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함안총쇄록 답사기 (11) 낙화놀이

김훤주 2021. 11. 6.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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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절로 나오는 불꽃비

암벽 타고 우수수

사월초파일에 등불 달기

읍성 일대 민가에 줄줄이

 

멋 더하려 낙화봉 뒤섞어

마을 명소 불꽃 대량 설치 

바람에 흩날려 장관 연출

일제강점기 단절 후 부활

 

함안에는 무형문화재가 셋 있다. 화천농악(化川農樂낙화(落火)놀이·함안농요(咸安農謠)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함안총쇄록>에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낙화놀이 하나다.

낙화놀이라 하면 하늘에서 불꽃이 뻥뻥 터지는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함안낙화놀이는 차분하면서도 화려한 경관을 연출한다. 130년 전으로 거슬러가면 함안낙화놀이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금의 모습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함안총쇄록> 속으로 들어가 그 원형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무진정에서 해마다 사월초파일에 열리는 함안낙화놀이. 숯가루와 한지를 꼬아 만든 수천 개의 낙화봉에서 불이 떨어지며 꽃비가 내리고 있다.

성 위에 오르지 못한 첫 번째 사월초파일

오횡묵은 1889421일부터 1893226일까지 310개월 함안군수로 있으면서 부처님 오신 날 사월초파일을 세 차례 맞았다. 첫 번째가 189048일로 일반 백성들과 뒤섞여 불놀이를 구경하였다.

성중의 인가에 등불()을 매단() 집이 열에 일고여덟은 되었다. 여러 손님들과 통인·관노들과 함께 뒷문으로 걸어 나와 성의 서남 모퉁이에 이르렀다. 남루에 오르고 싶어서 누각 가까이에서 살펴보니 성중에 노는 무리(遊輩)들이 먼저 올라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아 가만히 성의 구석진 곳으로 갔다. 두루 등불 모양(燈樣)을 살펴보니 시렁()이 높거나 낮았고 롱()은 크거나 작았다. 낙화(落花)하는 경색은 자못 먼() 시골()에서 의외(意外)였다.”

오늘날 절간에 가면 볼 수 있는 등불이 130년 전 함안읍성 일대 민가의 70~80%에 매달려 있었다는 것이다. 기다란 나무로 시렁을 걸어놓고 거기에 등불을 매달았다. 등불 숫자는 형편이 되면 그 집안 식구의 숫자와 같았다.

그런데 등롱 속에 들어가 있는 등불 말고 정작 눈여겨볼 대목은 낙화(落花)’. 등불은 물론 떨어져 내리는 불꽃도 함께 어우러져 있었던 것이다. 오횡묵이 먼 시골에서 의외였다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지 싶다.

고을 원님조차 자리 차지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 노는 무리들이 함안읍성 남문루에 올라가 떠들썩했다. 사월초파일은 무슨 경건한 종교적 기념일이라기보다는 지금의 크리스마스 같은 축제에 가까웠다고 보아야 맞을 것 같다.

 

불이 붙어 타고 있는 낙화봉.

자이선에서 맞은 세 번째 사월초파일

이태가 지난 189248일에는 남문루를 찾지 않고 자이선에 올라 불놀이를 구경하였다. 자이선은 한 해 전 4월에 오횡묵이 사람을 시켜 전면적으로 단장한 새로운 명소였다. 지금 함안초교와 함성중학교의 경계 지점 뒤편 비봉산 기슭 바위 암벽에 해당된다.

평평하게 펼쳐져서 너르기도 하였고 겹겹이 포개져서 높기도 하였다. 두 해 전 초파일에 오르려다가 인파에 밀려 가지 못했던 남문루에서보다 훨씬 전망이 좋았을 것이다.

아전들이 불꽃(落火) 수백 개를 따로() 만들어() 나무 꼭대기와 암벽 등지에 걸어놓았다. 바람에 따라서 어지럽게 흔들리며 현란하게 빛났다. 관망함에 참으로 하나의 기관(奇觀)이었다. 마을의 등불이 지난해보다 조금 나은 것 같아 태평의 기상을 점칠 수가 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첫째는 아전들이 따로 만들었다는 부분이다. 민간에 더하여 새로운 주체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둘째는 만든 물건이 등불이 아니라 떨어져 내리는 불꽃이고 그 숫자가 수백 개일 정도로 많다는 사실이다. 셋째는 불꽃을 내건 자리가 길가 시렁이 아니라 자이선 나무꼭대기와 암벽이라는 점이다.

