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함안총쇄록 답사기 (13) 군수의 파업

김훤주 2021. 11. 8.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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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연히 떠날 수도"

원님 밀당에 양반들 화들짝

 

밀린 조세 47500냥 걷고자

양반들에게 방편 찾아라 지시

피해 볼까 미루자 '극약 처방'

선정 베풀던 군수 떠날까 염려

수령 파업 엿새 만에 양반 백기

징수 현장 감시자 동행도 관철

양반 쥐락펴락한 뚝심 바탕에는

백성 향한 공정하고 선한 성품이

 

엄청나게 떼어먹은 조세

1889년 함안은 파업으로 물결쳤다. 노동자인 관노들이 파업을 벌였고 사용자인 군수도 파업에 나섰다. 노동자의 파업이면 당연한 권리려니 하겠지만 사용자가 파업이라니, 130년이 지난 지금도 익숙한 상황은 아니다. 왜 파업을 했는지 내막이 궁금하다.

군수의 파업은 밀린 조세를 농간 없이 거두는 데 목적이 있었다. 밀린 조세를 걷는 과정에서 아전과 양반의 장난질을 막아 백성들이 엉뚱한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해야 했다. 파업이라는 극약처방을 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 바로 조세 징수이기도 했다.

앞서 오횡묵은 부임 직후인 5월 아전과 백성들이 떼어먹은 포흠(逋欠)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를 시작했다. 일곱 달만에 나온 결과는 엄청났다. 1886~883년 동안 밀린 세대전(稅代錢=현물 대신 현금으로 바치는 조세)과 각공전(各公錢=서울 여러 공공기관에 바치는 세금)이 모두 10만 냥이 넘었다.

백성들이 떼어먹은 민포(民逋)3만 냥이었고 아전들이 떼어먹은 이포(吏逋)23000냥으로 적지 않았다. 이는 그래도 받아낼 대상이 있지만 나머지 47500냥은 받아들일 도리가 없는 무망난판(無望難辦)이었다. 내야 할 사람이 죽었거나 달아난 경우가 태반이었던 것이다.

 

대책이 없는데도 거둬들이려니

무망난판은 받아낼 사람이 없어서 말 그대로 난감했다. 일단은 적발된 방환(防還)과 방결(防結)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방환은 춘궁기에 곡식을 서류상으로만 빌려주고 추수할 때는 아전들이 이자까지 받아 가로채는 것이다. 방결은 농지를 숨겨서 해당 조세를 물지 않고 탈세하는 것이다.

이러고도 모자라는 부분은 농지가 있는 모든 백성에게 공동으로 책임을 지우기로 했다. 이를 배결(排結)이라 하는데 한 마지기를 가진 백성은 한 말을 내고 열 마지기를 가진 양반은 열 말을 내는 식이다.

반면 민포·이포는 해당 백성이나 아전이 재산이 있으면 바로 거두고 없으면 족척(族戚)에게 받아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은 성이 같은 친족이고 척()은 성이 다른 친척이다. 이런 연좌제는 개인이 독립된 주체인 현대 사회라면 어림도 없지만 씨족공동체가 기반인 전통사회서는 가능했다.

오횡묵은 121일 밤 향청(양반들의 업무 공간=향사당)에 모인 임원 50명 남짓에게 이런 방안을 밝혔다. 다만 누구에게 얼마나 물릴지 구체적인 부분은 스스로 결정하게 했다. “부임하기 오래 전부터 있어온 일이니 본관이 마음대로 할 수 없소. 서로 충분히 의논하여 방편을 찾아보시오.”

 

웃통 벗고 화살 맞기

양반들은 앉지도 일어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가 되었다. 먼저 군수의 결정에는 반대할 꼬투리가 없었다. “조세 공납 문제는 해마다 쌓인 허물로 아전과 백성들의 뱃속에 모두 들어 있습니다. 또 죽거나 달아나서 거두어들일 데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고을의 지각 있는 선비는 누구나 사또의 오늘 교시와 같은 방편입니다.”

