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복스러운 풍광과

이씨 조씨 가문의 절개

함안천·검암천 합류 지점

소출 넉넉한 들판

이령·조순 등 인물 배출

수령으로서 존경심 표현

후손과 깊은 인연도

 

검암(儉巖)마을은 지금은 가야읍이지만 오횡묵 당시는 산외면(山外面)이었다. 낙동강을 건너온 사람들이 함안읍성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길목이기도 했다. 함안천과 검암천이 만나는 어귀에 있는 마을인데 함안천은 광려산 산줄기 서쪽 골짜기에서 시작되는 중심 물줄기이고 검암천은 광려산 산줄기 동쪽 골짜기에서 비롯되는 가지 물줄기다. 두 물이 만나는 자리는 들판이 너르게 형성되기 마련이다. 옛날에는 무엇보다 농사부터 잘되고 보아야 했기에 넉넉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이런 자리가 좋았다.

함안군수 오횡묵은 편한 날이 없었다. 조세 걷느라 장부를 뒤적거리며 노심초사하고, 죄인들은 옥에 가두고 추달하였으며 사람이 죽는 옥사가 터지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상관이 있는 병영·감영·통영·조창으로 쫓기듯 돌아다녔고 밀양·울산·고성 등 다른 고을 겸관(兼官)까지 억지로 맡아야 했다. 날마다 쏟아지는 소송을 처리하느라 바빴고 양반과 아전들의 견제와 도발까지 대응하고 응징해야 했다. <함안총쇄록>에는 이런 오횡묵에게 검암은 편안하고 시원하고 즐겁고 따뜻하고 넉넉한 동네였다는 기록이 이어진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너른 들판에서 받은 상쾌한 첫인상

검암마을은 1889421일 부임하는 오횡묵에게 첫인상을 강렬하게 심어준 동네였다.

큰 하천(大川)이 동쪽으로 흐르기 시작하는 데가 검암동으로 상··하 세 마을을 합하면 100호 남짓 된다. 앞에 큰 들판이 있으니 땅이 기름지고 물이 넉넉해서 일곱 면의 백성들이 모두 여기서 농사를 짓는다. 가는 곳마다 보리를 심어 놓았는데 한 번 바라보니 패어 난 이삭이 밭이랑에 가득히 풍성하게 우거진 것이 상포(上浦)보다 나았다.”

널찍하게 탁 트여 시원하였으며 게다가 푸른 보리까지 싱싱하게 자라고 있어 무척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함안읍성에서 충순당 정려각으로 이어지는 길.

앞에 나오는 큰 하천(大川)’은 지금의 함안천이고 뒤에 나오는 상포는 낙동강 건너편 영산 끝자락(지금 창녕군 남지읍)을 가리킨다. 오횡묵이 전날 밤에 묵었던 데가 상포인데 여기 또한 두 물이 만나는 자리여서 꽤나 들판이 넓었다.

오횡묵은 상포에서 보리밭을 두고 언덕과 들판을 바라봄에 끝없이 넓었고 때마침 남풍이 불어 밭두렁이 푸르게 물결치니 풍년들 조짐이라 가히 기뻤다고 하였다. 그런데 검암에 와서 보니 그보다 더 좋은 데가 여기 들판이더라는 얘기다. 오횡묵은 검암마을에 이르러서야 함안 땅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들판이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함안에서 처음 천렵을 누린 자리

오횡묵이 함안군수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천렵(川獵)을 구경한 자리도 검암이었다. 1890620일이었으니 햇수로 2년만이다. “물이 깊이가 한 발 남짓 되어 고기잡이가 되지 않자 아래로 내려가 보()를 터뜨려 처음으로 고기를 잡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물이 아주 충분해서 주민들이 일부러 그렇게 하는 줄로만 알고 막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물이 모자라는 데가 있었던 것이다.

문득 한 아이가 흰 베옷에 맨다리로 달려와서 알렸다. ‘농사짓는 논에 물을 대지 못하는 사람도 날마다 있습니다. 바로 보를 좀 막아주십시오.” 그래서 오횡묵은 곧바로 터뜨린 보를 도로 막으라 명령했다. 뜻하지 않게 실수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오횡묵은 이어서 선심도 베풀었다. 잡은 고기는 스스로 갖는 대신 검암에 사는 백성 최수천(崔壽天문익권(文益權정상대(鄭相大)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다. 어버이를 잘 섬겼기 때문이었는데 특별히 효도를 권장하는 취지였다. 나머지 몇 마리는 잡은 사람끼리 나누어 가지도록 분부했다.” 여가를 즐기면서도 원님의 풍모를 잃지 않고 백성을 살뜰히 챙기는 오횡묵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함안천 건너편에서 바라본 동산정.

