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전·양반 군정 농단해 떵떵
백성은 주린 배 붙잡고 엉엉
토호 세력 조세 착복하며 활보
오횡묵 군수 '부정부패와 전쟁'
일손 차출해 10년치 장부 조사
조정, 현물서 현금 징수로 바꾸자
임금으로 받을 현물 없어져
죽을 길밖에 없다며 관노들 파업
급료 줘야할 양반들 나몰라라
혁신 강행하며 사태 뒷수습
세금은 나라 살림살이의 기반을 이루는 중요한 재원이다. 지금은 국세청을 따로 두어 조세 업무를 전담하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군수 같은 고을 수령에게 가장 중요했던 업무가 바로 조세 징수였다, 1889년 4월 17일 오횡묵이 부임 인사차 대구 감영을 찾았을 때 경상감사는 거짓으로 꾸민 재결(灾結=재해를 입은 농지 면적)을 실태 조사하고 밀린 조세를 받아내어 장부를 깨끗이 정리(淸帳)하는 두 가지를 토호 제압과 함께 주문했다.
요즈음은 모든 것이 전산화되어 세금에 관한 부정부패가 예전과 같지 않음에도 탈세에 관한 뉴스를 종종 듣고 보게 된다. 그렇다면 사람 손으로 직접 현물을 받고 바치고 관리했던 옛날에는 불법이 얼마나 만연했을까?
한 섬이 12말도 되고 8말도 되는 비결
1889년 5월 6일자 <함안총쇄록>에는 황정의라는 젊은이가 나온다. 오횡묵의 은밀한 부탁을 받고 함안 각지에서 실정을 탐문한 결과를 보고하고 있다. 여기서 아전들의 조세 착복 장면을 몇몇 추려보았다.
“호포(戶布)를 바치는 가구가 원래 4300호 남짓이고 호마다 호포세가 두 냥 아홉 전 여섯 푼씩인데 합치면 1만3000냥 남짓입니다. 서울 여러 관아와 감영·병영·통제영에 바치는데 다른 많은 잡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은 합당한 호포세는 7000~8000냥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군포는 한 필에 6~8냥을 거두는데 담당 아전이 농간을 부려 한 필에 2냥 8전씩은 동네에 이자(연간 이율은 10%)를 놓습니다. 또 한 필에 (원래는 40자인데도) 42~43자씩으로 셈하여 바치도록 합니다.
일곱 면 노초장(蘆草場=갈대밭)에서 세금을 매년 700냥 남짓 거둡니다. 감영에는 100냥을 바치고 나머지 600냥 남짓은 고을 각청(各廳)에 붙여 아전·관노·사령들이 나누어 먹는 자금으로 해 왔습니다.
조운미는 결(結)당 쌀 1석5말5되6홉과 콩 1말 9되입니다. 전세·호포·군포·포량미, 관아 비용, 향소·군교·관속의 급료, 조창에 바치는 물품, 감독아전의 급료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에게 매긴 수량이 항목별로 나간 갖가지보다 수백 석이 많습니다.
조운미를 바칠 때는 한 섬에 12말을 담고 재난구제용으로 나누어줄 때는 한 섬에 8말을 담습니다. 나머지 2말은 아전의 개인 주머니로 다 들어갑니다.
통제영의 환곡에서 본전 곡식을 군에서 보관할 때, 집집마다 넉 되씩 거두어 고지기에게 줍니다. 그러나 곡식을 돌려보낸 뒤에도 예전처럼 거두어 담당 아전들이 차지합니다.
아전·군교·사령·포수 등을 내보내면 토색질하는 술밥과 강제로 빼앗는 족세(足稅=출장비)가 원래 받을 돈보다 두 배나 됩니다. 시장에서 억지흥정을 붙이거나, 곡식을 되며 흩어버리거나, 외상이라며 강제로 빼앗습니다.
함안군 전체 토지 313부(夫) 6결(結) 67부(負) 5속(束) 가운데 119부 2결을 아전들이 토지대장에서 누락시켜 놓고 백성들에게는 조세를 부담하게 하고 있습니다(전체 농지의 40% 가까운 조세를 아전들이 가로챈다는 얘기다).”