하지만 그대로 따르자니 손해가 막심했다. “이렇게 배결하면 달갑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누가 가슴 웃통을 벗고 기꺼이 화살을 받겠습니까? 괴로워 속을 태우면서도 원망은 하지 못하는 나날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큰 틀에서 합의가 이루어지자 오횡묵은 처음 준비한 대로 술과 국을 가져와 앉아 있는 임원들에게 나누어 먹였다.” 한편으로는 으르고 한편으로는 달래는 국면이었다.

 

마산창에선 그 해 조세를 걷고

그런데 오횡묵에게는 밀린 조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해에 걷어 바쳐야 할 조세도 있었다. 이는 오횡묵이 마산창(馬山倉: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 일대에 있었던 조세 창고)에서 거두어야 했다.

이틀 뒤인 3일 마산창에 달려갔더니 전운사(轉運使=조창의 최고 책임자)가 닦달을 했다. “다른 고을은 거의 모두 기한에 다 납부할 지경인데 함안은 무엇을 믿고 이처럼 늦는가?” 그러나 오횡묵에게는 비책이 있었다. 지난 1일 양반들을 만났을 때 납부를 미리 조직해 두었던 것이다. “먼저 영향력 있는 집안부터(先自大民) 6~7일을 기한으로 바치기를 마치시오.”

 

곤장 소리 가득한 납세 현장

곡식을 조세로 거둘 때는 되질이 중요했다. 지금처럼 전자저울로 무게를 정확하게 달 수 없었던 옛날에는 되질에 따라 10~20% 더해지거나 빠지는 것은 예사였다. 됫박이 같아도 고봉으로 되질하면 더 들어갔고 깎아서 하면 적게 들어갔다.

오횡묵의 되질은 정확하고 공정했으며 이는 백성들이 알고 있는 바였다. “마산창 대청 동쪽 아래 방에 세미를 되질하는 봉세소(捧稅所)를 정하였는데 백성 수백 명이 벌써 기다리고 있었고 나머지도 뒤로부터 계속 들어왔다.”

세미를 내는 백성에게 둥근 쇠방망이를 내어 평평하게 되어 바치게 하였다. 고지기가 먹을 몫으로 한 되를 뜨는 것도 역시 같은 방법으로 하게 하였다. 바닥에 흩어진 쌀을 해당 백성에게 내어주도록 하였다.”

 

다른 봉세소는 어땠을까? “창원봉세소에는 채찍과 회초리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곤장을 제대로 쳤는지 확인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불리하게 되질을 해놓고는 세곡이 모자란다며 매질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11창고를 연지 8일만에 곤장을 한 대도 치지 않고한 해 조세 2800석 남짓을 거두었더니 조창이 설치된 이후로 처음이라고들 했다.” 전운사 또한 다른 원님이 머무는 자리에는 모두 기생이 있었다는데 함안만이 없었으니 쉽지 않은 일이네라고 칭찬했다.

 

질질 끄는 양반 vs 문을 닫는 군수

오횡묵은 마산창에 8일을 머물렀다. 이것이 양반들에게는 밀린 조세를 거둘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라고 주어진 말미였다. 그런데 닷새가 지난 16일에도 밀린 조세는 매듭이 지어지지 못한 상태였다.

이틀 뒤 18일 오횡묵은 업무를 작파했다. 양반들이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점차 다툼에 이르리라는 말을 듣고 병이 났다며 방문을 닫았”던 것이다.  드디어 군수의 파업이 시작되었다. 사람들 대면은 않았지만 서류는 주고받으며 업무는 보는 정도였다.

