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함안총쇄록 답사기 (14) 한 손에는 매 한 손에는 꿀

김훤주 2021. 11. 9.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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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못 낸 백성들

엄벌 내렸지만

속으로는 '아프냐나도 아프다'

 

처벌할 때는 엄격했지만

죄수와 아전 차별 없이 별식 배급

민생고 덜고자 틈틈이 베풀기도

 

오횡묵의 대민 업무는 대체로 두 가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하나는 조세를 공정하게 거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백성들이 헐벗고 굶주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받아내기 위해서는 족치고 때리는 형벌도 서슴지 않았지만 세심하게 보살펴 나누고 베푸는 데에도 열성을 다했다.

요즘 말로 하면 공정 조세와 복지 실현을 동시에 추진했다. 어쨌거나 하나는 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는 것이어서 얼핏 보면 서로 반대되는 듯하다. 하지만 둘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근본은 조세가 아닌 백성이었다.

백성이 헐벗고 굶주리면 일을 하기 어렵고 일을 하지 못하면 조세 내기도 어려워진다. 마른 수건을 짤 수 없고 빈 뒤주를 털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백성들 살림살이는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조세를 많이 걷기 위해서라도 먹고사는 문제를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오횡묵은 이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더불어 백성들 마음을 얻는 데도 능숙한 수령이었다.

 

형벌은 갈수록 고달프게

형벌의 주된 목적은 밀린 조세를 걷는 데 있었다. 당시 사정은 이랬다. 1889517일 현재 못 거둔 조세가 삼반(三班=아전들)이 통틀어 17000냥이고 백성들도 4만냥이 넘었다. 그렇지만 그간 되질하여 거둔 것은 고작 8000냥 남짓뿐이었다.

형벌은 수위를 점점 높였다. “첫째 날은 묶어서 계단 앞에 두었고 둘째 날은 기왓장 위에 무릎을 꿇려 앉혔다(跪坐瓦上). 셋째 날은 두 손을 묶어 나무에 매다는 현벌(懸罰)을 주었고 넷째 날은 매()와 몽둥이()를 더했으며 밤마다 감옥에 가두었다.” 미루어봐야 매질뿐이니 빨리 갖다바치는 것이 상수라는 다그침이었다.

2년 뒤에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거두지 못한 각공전이 3100냥이 넘는데 불시에 별점고를 내려 빠짐없이 모조리 와서 기다리라고 명령하였다. 그런 다음 떼어먹은 사람들을 모두 잡아들여 묶은 다음 무릎을 꿇렸더니 당일 거둔 것이 900냥이 넘었다. 참으로 형벌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1891. 3. 15.)”

하지만 즐겁거나 기껍지는 않았다. 하기 싫어도 억지로 해야 하는 수령 노릇이었다. “모두 잡아들여 모진 방법으로 등골()을 벗겨내듯() 하였다. 시급히 밀린 조세를 걷어야 하기 때문에 형벌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차마 못할 짓이니 살을 에듯 마음이 아프다.”(1889. 10. 23.)

하나씩 잡아들여 조세를 바치도록 곤장을 치고 가두었다. 그러나 이제 보리농사가 겨우 시작하여 돈 나올 길이 매우 어렵다. 생민들의 사정과 형편을 관에서 몰라 이러겠는가! 봄 사이에 불쌍하고 가여운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다.”(1890. 4. 27.)

 

죄인에게도 꿀물을 내려주고

이렇게 형벌을 혹독하게 하면서도 오횡묵은 백성들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심정은 다르지 않다. 누구나 차별을 싫어한다. 오횡묵은 대청 위에서 다스리는 사람이나 계단 아래 마당에서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나 똑같이 대우할 줄 알았다.

1890518일 백청(白淸) 한 항아리와 복분자 한 상자가 선물로 들어왔다. “때마침 조세 거두는 일 때문에 해당 색리와 면별 집강 그리고 미납한 작자 40명 남짓과 감옥의 죄수(獄囚) 10명 남짓이 있었다.

곧 추달을 시작하여 매질(杖笞)을 하려다 잠시 멈추고는 물에 탄 꿀과 복분자 한 자밤씩을 나누어주었다. 관아 손님 이하 대청마루에 있는 통인·아전·장교 수십 명에서부터 계단 아래 마당에 있는 관노·사령 수십 명과 여러 작자들 그리고 감옥의 죄수들에게 일일이 돌아가며 나누어주었다.”