초파일 불놀이에서 등불이 먼저일까, 불꽃이 먼저일까? 그야 두말할 것도 없이 종교행사로 시작되었으니 등불이 먼저다. 그러면 불꽃은 왜 생겨났을까? 등불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서인지 아무래도 좀 밋밋하다. 사람은 무엇인가에 익숙해지면 색다르고 멋진 다른 것을 찾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등불을 뛰어넘는 재미거리로 생겨난 불꽃이 이번에는 거리를 벗어나서 산으로 올라가 고도를 높임으로써 또다른 차원으로 나아갔다. 오횡묵이 적은대로 나뭇가지와 바위절벽에 내걸려 바람이 부는 데 따라 흔들리며 빛났던 것이다. 지금 되살려 시도해보아도 좋을 새로운 경관의 창출이라 할 수 있겠다.

이를 두고 한양명 안동대 민속학과 교수는 이미 놀이화된 관등의 자기 운동성 즉 더 재미있고 흥미로운 쪽으로 나아가려는 놀이의 관성 속에서 이해해야”(‘낙화놀이의 전승양상과 함안낙화놀이의 위상’) 한다고 설명한다.

한복을 입고 배로 다니며 낙화봉에 불을 붙이고 있다.

 

붉기는 꽃 같고 밝기는 별 같다네

오횡묵은 사월초파일에 한시도 지었다. 1890년 작품을 통하면 읍성 거리의 모습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전체에서 여섯 구절을 가져왔다.

 

‘불등(佛燈)은 점점이 스스로 높고 낮은데(佛燈點點自高低)’

‘불이 나무처럼 가로세로 연이은 집에 서 있고(火樹縱橫連屋立)’

‘등불이 저자 찬란한 산호 이 날에 열리니(燈市瓓珊此日開)’

‘붉기는 꽃이 피어 봄이 머무는 듯하고(紅疑花發如春住)’

‘밝기는 별 무더기 같아 밤이 오지 않았네(明若星堆不夜回)’

‘바람이 불어 불꽃이 떨어져도(可使以風流火落)’

 

처음 두 구절에서는 거리에 있는 시렁과 등불을 제대로 그려놓았고 세 번째 구절은 불놀이를 하는 지역이 성 안으로만 한정되어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여기 저자()’는 읍성 동문 밖 3·8일에 열렸던 읍장시(방목시)를 가리킨다. 읍성 안팎에서 동시에 불놀이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구절은 어쩌면 상투적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표현이 화려하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은 함안읍성 불놀이의 특징적인 모습을 짚었다고 할 수 있다. 흐르는 불(流花)이 그것으로 불꽃의 구체적인 모습이 여기에 있다.

 

1892년 사월초파일에도 오횡묵은 이렇게 읊었다.

 

‘비단시렁 일천 나무가 봄의 조화를 뺏으니(錦棚千樹奪春工)

모든 나라 다함께 하룻밤 붉음을 보네(萬國同看一夜紅)

거리를 메운 남녀가 어지럽게 서로 섞이니(塡街士女紛相錯)

모두들 태평성가를 부르며 웃음 속에 있구나(盡在昇平歌笑中).’

 

첫 구절에서 비단시렁 일천 나무는 자이선 일대 나뭇가지와 바위절벽에 내걸린 불꽃을 형상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 같으면 아마 밤바다에서 환하게 불을 켠 도심지를 바라보는 그런 정도 느낌이 아닐까 싶다.

셋째 구절은 당시 풍속을 보여준다. 사녀에서 사()는 굳이 선비만이 아니라 남자 일반으로 보면 된다고 한다. 부처님 오신 날에는 이렇게 남녀가 스스럼없이 한 데 어울려 놀았다는 대목이 재미있다.

 

그렇다면 1891년 오횡묵이 함안에서 두 번째 맞은 사월초파일은 어땠을까? 비가 와서 개지 않았다고 <함안총쇄록>에 적혀 있는데, 그래서 등불과 불꽃을 내거는 불놀이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신에 지인들과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다. 전체 8행 가운데 당시 불놀이나 정황을 담은 부분은 3행과 4행이다. 앞부분 두 글자(함휼喊卹)가 해독되지 않았는데, 이를 빼고 보면 이렇다.

 

“저자에 등을 켜라 거리낌 없이 말하고(喊卹敢言燈市壯)

 풍년을 점치며 단비와 농부를 생각하네(占豊惟喜雨田公).”

 

그렇다면 비가 오기는 했지만 장터이니까 등불을 매달라 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장터와 읍성 말고도 불놀이를

1892년 사월초파일 기록에서는 새로운 경관이 자이선에서 창출되었다고 할 수 있음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낙화놀이가 벌어진 지역적 범위는 어떻게 될까? 여태까지 살펴본 바로는 함안읍성과 읍성 동문밖에 있는 저자거리 정도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관심 깊게 보아야 할 대목이 하나 더 있다. 마지막 부분에 한자 원문이 夜深 新校姜政武家 失火 親往救之 蓋引落花所致也라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말로 옮기면 "밤이 깊어 신교 강정무의 집에 실화가 났다. 몸소 가서 껐는데 대개 불꽃의 소치였다가 된다.