 

동네가 크다 보니 인물도 나고

검암은 들판이 너른 덕분에 일찍부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당시<군지>를 보면 검암에 사는 가구가 103호였다. 함안군 전체 109개 마을 가운데 남외(南外)(호가 많음=戶大신교(新校)(135남내(南內)(115주리(主吏)(106) 다음으로 다섯 번째 규모였다. 이처럼 큰 마을에는 더불어 사귈 만한 인물이 없을 수 없다. “검암의 감역(監役) 이용순(李龍淳)은 자가 사현(士賢)이고 호가 산음(山陰)이다. 단정하고 근실한 문사로 한 고을에서 추앙을 받고 있다.”(1889.11.13.) 고을 선비 가운데 문학과 행의(行儀)로 칭송을 받는 60명 남짓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였다.(1890.5.13.)

 

나라 위해 목숨 바친 그 선조

이용순은 임진왜란을 맞아 순절한 이령(李伶, 1541~92)의 후손이기도 했다. <함안총쇄록>의 부임하는 날 일기에도 적혀 있는 인물이다. “(검암 들판에서) 3리를 갔더니 이충순당 정려각(李忠順堂旌閭閣)이 있는데 검암에 사는 성산 이씨들의 선조다.”

당시 <군지> ‘인물(人物)’ 항목에는 이렇게 나온다. “임진년에 군장(軍將)이 되어 김해진성으로 달려갔다. 함락되던 날 서자들에게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는 돌아가 처자를 보호하라. 나는 나라를 위하여 성을 지킬 것이니 의리상 떠날 수가 없다.’ 그러고는 사절(死節)하였는데 충신으로 인정(復戶)되었다.”

충순당 정려각.

그런데 충신 인정이 오래된 옛날 일이 아니었다. 18891113일자 <함안총쇄록>을 보면 지금 임금(今上=고종) 무진(1868)년에 이조참의(吏議)로 증직(贈職=죽은 뒤에 주는 벼슬)되었다.”(정려각 현판에는 무진년이 아니고 한 해 뒤인 기사년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용순은 이날 분황(焚黃)를 하게 되었고 오횡묵을 초청한 까닭도 여기 있었다.

추증을 하면 조정에서 정식 사령장과 그 부본(副本)을 함께 준다. 분황은 누런 종이에 쓴 이 부본을 조상의 위패 앞에서 불사르고 아뢰는 의식이었다. 그날 오횡묵은 공경하고 감탄하여 걸음을 하였고여러 이씨들은 오횡묵을 보고 넘어질 듯 달려나와 맞이하였다.” 바탕이 이랬던 까닭에 산음과 더불어 잘 지낸 것이 하루이틀이 아니었다”(1893. 2. 21.)고 적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오횡묵은 이런 이용순과 술과 밥을 같이 먹었으며 나아가 때때로 시도 함께 지으며 어울려 놀았다. 오횡묵과 이용순의 이런 사귐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함안총쇄록>을 보면 지역 양반들을 오횡묵이 공무가 아닌 사적인 일로 만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시를 지으며 어울리는 것도 이용순을 빼면 고을 양반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공적인 성격이 대부분이었다.

이용순이 매번 자기 거처에 다녀가라 했으나 들르지 못했다. 술을 내왔는데 안주가 아주 정갈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점심이 나왔다. 회는 신선하였고 구운 고기반찬은 깔끔하였다. 후딱 해치운 뒤에 내가 시령(詩令)을 내니 돌아가며 운()을 불렀다.”(1890.3.10.)

 

여간 가깝지 않았던 이용순

1890621일에는 농사 형편(野色)을 살피려고 검암에 갔다가 (이용순의) 서재에 들어가 시를 썼다. “! 그대의 줄기차게 샘솟는 재주가 어디 쉬운 일인가(嗟君滾滾才難得)/ 부끄러워라! 나는 쓸쓸한 배움이 반 토막이네(愧我蕭蕭學半空).” 이를 보면 이용순을 얼마나 각별하게 여겼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친한 지인인 석성(石醒)의 아들 특달(特達)에게 공부를 가르쳐달라는 부탁까지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특달이 관아에서 공부도 않고 허랑하게 세월을 보내 근심스러웠다. 산음에게 맡기고자 석성에게 먼저 데려가게 하고 조금 있다 쫓아가 이씨 농장에 이르렀다. 특달을 산음에게 맡겨 여름공부를 하도록 부탁하였다. 산음은 이를 허락하였다.”(1890.3.10.)