 

가장 포복절도할 일은 곤장틀 위에서 볼기짝을 까고 있으면서도 머리를 숙이고 씹으면서 오히려 달게 삼키며 기뻐하는 것이었다.

너도 맛있는 줄을 아느냐?’

마땅히 감당해야 할 죄라서 매질이 아프지 않거늘 하물며 어질게 내려주시는 그 맛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집강(執綱)들도 모두 수군거렸다. ‘가엾게 여겨 어루만지는 뜻이 타이르는 말씀에 넘쳐나니 매 맞는 이도 아픔을 알지 못하네.’”

 

1892년 윤625일에는 이런 일도 벌였다. 날이 가물어 기우제를 연달아 지낼 때였다. 하늘에 빌려면 몸가짐을 정결하게 해야 하는지라 조세 거두는 것이 급하였어도 매질()과 곤장질()은 멈추었다.”

다만 두 손을 묶어 나무에 매다는 현벌(懸罰)을 하였다. 날마다 수십 명이었다. 또 마루 위에는 글쓰는 아전들이 10명 남짓 늘 머물고 있었다.” 오횡묵은 아전과 죄인을 구분하지 않았다. 하루 한 끼가 아니라 상당히 오랫동안 동등하게 대우했다.

죄를 지었거나 공을 세웠거나 날마다 참외 3개씩 또는 떡·국수·팥죽·육개장 같은 별식을 일체 똑같이 나누어주기를 보름 동안 한결같이 하였다. 현벌을 받는 사람들이 감탄하여 수군거렸다. ‘이같이 하나같이 보아주시는데 조세를 떼어먹는 몸이 되어 근심 걱정을 오래 끼치고 현벌을 받으니 사람이 아닌 것이다.’”

 

진휼에 스며든 부정을 뿌리 뽑고

1889426일은 가난하고 군색한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는 진휼(賑恤)의 종순일(終巡日)이었다. 당시는 진휼을 보통 한 달에 세 번 하였다고 하는데, 차례대로 초순·중순·종순이라 일렀다.

오횡묵은 공형과 담당 아전 등을 불러 분부하였다. ‘바로 나팔을 불어 먼저 온 사람들을 진장(賑場)에 불러 모아라.’ “조금 있으니 늙고 약한 남녀들이 어깨를 부딪히며 잇따라 들어왔는데 다들 초라한 몰골이었다.”

알고 보니 진휼에도 부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해당 색리가 앞에 열한 번째 진휼할 때(4월 중순) 14석 영()으로 줄였는데라고 하기에 손가락으로 되와 말을 재었더니 다른 것에 견주어 조금 작았다.” 굶주린 백성들에게 가야 할 쌀을 그만큼 빼돌렸던 것이다.

그래서 “(모자라는 쌀을) 채우도록 명령하고 아울러 당일 나누어줄 쌀을 잰 다음 차례로 굶주린 819명에게 나누었다. 마치고 보니 하나도 없던 쌀이 11말 영()이 되었다.” 오횡묵은 말하였다. ‘전날 떼어먹고 줄인 것이 오늘 11말 영()이 남았다. 전날 되가 가득차지 않았으니 나누어주는 것이 고르지 못했음을 알겠다.’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설치한 진장에 들어오지 못한 굶주린 노약자가 수십 명이었고 (정실에 따른 잘못된 처리로) 자루만 들고 패(=증명기록)가 없이 따라 들어온 사람이 30명이 넘었다. 마당 가득 하소연을 하는데 더없이 슬프고 참혹하여 남은 쌀을 나누어 주었다.”

이듬해 517일에는 사징전(査徵錢=아전 등이 떼어먹었다가 들통나서 게워낸 돈)을 헐어 백성한테 주기도 하였다. 1888년 사징전이 459849푼인데 2350냥은 바치고 남은 224849푼은 감영의 허락을 받아 전체 4747호에 집집마다 47푼씩 나누어주었다. 그러고도 174전이 남자 쇠잔하고 패망한 동네에 더 주었다.