이처럼 아전들은 중간 지위를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했다. 밑에서 규정대로 받으면 위에는 적게 바쳤다. 위에 제대로 바칠 양이면 밑에서 더 많이 거두었다. 조세를 내야 하는 토지는 숨기고 감면받는 토지는 늘렸다. 알량한 지위를 내세워 가난하고 무지한 백성들에게 갑질을 했다.
10년 전 장부까지 조사하고
한 해 전 흉년에서 농사짓는 땅이 재결에 포함되면 조세가 면제되었다. 조정에서 이 재결을 지역별로 정해주었는데 언제나 보고한 면적보다 적었다. 아전들은 양반과 짜고 부풀린 거짓 재결은 그대로 두고 백성들의 진짜 재결은 줄여서 맞추었다.
밀린 조세는 아전과 백성들이 떼어먹은 포흠(逋欠)인데 10년 전 20년 전부터 오랫동안 누적된 것으로 묵은 장부가 되어 쌓여 있었다. 일반 백성들은 바칠 재산이 없어서 어쩔 수 없었던 경우가 많았지만 아전과 양반들은 포흠을 재산을 불리는 수단으로 삼기 일쑤였다.
조세를 합당하게 매기고 제대로 거두는 것은 이 같은 아전들의 농간을 뿌리 뽑는 일이기도 했다. 조세 징수를 바르게 하면 나라의 곳간도 채우고 백성들에 대한 아전과 양반들의 토색질도 막을 수 있었다.
오횡묵은 해묵은 조세 문제 해결을 위하여 부임 나흘째부터 거짓 재결과 포흠 관련 장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4월 24일 서원들에게 장부를 갖고 내동헌에 대령하도록 했고 27일에는 조세를 매길 당시에 입회했던 아전 안동색리(眼同色吏)까지 불러 내아에서 작업하도록 시켰다.
장소가 내동헌에서 내아로 바뀌었다. 내동헌은 군수 업무 공간으로 10칸 크기지만 내아는 오횡묵이 식구를 데리고 오지 않아 텅 빈 상태였고 크기도 18칸으로 훨씬 넓었다. 더 많은 장부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문부사실소(文簿査實所)’를 확장 이전한 셈이다.
5월 10일에는 조사할 장부를 10년 전까지로 확정하는 한편 좌수·별감·공형과 면별로 사정을 잘 아는 양반들이 입회하도록 했다. 17일에는 안인·산내·안익·산도 등 네 면의 집강을 교활하고 조세 납부를 중시하지 않고 수령을 두려워할 줄 모른다는 이유로 파면하는 한편 다시 면별로 새 사람을 차출하고 아전이나 백성들 가운데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은 자진해서 내아에 모이도록 했다.
좌수는 양반들의 조직인 향청(鄕廳)의 우두머리이고 별감은 그 아래 지위이다. 공형은 아전들의 조직인 이청(吏廳)에서 핵심 요직인 호장·이방·수형리를 맡은 사람을 일컬으며 집강은 요즘으로 치면 면장에 해당된다.
거짓 재결과 포흠(逋欠) 가운데 어느 것이 조사하기 쉬웠을까? 둘 다 만만찮았지만 거짓 재결이 상대적으로 쉬웠다. 흉년이 들어 재해 농지를 조사했던 때가 한 해 전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포흠은 오래 된 일이어서 기록이 멸실되거나 사람이 죽고 없어진 경우가 많아 한결 조사가 힘들었다. 그래서 포흠은 연말에나 실상이 드러났지만 거짓 재결은 한 달 조금 지나니 거의 파악되었다.
밥줄 끊어진 관노들의 파업
바로 이 즈음에 관노(官奴)들이 들고 일어났다. 6월 10일 오횡묵이 내아 문부사실소에서 나오니 관노가 한 명도 없었다. 관아에서 가마를 매거나 청소를 하거나 건물을 수리하거나 파인 도로를 매우는 등을 하는 사람이 관노였다. 요즘 공무직 노동자 정도에 해당될 듯하다.