이용순은 1892126일 김천찰방(金泉察訪) 발령을 받아 임금에게 숙배하러 서울에 갔었는데 그때 오횡묵의 서울 본가에 가서 머물렀었다. 이 때 가까워졌는지 같은 해 1019<함안총쇄록>에는 찰방 이용순이 아들 극아와 서울에서 끊임없이 오래 지냈으므로 한 번 정성스레 맞이하겠다는 요청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게다가 석성(지인)과 치영(致永)(심복)도 심히 간청하였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허락하였더니 극아가 석성·치영 모두와 함께 이 찰방이 거주하는 검암에 가서는 늦게까지 시와 술을 주고받는 즐거움을 나누었다.”

이처럼 가족끼리도 왕래가 있었을 만큼 서로 각별한 인연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김해성에서 순절한 이령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검암 마을에 건립한 충순당. 충순당 정려각과 충순당은 서로 다른 건물이다.

 

고려에 의리를 다한 조순도 검암에

검암에 있는 또다른 역사인물에 대해서 오횡묵은 <함안총쇄록>에 이렇게 적었다. “생각건대 검암리에는 옛날 중군(中軍) 조순(趙純)이 살면서 두문동의 절의를 지켰다. 우리 태조 대왕이 사람은 중군이면서 백이(伯夷), 땅은 검암이면서 수양(首陽)이네라는 말을 빗돌에 실어 내려주었다고 한다.” 백이는 은나라를 치려는 주나라 무왕에 맞서 은나라에 지조를 바친 중국 사람이고 수양은 백이가 동생 숙제와 함께 주무왕의 통치를 피해 숨어 살았던 산이다.

 

오횡묵은 시도 한 수 읊었다.

    위인은 원래 신령한 땅의 기운으로 난다네

    한 검암에서 능히 두 인물이 났다네

    조씨와 이씨가 전후로 마주함을 보게나

    절의가 이리 빛나니 세상이 알고 받들었다네.

 

오횡묵이 <함안총쇄록>에 적어놓은 당시 <군지>는 좀더 자세하다. “요동 정벌에 좌중군(佐中軍)으로 참여하였다. 위화도에서 여럿이 회군을 의논할 때 제후국(藩國)이 상국(上國)을 침범하는 것은 불가하고, 명령을 듣지 않고 갑자기 군사를 돌리는 것은 더욱 불가하다고 하였다.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태조가 등극한 뒤 여러 차례 불렀지만 나가지 않으니 집 앞에 하마비를 세우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1634년 덕암서원에 모셔졌다.” 그러니까 백이’ ‘수양운운이 새겨진 빗돌은 하마비였다.

완천당 박 선생 유적비 비각.  비각 안 왼쪽에 보이는 작은 비가 조순 장군비다.

 

충순당 정려각과 조순 장군비

검암에는 지금 조순 장군비와 충순당 정려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오횡묵이 1890310일 읽은 삼신재(三新齋=이용순의 서재)의 기판(記板)에는 제각각 조중군 수양비(趙中軍首陽碑)’·‘충순공 신정려(忠順公新旌閭)’라 되어 있다.

조순 장군비는 원래 자리는 모르지만 지금 완천당 박선생 유허비(浣川堂朴先生遺墟碑) 비각 안 왼편에 놓여 있다. 완천당 박선생은 한때 검암에 살다 고성으로 옮겨간 박덕손(朴德孫)이다. 1501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시로도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조순 장군비의 앞면은 가운데에 좌중군동지조공순유허비(佐中軍同知趙公純遺墟碑)’, 오른편에 인중군이백이(人中軍而伯夷)’, 왼편에 지검암이수양(地儉岩而首陽)’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도 글자가 빽빽하게 적혀 있는데 왼쪽 아래 끝자락에 근서(謹書)’ 글자가 희미한 것으로 미루어 행적을 담은 기록으로 여겨졌다. 그렇다면 후세에 누군가가 새긴 것일 텐데, 따라서 태조 이성계가 하사한 하마비는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야 하겠다.

반면 충순당 정려각은 130년 전 오횡묵이 보았던 그 자리에 지금도 그대로 서 있었다. 보통 정려각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1칸씩인데 여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어서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 안쪽 현판을 보니 오른쪽에서부터 세로로 두 자씩 충신 증통정대부 이조참의 이령지각(忠臣贈通政大夫吏曹參議李伶之閭)’이 큰 글자로 적혀 있다. 그 왼편에 세로로 상지 육년 기사(上之六年己巳)’, 다음에 중간 글자와 작은 글자로 명정(命旌)’경진(庚辰)’, 이어 석 자씩 세로로 증감찰 을유 가증(贈監察乙酉加贈)’이라 하였다. 꿰맞춰 보면 당시 임금()=고종 6(1869) 을유년에 왕명으로 정려를 세우는 명정을 했고 경진년(1880)(사헌부)감찰을 추증하였으며 을유년(1885)에도 품계를 올려주는 가증을 한 것이 된다.