 

개별 구휼은 장터가 안성맞춤

189098일 함안읍성 동문 앞에 장이 섰다. 오횡묵은 엿과 돈 몇 닢을 궁색한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있었다. 마침 굽은 몸으로 앓는 소리를 하며 지나가는 노파가 있었다. 매우 불쌍하여 10전을 주니 오늘은 한 번 배부르게 되었습니다하고는 시장에 가서 밥을 사먹었다. 알고 보니 먹을 것도 없고 자식도 없는 할멈이었다. “이런 풍년에도 돌아갈 곳이 없고 돈 1전을 얻으면 금덩어리를 얻은 마냥 기뻐하니 우습고도 가련하였다.”

석 달 뒤 장날 풍경은 사뭇 달랐다. 18901228일 굶주리고 고달픈 이들에게 베풀 밑천으로 동전을 약간 준비하였다. 시전(市廛)에 와서 보니 모두 만족스럽고 편안한 기색이었다. 서너 번 돌아다니는 동안 겨우 구걸하는 아이 5명을 보았을 뿐이다. 처음 의도대로 돈을 몇 닢 주었지만 진짜 고달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1891년과 1892년에도 한 해 마지막 장날인 1228일에 시장에 나갔다. 풍년이 아니었는데도 춥거나 떠도는 이들이 없어 준비한 돈을 쓰지 못했다. 굶주리고 고단한 모습도 없었으며 모두 옷도 완전하고 몸도 충실하였다. 오횡묵은 세밑에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이같은 장터 나들이를 자주 했다.

 

활쏘기 시합장도 나누는 자리로

오횡묵은 문과가 아닌 무과 출신이다. 활과 총을 쏘는 시합을 자주 베풀고 또 즐겨 구경하였다. 본인은 활을 당기고 싶어도 병 때문에 할 수 없다고 탄식하였지만, 병사들이 무예를 단련하기 위한 자리는 종종 마련하였다.

1891222일 동문 밖 지과정에서 열린 활쏘기 시합에서는 함께한 사람들과 더불어 크게 베푸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른은 물론 구경나온 아이들로도 모자라 학동들이 공부하는 향교까지 찾아가 챙겨주었던 것이다.

가운데를 맞히거나 성적이 좋은 사람에게는 모두 상을 베풀었다. 삼반관속 이하 100명 남짓에게도 돈 10문씩 주었다. 구경하는 아이도 많았는데 앞으로 불렀더니 처음에는 바라만 보고 놀라 달아났다. 잡혀 온 아이들에게 5문씩 주니 달아났던 아이들이 앞다투어 모였다. 100명가량 되었는데 앞서 했던 대로 나누어주었다. 속담에 돈이면 뱃속의 아이도 꾈 수 있다고 하는데, 진짜였다.”

향교는 지과정에서 2리 떨어진 데 있다. “동재(東齋)까지 걸어가 학동 30명 정도에게 하나하나 이름을 물어보고 과자와 사탕을 방에 던져주었다. 자빠지고 엎어지면서 움켜쥐고 가로채는 바람에 강한 사람은 많이 얻고 약한 사람은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반드시 직접 손에다 주어 섭섭함이 없도록 하였다.”

오횡묵은 별 생각 없이 한 달 뒤 325일 다시 자리를 마련하였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어린아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전에 돈을 얻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횡묵은 마지못해 따로 상급을 주었는데 무릇 40꾸러미 남짓 되었다.” 예나 이제나 어른아이 구분 없이 좋아하는 물건이 바로 돈이었던 것이다.

 

능멸하고 깔보는 데는 단호하게

이처럼 마음씨 넉넉하고 잘 베풀고 마음도 한 번씩 약한 오횡묵이었지만 호락호락하고 만만하지는 않았다. 수령으로서 위엄을 지키며 처신할 줄 알았고 나아가 아전이나 양반들의 능멸은 단호하게 응징했다.

 

<함안총쇄록>에서 가장 눈에 띄는 수령에 대한 능멸은 1890412일 기록에 나온다. 대구감영을 향하여 가는 길에 백사면(白沙面) 평림점(지금 대산면 평림리)에 들렀는데 거기서 사달이 난 것이다.

 

낮부터 비가 많이 와서 더 가지 않고 하루 묵으려 했는데 저녁이 지나서도 동네 담당 아전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통인더러 알아보라 했더니 돌아와 하는 말이 더욱 심각하였다. ‘집강은 깊이 잠들었고 검독(檢督) 장교는 옷을 벗고 방에 있으며 고주인(雇主人)은 흙마루 위에 누웠는데 동수(洞首)는 보이지 않습니다.’