원인은 먹고사는 문제였다. 관노들의 생계는 색락(色落)에 달려 있었다. 색락은 조세로 곡식을 거둘 때 나중에 축날까봐 일정 분량을 더 받아두는 곡식이다.
그런데 그해 조세를 전부 현물 대신 돈으로 마련하라고 조정에서 명령이 내려왔다. 불법과 부정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현물 징수를 현금 징수로 바꾼 셈인데 이렇게 되면 곡식이라야 가능한 색락은 아예 근거가 없어진다.
살 방도가 사라졌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색락이 불법 부정이면 다른 대책이 있어야 했다. 대책이 나올 데는 관아와 향회(양반들의 모임) 둘이었다. 모두 찾아가 하소연을 했지만 뾰족한 대책은 없었다. 관아는 ‘향중(鄕中=지역 양반사회)에서 조처할 문제’라 하고, 향청은 ‘전례가 없다’고 했다.
관노들는 ‘밤낮으로 공사에 매달려 오직 색락만을 바랐는데 이런 해를 당하여 돌아갈 곳이 없다. 이제 며칠 못 가 죽을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다 흩어져서 버티는 데까지 버티어 보자’는 심정으로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을 맞은 오횡묵의 대처는
오횡묵은 관노들의 파업이 잘못되었다고 여기지 않았다. “관노의 말대로 당장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면 어떻게 오늘과 같은 거동이 없을 수 있겠는가? … 관노들이 달아난 것은 크게 나무랄 일이 아니다.”
대신 양반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인식을 보여주었다. “이미 관노들이 흩어져 달아났음을 지역 양반들이 알면서도 깨우쳐 주지 않고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고을 풍습을 생각하면 매우 괘씸하다.”
얼핏 보면 이해하기 쉽지 않다. 관아에서 일을 하니 당연히 고을 원님 책임이라 여기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요즘 용어로 고용 형태가 독특했기 때문이다. 근무는 관아에서 하지만 소속은 관아가 아니었다.
공형이 양반들을 찾아가 한 말에서 알 수 있다. “관노는 본래 여러 향중에서 노비를 한 명씩 돌아가면서 교대로 읍에 들어가도록 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런데 폐단이 있다 하여 (노비 대신) 따로 양인(良人)을 정하여 관노라 하였던 것입니다.”
급료를 지불할 책임도 관아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양반들은 관아를 끌어들이려 했다. “당초 조정에서 명령하여 쌀 한 섬당 대신 받는 돈 25냥 말고는 제반 잡비를 일절 거론하지 말라 했으니 오늘날 그들의 색락을 밑에서 마음대로 못합니다. 반드시 관가의 명령으로 ‘너희들과 반드시 상의하여 상부에 보고할 테니 와서 처분을 받으라’고 하여야 합니다.”
오횡묵은 세게 나갔다. “양반들의 대답은 모두 강아지 같다”고 했다. 개소리 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러고는 “본관이 본관 노릇을 하는 것은 관노가 있고 없고에 달려 있지 않다”며 관노와 각색(各色)을 함께 혁파(革罷)했다.
각색은 관아의 여러 부서를 말하고 혁파는 낡은 제도를 없앤다는 뜻이다. 아전을 끌어내려 관노로 쓰는 등 요즘 말로 일시적인 ‘구조 조정’에 들어간 것이다.
파업에 숨은 배후가 있었으니
물론 양반들이 관노들의 파업을 적극 사주하거나 조장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급료를 주는 책임을 지지 않고 소극적으로 방관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 때 양반들의 심리는 어땠을까? 6월 10일 파업이 시작되기 직전 <함안총쇄록>에 당시 사정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많은 폐단의 원인이 아전들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오. 양반들이 좀벌레처럼 재물을 빼앗은 것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소. …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온갖 폐단이 있는 고을을 한 번 새로운 지역으로 바꾸어 봅시다.”
