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바이러스가 하나 있다. 아는 이들은 김장하 바이러스라고들 한다. 발원지는 서울에서 1000리 떨어진 한반도 동남쪽 경상남도의 중소도시 진주라는 곳이다. 이 바이러스의 첫 번째 특징은 자기가 가진 바를 한사코 나누고 베푼다는 것이다. 증상이 가장 먼저 발현한 김장하 선생의 삶을 보면 그것은 이렇다.
태어날 때는 그럭저럭 먹고사는 집안이었으나 1950년대 6.25전쟁을 비롯한 시대의 격랑에 가세가 기울면서 친구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남의 한약방에서 점원 노릇을 해야 했다. 힘든 조건에도 틈틈이 주경야독한 실력으로 10대 후반 한약종상 시험에 합격하고 이를 바탕으로 20대부터 한약사로 성공해 대단한 부를 일구었다. 이렇게 힘든 시절을 겪었으면 그 성과를 자기 앞으로 쌓는 것이 당연해 보이는데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 한사코 가진 바를 나누고 베풀기
20대 젊은 시절부터 지역의 학생들에게 남몰래 장학금을 주었다. 장학금 주는 기준은 성적이 얼마나 좋으냐가 아니라 집안이 얼마나 가난하냐였다. 등록금·수업료 같은 학비는 물론 필요하면 책값이나 생활비도 대주었으며 고등학교 3년 또는 대학교 4년으로 끝나지 않고 대학원까지 연장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간섭이나 개입은 일절 없었으며 심지어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조차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런 장학생이 최소한 1000명을 웃돈다고 한다.
1984년 100억 원 넘게 들여 세운 명신고등학교도 자리를 잡자마자 1991년 7년 만에 바로 국가에 헌납했다. 본인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도 교사와 학생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돈을 썼다. 선생님 월급은 후하게 쳐서 줬고 학생들 등록금은 공립보다 오히려 적었다. 학교 시설 또한 샤워장이 마련돼 있을 정도로 남달랐는데 백미는 도서관이었다. 고등학교라면 대개 본관이나 별관에 딸려 있지만 이 학교 도서관은 별도로 독립된 건물이었다.
이밖에 본인이 초대 이사장을 맡았던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최대 주주로 참여했던 시민언론 진주신문 등에도 아낌없이 지원했다. 진주신문은 제대로 올곧게 기사를 써서 지역 토호들이 겁이라도 내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밀었다. 형평운동은 100년 전 진주에서 형평사 결성으로 시작된 백정해방운동을 오늘에 되살려 평등을 실현하고 차별을 없애자는 뜻으로 이끌었다.
선생이 보기에 오늘날 백정은 존재하지 않지만 여전히 여러 모습의 다른 차별들이 엄존하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 가진 이와 못 가진 이, 몸이 자유로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등…. 선생은 그중에 엄동설한 추운 겨울에 집에서 쫓겨나 자식 데리고 갈 곳조차 마땅찮은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의 처지에 주목했다. 오갈 데 없는 이들이 먹고 자고 하면서 심신을 추스르고 기술 습득 등 자활 능력을 키우는 보호시설을 만드는 데 큰 힘을 보탠 것이다.
필생의 사업이었던 한약방을 그만두고 지원의 통로 가운데 하나였던 남성문화재단을 접을 때도 30억 원이 넘는 자산을 당신 앞으로 하지 않고 국립경상대에 기부했다. 김장하의 나눔과 베풂은 이처럼 사회·문화·역사·문학·예술·여성·노동·인권 등, 정치를 제외하면 모든 영역에 걸쳐 있었다. 지난 60년 동안 나눔과 베풂이 선생에게는 그냥 일상이었다.
□ 한사코 베푼 바를 가리고 숨기기
그런데 이 바이러스는 자기가 나누고 베푼 바를 한사코 드러내지 않고 숨긴다는 더 큰 특징을 갖고 있다. 그토록 수많은 학생에게 최대 10년까지 장학금을 주면서도 수여식·전달식을 하거나 사진을 같이 찍거나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장학생들이 무슨 모임을 만들라치면 행여 조금이라도 알려질까봐 못하도록 막았다. 명단조차 남들이 알세라 꽁꽁 숨겼고 신문·방송의 어떠한 취재도 거절했다.
명신고등학교 시절에는 처음에는 멋모르고 이사장실을 두었지만 나중에 별로 쓸모도 없고 티만 내는 공간인 줄을 알게 되자 곧바로 한 달 만에 본인 책상을 들어내고 양호실로 바꾸었다. 진주신문을 후원하고 형평운동을 하거나 가정폭력추방운동을 할 때도 필요하면 앞에 나서기도 했으나 그렇지 않으면 행사든 회의든 늘 구석진 귀퉁이나 가장자리를 골라 다녔고 한가운데 자리는 기어이 사양했다.
이를테면 1923년 형평사를 만들었던 진주의 선각자 강상호 선생의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선생이 1999년 세운 것이지만 본인의 이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모진 풍진의 세월이 계속될수록 더욱 그리워지는 선생님이십니다. 작은 시민이.” 그냥 ‘시민’도 아니고 ‘작은’ 시민이라고 스스로를 그렇게 여겼다.
□ 바이러스 전파에 나선 나비 두 마리
이처럼 본인이 가진 바를 한사코 나누고 베풀면서도 본인 이름이 드러나는 것은 극도로 꺼리는 것이 김장하 바이러스에 고유한 두 가지 특징적인 현상이다. 이렇게 하면 공동체를 아름답게 하는 선순환, 선한 영향력의 나비 효과는 저절로 발생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바이러스가 여태까지는 은밀하게 퍼져나갔다. 직접 접촉하거나 직접 접촉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눈 사람 정도만 걸렸다. 감염자의 분포 또한 진주를 중심으로 한 경남 일대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원하기만 하면 누구나 전국 어디에 있든 손쉽게 감염될 수 있다. 널리 퍼뜨리기 위한 두 마리 나비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나도 한 번 걸려 봐야지 싶으면 MBC에서 연말연시에 방영한 2부작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어른 김장하>를 보면 된다. 또 경남도민일보의 도서출판 피플파워에서 펴낸 <줬으면 그만이지-아름다운 부자 김장하 취재기>를 읽어도 그만이다. MBC 현직 PD와 경남도민일보 전직 기자가 협업으로 이뤄낸, 다른 듯 같은 이란성 쌍둥이 나비들이다.
그렇게 해서 한 번 감염되고 나면, 물욕에 매이지 않고 인정욕구에 시달리지 않는 참된 자유의 경지로 들어가는 문고리가 바로 손에 잡힐지도 모른다. 줬으면 그만이라며, 세상에 드러나고 이름이 알려지는 것이 오히려 부담스럽거나 거추장스러워지는 경지에 곧장 입성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 사는 이 세상이 썩지 않도록 하는 백신 역할은 덤으로 누리는 보람이다.
김훤주
※ 전라도 사람 자연 문화를 다루는 월간지 <전라도닷컴> 2023년 2월호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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