 당시 황무지의 개간은 가성비가 높은 매력적인 사업이었다. 일본의 근대토목 기술과 조선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경지로 개간하고 기반시설을 갖추면 더 큰 이문을 챙길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당시 상황을 알려주는 것으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통감부 문서가 있다. 통감부 문서1권의 ‘12. 농공상무부 사무 공채 1·2’에서 ‘(8) 한국정부와의 교섭 사항에 나온다. 이 가운데 ‘2. 농무에 관한 한국정부와 교섭 사항의 다섯 번째 항목에 무라이 기치베에가 출원한 경상도 진영 부근의 황무지 개간과 제방 축조 허가가 들어 있다. 토지 매수를 먼저 해 놓고 사후에 관련 허가를 받아 사업을 진행했던 것이다.

 

4) 천연암반 뚫어 갑문을 설치한 사연

 

촌정농장은 1907년에 겉모습을 대체로 갖추고 물을 대거나 빼내는 시설의 설치를 마무리했다. 낙동강의 역류를 막는 갑문을 주천강에 설치한 것도 이때였다. 그때는 앞에 나오는 주천갑문과 달리 천연암반을 뚫어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주천강을 가로질러서 흐르는 강물을 막고 설치한 갑문이었다.

 

이듬해인 1908년부터 1911년까지 4년 동안 해마다 홍수가 거듭됐다. 주천강을 가로질러 만든 갑문은 두 번 부서지고 두 번 물이 샜다. 부서지고 샐 때마다 고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특히 1911년의 홍수는 농장에 가득 잠긴 수위가 8.5m에 이를 정도로 엄청났다.

 

1913년 조선신문사에서 발행한 <선남발전사>에 실린 '낙동강변의 촌정농장 갑문'. 1912년 5월 준공 직전의 모습.&nbsp;&copy;서울역사박물관

1911년 홍수가 지나가고 가을이 되면서 대대적인 공사에 다시 착수했다. 무너진 제방도 다시 쌓았지만 백미는 갑문이었다. 강물 위에 양쪽 강변을 이어붙이는 방식은 포기했다. 낙동강의 역류에 못 이겨 얼마 가지 않아 부서지고 물이 샐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아예 물길을 바꾸기로 하고 옆에 있는 산자락의 천연암반을 뚫어 터널을 만들었다. 규모는 너비 24(, 1=30cm) 높이 19척에 길이가 115척이었다.

 

밀려드는 수압을 충분히 견딜 수 있도록 문짝도 튼튼하게 달았다. 두꺼운 철판을 두 장으로 만든 9000kg에 이르는 육중한 쇠문이었다. 사람의 힘으로 열고 닫기에는 지나치게 컸으므로 자동개폐시설도 마련했다. 양쪽에 커다란 쇠공을 매달아 두어서 수위가 올라가면 자동으로 닫히고 반대로 내려가면 자동으로 열리도록 했다. 주천갑문의 완공은 정면에 새겨져 있는대로 19125월이었지만 전체 공사는 1913년에 마무리되었다.

 

5) 홍수 피해 막는 핵심시설 주천갑문

 

이렇게 만들어진 주천갑문은 촌정농장을 이루는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 2,600정보에 이르는 넓은 들판을 낙동강의 역류와 홍수로부터 보호하는 가장 앞서는 첨병이었다. 황무지를 아무리 잘 개간하고 제방을 튼튼하게 쌓아도 홍수 때 낙동강 강물이 넘어들면 끝장이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려고 무너지거나 샐 염려가 없는 천연암반을 굴착해 터널을 내고 갑문을 설치했던 것이다.

 

부산일보 1914년 12월 13일자에 보도된&nbsp; '(내부에서 본) 촌정농장의 갑문'

주천갑문은 촌정농장을 둘러싸는 두 제방의 기점이기도 하다. 1907년 개간하면서 안팎으로 제방을 쌓았다. 먼저 내제방은 촌정농장의 서남쪽 산자락을 따라 물받이용으로 산 옆에 쌓았는데 길이가 대략 5(20km)였다. 주천갑문 바로 옆 진영읍 본산리 주호마을에서 옛 진영역 앞을 지나 창원시 동읍의 동판·주남·산남저수지까지 이어진다.

 

외제방은 촌정농장의 북동쪽에서 북서쪽으로 반원형으로 쌓았는데 2(7.8km)였다. 주천갑문 맞은편 창원시 대산면 우암리에서 대산면 소재지인 가술리를 지나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이 있는 동읍 산남리까지 이어지는데 지금도 촌정제방이라고 부른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외제방 바깥의 황무지도 개간(주체는 대산수리조합)되면서 제방의 기능을 잃었고 지금은 도로로 활용되고 있다.