오횡묵은 양반더러 좀벌레라 추궁하면서도 한 마음으로 협력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양반들은 입과 몸이 따로 놀았다. 입으로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라 했지만 몸으로는 “머뭇머뭇(浚巡)”하는 태도를 보였다. 입과 달리 몸은 속마음을 숨기지 못했던 것이다.
원래 자기 재산이 아니었어도 내놓으려면 왠지 억울하고 속상한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러니 양반들은 오횡묵의 올바른 조세 징수를 위한 장부 조사를 어떻게든 늦추고 싶었을 테고 그러던 차에 관노들이 파업 기미를 보이자 마땅히 양반들이 책임져야 할 일인데도 수수방관하였던 것이 아닐까.
파업은 실패로 돌아가고
5월 11일부터 19일까지 오횡묵의 일정을 보면 파업은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11일 새벽부터 들판에 나가 권농을 하더니 거짓 재결 조사를 바짝 조이기 시작해 15일 마무리 지었다.
“닷새 동안 조회를 마치고 들어가 해가 지고 나오는 등 몸소 점검했더니 이제 일이 마쳐졌다.” 전체 541결89부 가운데 30%정도인 153결(結)28부(負)3속(束)이 거짓 재결이었다.
16일에도 초복에 관아 손님과 통인들에게 팥죽을 쑤어 먹였고 17일 공부를 권하는 전령(傳令)을 작성하였다. 18일도 통제영 환곡 겉보리 4섬을 동창(東倉)에 넣었으며 19일은 읍내 들판(邑坪)에서 권농을 하였다.
19일은 파업 열흘째였는데 양반들이 또다른 움직임을 보인 날이기도 하다. 한 번 결정된 사안을 다시 처결하는 복안(腹案)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오횡묵은 이 재검토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축출(逐出)과 복안은 모두 양반들의 언사에서 나온 것이다. 제멋대로 구는 악습이 관장(官長)을 압도하는 데 이르렀으니 사사건건 구구절절 해괴하고 악독하다.” 축출은 쫓아낸다는 말이니 요즘 직장폐쇄에 해당될 것 같다.
빗줄기 맞으며 엿새 동안 석고대죄
조금 있으니 관노들이 내삼문 밖에서 석고대죄(席藁待罪)를 시작하였다. 양반들의 복안 요청과 관노들의 석고대죄는 서로 연관되어 있을 것 같은데 <함안총쇄록>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어쨌거나 오횡묵은 이에 대해서도 “그날 멀쩡히 물러가서 그동안 아무 소식도 없었다”거나 “갈 때는 무슨 마음이고 온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물며 대죄라니 더욱 부당하다. 이미 혁파했고 아울러 축출을 명령했다”라 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 25일에야 ‘형편을 보아 용서한다고 특별히 허락’하였다. 그것도 고을 백성 7~8명이 찾아와 백방으로 간절히 빌었던 결과이니 오횡묵의 완승이었다. 석고대죄는 한 번 시작하면 윗사람이 처분을 내릴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한 채 며칠이고 엎드려서 기다려야 한다. 관노들은 음력 6월 여름철 무더위를 한데에서 감당한 데 더해 23일만 흐리고 나머지 닷새는 비가 오는 바람에 쏟아지는 빗줄기까지 그대로 맞아야 했다.
관노들은 생계가 막막한 상황에서 깨질 줄 알면서도 파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색락은 관행이었지만 합당하지 못했기에 더 이상은 밥줄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관아에서든 양반이든 책임을 져야 하는데도 둘 다 손 놓고 있었으니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힘 있는 쪽은 책임져야 할 일도 일단 버티고 보는 식이었고 당하는 것은 예나 이제나 일반 백성들의 몫이었다.
그나저나 파업 이후 관노들의 급료는 누가 대었을까? 관아에서 대었다면 오횡묵은 반드시 기록으로 남겼을 텐데 <함안총쇄록>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원래 양반들이 필요해서 생겨난 것이니 십중팔구 양반들이 대는 쪽으로 결말이 났을 것이다.
※경남도민일보 2019년 8월 28일자에 나가고 2020년 펴낸 <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에 실린 글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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