정려각은 한국전쟁 때도 불타지 않았다고 한다. 오랜 세월을 견디면서 부분부분 수리하거나 꾸민 적은 있어도 완전히 새로 지어서 오횡묵의 눈길을 받았던 것과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처럼 오횡묵이 본 바로 그 건물이라 생각하니 130년 전으로 돌아간 듯 느낌이 새삼스러웠다.

 

충순당의 고조부를 기리는 동산정

이에 더하여 동산정(東山亭)도 있다. 오횡묵이 1890310일 읽은 삼신재 기판에는 성산 이씨 동산정으로 나온다. 당시 <군지>누정(樓亭)’ 항목에는 신정(新亭)’이라는 이름으로 동지산에 있다. 만호(萬戶) 이희조(李希祖)가 지은 것이다. 관포 어득강의 육절시(六絶詩)가 걸려 있다고 간략하게 나온다.

한강 정구가 함안군수로 있을 때(1587) 편찬한 읍지 <함주지>정사(亭榭)’ 항목에서 동산정·신정이라는 이름으로 좀더 자세하게 다룬다. “동지산 서쪽 기슭(=검암)에 있다. 커다란 바위가 큰 하천의 양지바른 데에 병풍처럼 늘어서 있고 아래로 깊은 못이 잇닿았으며 앞은 큰 들이 확 트였다.”

동산정. 충순당 이령의 고조할아버지 이호성의 호가 동산이었다.

어득강이 육절시에 붙인 서문도 나오는데 드문드문 옮기면 이렇다. “내가 1513년 봄에 함안군수가 되었다가 그해 겨울에 병이 위독하여 사임하였다. 그때 주인(이희조)에게는 다만 초정(草亭) 하나가 있었다. 몇 해 뒤 새로 정자를 지었는데 아주 널찍하다고 들었다. 그는 거제 등지에서 수군만호를 하다 부모를 위하여 그만두었다. 함께 놀던 옛날이 이제 다섯 해가 지났다.” 초가 정자 말고 번듯한 새 정자는 1514~18년에 지었다고 보면 되겠다.

동산은 정자 주인 이희조의 할아버지 이호성(李好誠, 1397~1467)의 호이다. 지중추부사 벼슬까지 했던 인물로 충순당 이령의 고조부다. <함주지> ‘우거(寓居)’ 항목에 원래 김천에 살았으나 군현감 안여경(安餘慶)의 딸에게 장가들어 하리(下里) 동지산에 들어와 살았다. 나중에 늙어 김천으로 돌아갔는데 자손들이 함안 안팎에 번성하여 살고 있다고 되어 있다.

동산정은 매우 멋진 정자였다. 지금 건물이 새로 지은 것이기는 하지만 마당에 바위가 그대로 있을 정도로 자연미를 살렸다. 또 절벽 위에 놓여 있어 눈맛이 시원스럽고 아래로는 배롱나무가 여럿 심겨서 꽃이 붉을 때는 안팎이 모두 화사하다. 들머리 느티나무는 의젓하며 아래 함안천 흐르는 물은 언제나 끊이지 않는다.

 

이렇게 자연이 아름답고 인물이 훌륭한 검암에는 황곡서당(篁谷書堂검계정(儉溪亭병산재(屛山齋)도 있다. 옛날 건물은 사라졌고 모두 1960~80년대에 새로 지었다. 황곡서당은 한강 정구(1543~1620)와 더불어 <함주지> 편찬을 했던 지역 선비 이칭(李偁, 1535~1600)의 검암정사가 뿌리라 한다. 이칭의 호가 황곡인데 임진왜란 때 전사한 충순당 이령의 형이다. 이밖에 검계정은 이칭의 동생과, 병곡재는 이칭의 둘째아들과 관련되어 있다. 황곡서당 옆에는 이령 장군을 기리는 충순당도 크게 자리하고 있다.

옛사람의 호흡과 보폭을 지키면서 한나절 느긋하게 둘러보기 좋은 데가 바로 검암마을이었다. 유서도 깊고 아름답기도 한 검암마을에는 느티나무와 왕버들을 비롯하여 아름드리 노거수들도 곳곳에 풍성하게 자리잡고 있다.

 

경남도민일보 2019925일자에 나가고 2020년 펴낸 <조선시대 수령은 어떻게 다스렸을까>에 실린 글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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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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