 

6) 바로 이듬해부터 엄청난 소출

 

촌정농장의 200정보밖에 없던 밭은 1913년에 700정보가 되었고 1반보(反步, 1반보=300)도 없던 논은 800정보가 되었다. 1915년에는 밭이 600정보로 줄고 논이 1,000정보로 늘었으며 1926년에는 1814정보까지 되었다. 지금은 논을 오히려 밭으로 바꾸기도 하지만 그때는 쌀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논이 으뜸이었다.

 

부산일보 1927년 10월 24일자 1면에 보도된 '촌정농장의 예상 수확'

1914년에 올린 촌정농장의 소출은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현미 6063, 나락 17369, 2652, 보리 2127, 492석으로 짐작도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무라이는 40%에 해당하는 현미 2425, 나락 6948, 1061, 보리 851, 198석을 소작료로 챙겼다.

 

덕분에 191510월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총독부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에서 촌정농장은 명예금패를 받았고 무라이는 훈3(勲三等) 서보장(瑞宝章)을 받았다. 모두 황무지를 개척해 공공의 이익을 증진했다고 주어진 것이었다. 명예금패는 일반 금패보다 높은 최고 표창이었고 훈3등 서보장은 여덟 등급 가운데 세 번째로 높은 훈장이었다. 무라이는 평민에서 귀족으로 신분도 올라갔다.

 

조선에서 으뜸가는 모범농장으로 꼽히면서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래서 촌정농장 설명서를 따로 발행했을 정도였다. 대표적으로는 192349일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방문이 꼽힌다. 사이토는 아내와 함께 삼랑진역과 진영역을 거쳐 기차를 타고 촌정농장을 찾아와서 농장장 일야서장휘(日野西長輝)로부터 상황 설명과 보고를 받았다.

 

부산일보 1914년 12월 11일자 1면에 보도된 '촌정농장의 나락 타작(쳐서 떨어뜨리기)'

7) 어째서 진영 촌정농장일까

 

촌정농장은 철도 시설도 보유하고 있었다. 1908년 진영역과 촌정농장 사무소를 잇는 1(4km 정도)리에 철도를 깐 것이 시작이었다. 1925년까지는 농장 동남쪽 진영읍 본산리의 주호급수장과 북서쪽 창원시 동읍의 산남양수장까지 설치해 전체 길이가 10km 정도였다.

 

진영역 앞에는 촌정농장의 창고가 두 채 있었다. 1창고는 5,000가마니를 쌓아둘 수 있는 규모였는데 수확한 곡물을 그대로 저장했다. 2창고는 불순물을 골라낸 판매용 곡물을 보관했다. 두 창고 사이에는 너른 공터가 있었는데 여기서 사람들은 멍석을 깔고 작업했다. 농장에서 생산된 여러 농산물들은 이 철도를 타고 부산에 가서 일본 각지로 팔려나갔다.

 

촌정농장은 알려진대로 김해시 진영읍뿐만 아니라 창원시 대산면과 동읍에까지 걸쳐져 있다. 면적으로 보면 김해시 진영읍이 가장 적고 다음이 창원시 대산면이고 동읍이 가장 넓다. 게다가 촌정농장 사무소는 1925년 촌정농장 지도를 보면 풍년교의 북서쪽, 그러니까 창원시 대산면 제동리에 있다.

 

그런데도 촌정농장이라 하면 그 앞에 진영을 붙여 진영촌정농장이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까닭은 무엇일까? 생산된 곡물을 모아두는 엄청난 규모의 창고와 곡물을 반출하고 농기계와 농장 설비를 들여오는 기차역이 모두 진영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중요 시설인 사무소와 급수장·양수장까지 깔려 있는 철도는 농장의 모든 활동과 작업이 진영역과 연결되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8) 갑문 위에 신사까지 설치

 

그리고 주천갑문 또한 김해시 진영읍의 본산리에 세워져 있다. 촌정농장은 무라이 기치베에에서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 다시 김영준으로 주인이 바뀌면서 해방을 맞게 되는데 주천갑문은 철문과 쇠공은 사라졌지만 옛 모습 그대로 지금껏 남아 있다.