파업 나흘째인 21일에도 양반들은 서로 버티며 밀고 당기기만 하고 있었다. 이에 오횡묵은 아예 떠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조정과 통영·병영·감영에서잇달아 조세 독촉을 받는 고달픈 실정이다, 양반들이 사태를 가볍게 여기고 소 닭 보듯 바라만 보며 책임을 전가하고 일부러 결정하지 않고 있다, 관장이 결연히 떠나 버리면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

얼핏 보면 별스럽지 않은 이 발언이 양반들에게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의논만 분분하던 양반들이 이틀이 지난 23일에 처음 얘기대로 농지 면적에 따라 밀린 조세를 물리겠다는 보고서를 올린 것이다.

 

단체장을 자기 손으로 뽑는 지금도 시장·군수·도지사가 잘못 걸리면 주민들은 생고생을 한다. 공공의료시설을 멋대로 폐쇄하고 복지를 축소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민원은 내팽개친다. 옛날에는 입법권·행정권·사법권에 형벌권과 조세징수권까지 원님 손아귀에 있었다.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보니 어떤 원님이 오느냐가 백성들의 삶의 질과 직결될 수밖에 없었다.

 

선정을 베풀던 원님이 떠난 자리에 고약한 인물이 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멀리 갈 것 없이 며칠 전 마산창에서 있었던 창원봉세소의 모습만 떠올려도 충분하다. 창원 백성들은 함안 백성들과 달리 같은 세곡을 바치고도 억울한 매질까지 당해야 했던 것이다.

 

군수의 일관된 뚝심vs양반의 소소한 저항

그래서인지 오횡묵은 한 발 더 나갔다. 한 풀 꺾인 양반들이 원래대로 하겠노라 한 뒤에도 같은 심정을 되풀이 밝혔다. “문을 닫아건 채 오로지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소.”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지 못하도록 막을 구체적인 방안을 주문하면서였다.

이에 양반들이 색리(色吏=아전)를 정하여 실태 조사를 함으로써 폐단을 없애겠다고 하였으나 오횡묵은 색리 말고 ‘(해당 지역의) 사정을 잘 아는(解事) 향원(鄕員:향청의 임원)’도 추가하라고 주문했다. 일반 백성들이 다치지 않도록 이중삼중으로 안전장치를 두겠다는 심산이었다.

양반들은 곧바로 의견이 통일되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다곧장 정당(政堂)을 열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면서도 사정을 잘 아는 향원을 추가하는 문제에는 똑 부러지게 답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귀여운, 지역 양반들의 소소한 저항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이를 무턱대고 받아들일 오횡묵이 아니었다. “분명한 것이 없으니 매우 미심쩍고 답답하다고 답하면서 정당을 열고 열지 않고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며 거절했다. 양반들이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를 푸는 열쇠임을 분명히 밝힌 셈이다.

 

전체 백성을 대상으로 전령(傳令)도 내렸다. “임장배(任掌輩=마을에서 공무를 맡아 보던 하급 아전)가 조세를 걷어 관아에 바치지 않거나 빼앗는 폐단이 전혀 없다고 보장하기 어렵다. 임장배에게 낸 조세를 사람마다 낱낱이 이름 아래 언제 누구에게 얼마를 내었는지 빠짐없이 적어 내일까지 가져오라.” 아전들에게 백성들이 한 푼도 뜯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가 결연하다.

 

이처럼 일반 백성까지 동원해 압박하자 양반들은 일단 색리를 정하여 실태를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오횡묵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앞서 주문대로 색리뿐 아니라 향원까지 추가하라고 한 번 더 못을 박았다.

아전들의 간사함은 헤아리기 어려워 아전의 손에만 오로지 맡겨놓을 수 없다.” 임장배가 배결에 따른 조세를 거두는 현장에 아전과 향원이 1명씩 더 입회하여 검사하고 살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고는 하루 뒤(24) 색리 3명과 감관(監官) 6명을 뽑아 입회시키고 포흠 장부를 실사하게 함으로써 사태를 종결지었다(향원은 향청에서 자율 결정).