 

오횡묵은 이에 곧바로 체포·압송을 명령했다. “동수는 와보아야 마땅하다. 관속인 집강과 검독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듣고도 전혀 거리낌이 없다. 이런 무리는 마땅히 엄히 징계해야 한다. 장교와 주인을 결박하여 잡아보내 감옥에 가둔 다음 닭이 울기 전까지 와서 전말을 보고하라.”

 

앞서 부임 초기에는 아전보다 양반들을 잡도리할 필요가 더욱더 있었다. 당시 함안은 양반들이 남당과 북당으로 나뉘어 심각하게 다투고 있었다. 특히 북당은 수령의 인사권을 무시하고 이방 자리를 자기네 차지로 하려고 수작을 부렸다. 수십 명이 관아로 몰려들어 위세를 떨면서 수령을 업신여겼다.

 

그러나 이들은 곧바로 되치기를 당한다. 양반과 한 패가 되어 백성을 쥐어짜 뜯어먹으려 했으면 적당히 타협했겠지만 오횡묵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도발을 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남·북당 모두 두더지 잡기 게임 하듯 때려잡아 버렸다.

 

1889424일이었는데 곤장을 치는 장졸(杖卒)에게 엄명을 내려 형장(刑杖)을 하나하나 잘 살펴 구별하도록 다짐을 받고 신장(訊杖)을 다섯 대씩 하였다.” 신장은 신문(訊問)할 때 쓰는 비교적 작은 형장으로 무릎 아래를 때린다고 한다.

 

그런데 장졸이 헐장(歇杖)을 하는 것 같았다. 소리만 크고 실제로 아프지는 않은 매질이 헐장이다. 그동안 양반과 아전이 한통속이었으니 그 밑에서 일하는 장졸은 당연히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물러설 오횡묵이 아니었다. 때리던 양반은 그대로 두고 장졸부터 잡아들여 대곤(大棍) 일곱 대를 치겠다며 혼쭐을 내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남·북당 양반 6명에게 신장을 서른 대씩 안겼다. 마지막에도 5명은 풀어주었지만 북당의 우두머리 한 사람만큼은 칼을 씌우고(着枷) 감옥에 가두었다.

 

원님 코앞에서 벌어진 노름

노름은 당시 고을 원님에게는 어디서나 골칫거리였다. 노름은 지금보다 옛날에 더 큰 범죄였다. 농사지을 의욕과 시간을 갉아먹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오횡묵이 부임 두 달만에 발표한 교혁절목(矯革節目)에도 노름이 들어 있다. 잘못된 폐단을 바로잡아 고치는 서른여섯 가지 규정인데 조세 관련이 대부분이었다.

 

모든 잡기(雜技=노름)는 당연히 꼭 엄금하고 만약 범하면 잡아올려 엄히 징계해야 한다. 안면이 받쳐 가려주고 보고하지 않았다가 탄로 나면 해당 동수(洞首)와 연주(煙主=노름패 두목)도 중벌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속전(贖錢=벌금)1인당 112전씩 모두 걷어 바칠 것.”

 

오횡묵은 189081일에도 투전(投箋골패(骨牌) 같은 물건을 낱낱이 끌어모아 모조리 불태웠다. 시장 장사꾼들이 이런 물건을 사고팔았다가는 들리는대로 엄중처벌하여 발본색원하겠다고 엄중하게 전령을 내렸다.”

 

바뀌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엄중처벌은 가능했지만 발본색원은 불가능했다. 고작 두 달 뒤에 그것도 원님이 머무는 동헌 바로 옆에서 관노들이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밤이 깊은 뒤 측간에 갔더니 급창간(吸唱間) 창틈으로 밝은 불이 희미하게 보이는데 둘러앉아 황당한 모양을 짓고 있었다. 통인을 시켜 적발하니 과연 노비들이 강패(江牌)로 노름을 한 것이었다. 모두 잡아 엄히 곤장을 치고 파면하였다.(1890. 10. 9.)” 급창은 원님의 명령을 확성기처럼 크게 되풀이하는 사령(使令=심부름꾼)을 말한다.

 

경남도민일보 2019 09 18일자에 나가고 2020년 펴낸 <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에 실린 글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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