여기서 새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신교(新校)가 그리로 다가가는 단서가 된다. 앞서 나온 여러 국역을 찾아보니 다들 신임 장교새 장교쯤으로 되어 있었다. 강정무가 신임 장교라는 말이다.

하지만 강정무는 3년 전 오횡묵이 부임 당일 받아본 거안(擧案)에 이미 이름이 올라 있었다. 거안은 삼반관속들의 관등성명을 적어놓은 책인데 여기에 무임리(無任吏=임무가 주어져 있지 않은 아전들) 41명 가운데 한 명이 강정무였다. 그러니 강정무가 새 장교일 수는 없는 것이다.

정답은 뜻밖에 가까이에 있었다. 원래 뜻은 새로() 지은 향교()인데 여기서는 마을 이름으로 쓰였다. ‘신교촌에 있는 강정무의 집이 된다. 신교 마을에는 옛날 다른 데 있다가 지금 자리로 옮겨온 함안향교가 있다. 옛날 향교는 지금 자리에서 북동쪽으로 200미터쯤 떨어진 데 있었다.

오횡묵이 부임 이튿날 읽은 <군지>를 보면 함안읍성과 그 일대의 행정구역은 대략 동문과 서문을 잇는 도로를 기준 삼아 둘로 나뉘어져 있었다. 남쪽이 상리면(上里面), 북쪽이 산내면(山內面)이었다. 신교 마을은 장명·강지·미산·내파·외파·구교·남외·동외·남내·백암 등 다른 10개 마을과 함께 상리면에 들어 있었다. 읍성에서 보면 남외·구교 마을이 좀더 가깝고 그 다음이 신교다. 호수(戶數)135호였는데 여기서도 사월초파일 불놀이가 연행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교보다 읍성에 더 가까운 남외·구교마을에서도 불놀이가 펼쳐졌을 개연성이 높다. 불꽃놀이가 읍성 내부와 장터뿐만 아니라 좀더 넓은 범위에서 행해졌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낙화놀이를 구경하려고 보인 사람들.

 

새롭게 전승된 함안낙화놀이

이처럼 <함안총쇄록>에 자세한 기록을 남긴 함안읍성 일대의 사월초파일 불놀이는 그 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게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하지만 한동안 세월이 흐른 뒤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함안낙화놀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되살아나 있다.

2013년 발행된 <함안군지> 3권에서 경남무형문화재 제33호 함안낙화놀이를 보면 봉암사에서 1946~75년 사월초파일에 연등을 달면서 불꽃=낙화를 사이사이에 달아 옛날 모습을 재현하였다. 봉암사는 오횡묵이 1892년에 불놀이를 즐겼던 자이선 바로 옆에 있는 절간이다.

또 함안읍성에서 북쪽으로 2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괴항마을에서는 1960년에 마을청년회를 중심으로 무진정에서 옛적 놀이를 되살려냈다. 떨어지고 흘러내리는 불꽃은 마을 주민들이 손수 참나무로 숯을 굽고 무명으로 자루를 지어 만들었다.

이런 낙화봉을 무진정 일대에 매달려면 품도 들고 돈도 필요해서 해마다는 못하고 2~5년에 한 번씩 했다. 같은 이유로 시기도 고정시키기 어려워 논농사 농한기인 7월 칠석이나 백중에 연행한 적도 있다.

1985년에 함안문화원의 관심과 함안군청의 지원을 받기 시작하여 해마다 사월초파일로 정례화되었으며 지금은 함안낙화놀이보존위원회라는 전승 주체까지 조직이 꾸려져 있다.

 

지역 주민 스스로 이룩한 재연과 전승

한양명 교수는 이를 두고 낙화놀이는 전국적으로 전승된 보편적인 놀이였지만 현전하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희소하다. 이런 상황에서 함안낙화놀이는 비록 변용된 것이긴 하지만 주민들에 의해 재맥락화되어 현재적 의미를 발현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단절이 있기는 했지만 기관과 학계의 개입 없이 순전히 지역 주민의 힘으로 재연 전승해(자주성) 낸 것이 가장 중요하고 현재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옛 모습을 변용하면서도(현대성) 옛날 불놀이가 간직하고 있었던 미학과 정서를 이어받았다(고유성)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는 정도로 알아들으면 되겠다.

 

북한 지역까지 포함하여 현재 낙화놀이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곳은 우리나라에 모두 스무 군데(이 가운데 경남만 추리면 창원시 진동면·진해구·사화동과 고성군) 남짓이다. 이 중에 연행이 계속되고 있는 데는 함안낙화놀이를 포함해 다섯(경북 안동 선유줄불놀이, 창원 진동낙화놀이, 경기 여주 본두리 해촌낙화놀이, 전북 무주 안성낙화놀이)인데 무형문화재로 등록된 것은 함안낙화놀이와 안성낙화놀이 등 두 곳이다.

 

※경남도민일보 2019년 8월 21일자에 나가고 2020년 펴낸 <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에 실려 있는 글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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