 

부서지고 무너지면서 악전고투 끝에 만든 것이 주천갑문이었다. 김해시 진영읍과 창원시 대산면·동읍 일대에는 주천갑문 말고도 일제강점기 건축물이 제법 있지만 주천갑문보다 상징성이나 중요도가 더한 것은 없지 싶다. 주천갑문은 대산평야의 성립과 시작을 알리는 가장 대표적인 근대농업유산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공력을 많이 들여 만든 때문인지 촌정농장은 여기 주천갑문이 있는 위쪽 언덕에다 7년 뒤에 신사(神社)를 세우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관보 제21151919828일자 311쪽에 농장장 일야서장휘 등 81명이 신사 설립을 허가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모신 대상은 이나리(稻荷)였는데 일본에서 쌀을 비롯한 곡식의 신으로 여겨지는 존재이다.

 

신사가 들어서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곳은 땅바닥이 평평하게 되어 있었다. 그 아래 주천강쪽 비탈에는 갑문을 만들면서 굴착해 떼어냈던 바위들이 층층이 쌓여 있다. 원래는 낮았는데 이렇게 바위를 쌓고 지반을 돋우었던 모양이다. 보통 신사는 일대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서 전면을 내려다보도록 세우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 지형이 대체로 그렇다.

 

9) 조선 사람 피땀 어린, 지독한 침탈의 증거

 

김해 진영읍과 창원 대산면·동읍에 걸친 대산평야는 이처럼 일제강점 직전인 1905년부터 1920년대 후반까지 대략 25년을 거치면서 지금과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촌정농장은 황무지를 일구어 논밭을 만들고 개척하는 가장 강력한 주체 가운데 하나였다.

 

1913년 발행된 <선남발전사>에 실린 '낙동강변의 촌정농장'. 가운데 말탄 마름의 오른쪽 위로 비스듬하게 채찍이 보인다. &copy;서울역사박물관

하지만 겉모습만 보면 절반의 진실밖에 되지 않는다. 무라이의 개간 계획은 일본의 근대 토목기술과 조선인 노동력의 결합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조선 농민과 노동자들의 피땀어린 노력이 없었다면 대산평야도 주천갑문도 촌정제방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는 얘기다.

 

일제강점기 지어진 근대농업유산은 지금도 대부분 제 역할을 하고 있을 정도로 튼튼하게 지어졌다. 주천갑문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쓰임을 다했지만 지금도 그대로 튼튼하게 남아 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일본을 칭찬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고마워하는 듯한 태도까지 보인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역사를 공부하는 이들은 대부분 일제가 조선에 대한 영구적인 지배를 획책한 결과였다고 말한다. 촌정농장은 더 나아가 일본인의 이주까지 추진해서 많을 때는 100가구를 넘었다. 일본 본토의 백성()을 조선에 심는() 식민 지배였고 이는 단순한 수탈을 넘어서는 지독한 침탈이었다. 일제가 언젠가는 패망하고 한국이 해방될 것을 예상하면서 한국인더러 나중에 오래오래 써먹으라고 지은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10) 무라이 손자 부부의 사과와 반성

 

일제강점기 황무지 개간과 촌정농장 경영의 성격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무라이 기치베에의 손자 무라이 요시노리(村井吉敬, 1943~2013)20105월 할아버지가 소유했던 촌정농장의 옛터를 찾아왔던 것이다.

 

요시노리는 주민들에게 일본말로 “100년 만에 왔습니다. 여러분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라고 말한 다음 한국말로 미안해요라고 덧붙였다. 할아버지의 지배와 수탈에 대한 손자의 진심 어린 사과였다. 요시노리는 와세다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일제강점기와 그에 뒤이은 시기에 벌어진, 아시아 전역에 대한 일본의 침략과 착취를 연구하고 고발하는 작업을 죽을 때까지 벌인 학자였다.

 

손자며느리도 나섰다. 요시노리의 아내이면서 평화학자인 우츠미 아이코(內海愛子, 1941~ )는 남편의 학문적 동지였으며 요시노리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한국과 동아시아 여러 나라를 오가며 평화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아이코는 201910월 봉하마을에서 열린 누구를 위한 식민지 개발인가라는 학술회의에서 시할아버지가 농장을 건설한 과정을 밝히면서 그 본질까지 정확하게 짚었다.

 

무라이본점과 촌정농장 사이에 오간 편지 가운데 조선()을 위하여라는 말은 단 한 줄도 없다. 무라이는 사업가였고 촌정농장도 경영의 하나로 생각해서 철저하게 개인의 이익을 위해 운영했다.” 어설픈 식민지 근대화론이 존립할 자리를 잃도록 만드는 촌철살인 발언이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일본이 식민지로 삼은 덕분에 근대화됐다고 여기는 한국사람이 적지 않으니 참 딱한 심정이다.

 

<김해시사>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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