 

생일날 깔끔한 마무리

파업은 100% 목적을 달성했다. 밀린 조세를 걷는 과정에서 아전과 양반들이 농간을 부리지 못하도록 안전장치를 만들었다. 그러나 파업을 바로 풀지는 않았다. 이틀이 지난 26일에야 문을 열고 일을 보기 시작했다.

이날 호가 석성(石醒)인 지인이 파업이 성과를 내었다고 평했다. “그동안 업무를 보지 않은 것은 여러 사람의 마음을 경계하고 양반들의 논의를 하나로 하려는 데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일을 빨리 마치려는 뜻이었습니다. 정사를 보지 않음으로써 아름다운 정사를 이룬 것입니다.”

오횡묵은 마음이 불편했다. “수령으로서 백성들의 괴로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밀린 조세는 줄잡아도 10만 냥이다. 며칠 전 마산창에서 거둔 함안의 한 해 세곡이 통틀어 2800석이었다. 당시 조정에서 쌀 한 섬을 25냥으로 쳤으니 10만 냥을 쌀로 환산하면 4000, 함안 전체 조세의 140%를 웃도는 엄청난 규모였다.

 

그래서 밀린 조세의 징수는 눈 위에 서리가 내리고 거북이 등에서 없는 털을 깎는 것과 같으니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횡묵은 마음 가득 몹시 슬퍼 잠자고 밥 먹는 데도 맛을 잃었다. 어쩐지 몸을 일으킬 생각이 없고 차라리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어쨌거나 마무리는 깔끔할수록 좋은 법이다. 이튿날인 27일이 하필이면 생일이었다. 오횡묵은 이를 빌미삼아 한 턱 쏘았다. “18면의 향원과 실사 감독관 34명이 도서원청(都書員廳, 서원은 마을별 고을 업무 집행 책임자이고 도서원은 그 우두머리) 장부조사소에 들어와 있었다. 아침밥 한 상씩과 막걸리 한 동이를 가지고 그들이 모인 장소에 나갔다.”

내 생일이 무슨 기쁜 일이겠소만 여러 양반들이 장부를 조사하는 수고에 빠져 있음을 생각하고 이로써 한 때 정성을 표시하오.” 이어서 삼반관속들에게도 흰밥과 고깃국을 먹였다.”

오후에는 아전들이 근무하는 이청에서 군수 생일이라고 다담 한 상을 성대하게 들였다. 오횡묵은 여기에 소주 세 복자()를 더하여 양반들에게 보냈다. 당시 소주는 지금 같은 희석식과 달리 쌀로 빚은 증류주여서 아주 고급진 술이었다.

 

함안 백성보다 착한 백성이 없다

그러나 밀린 조세를 둘러싼 밀당은 그 뒤에도 이어졌다. 대충 정리된 시점은 이듬해 121일이다. 내야 할 사람이 죽거나 달아난 무망난판과 백성들이 떼어먹은 민포는 어느 정도 해결된 모양인지 감영에 올린 공문에는 아전들이 떼어먹은 이포만 나온다.

이포 2만 냥 남짓 가운데 1만 냥은 토지 같은 재산으로 청산하고 족척들에게도 물렸습니다만 나머지 11300냥은 아전들에게 도저히 거둘 수 없어 백성들에게 배결하여 거두기로 하였습니다. 떼어먹은 놈들은 칼을 씌워 엄히 가두는 한편 성명과 금액을 기록하여 책으로 만들도록 했습니다.”

감영의 평은 이랬다. “아전들의 습속이 함안보다 악한 데가 없고 백성들의 마음이 함안보다 착한 데도 없다.” 이와 함께 포흠을 저지른 아전은 낱낱이 거명하여 벌을 주게 하였으며 이미 다른 벌을 받고 있는 아전은 그 아들이나 손자를 이안(吏案=아전 명부)에서 제적하여 다시는 아전 노릇을 못하도록 조치를 내렸다.

 

경남도민일보 2019 09 10일자에 나가고 2020년 펴낸 <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에 실린 글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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