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 오횡묵의

'어쩌다 기숙 생활

 

외근 중 옆 고을서 살인사건

거처 옮기며 수사 임무 모면

주민 정성스런 대접에 감동

춘궁기 민생 파악 계기도

 

옥사를 피하여 입곡마을로

함안에서 오횡묵과 가장 인연이 깊은 동네는 산인면 입곡리 숲안마을이다. 계기는 살인사건이었다. 오횡묵은 여기서 열흘 넘게 묵으며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주민들과 인연도 쌓았다. 골짜기에는 오횡묵의 글씨도 새겨져 있다.

살인사건 같은 중대 범죄를 당시는 옥사(獄事)라 했다. 옥사가 나면 먼저 초검(初檢)을 하고 뒤이어 복검(覆檢)을 했다. 초검 수사는 해당 고을의 수령이 하고 복검은 제3자인 이웃 고을 수령이 초검이 맞는지 검증하는 절차였다.

과학기술이 발전한 지금도 시신을 살피는 일은 고역인데 옛날에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십중팔구 몽둥이에 맞거나 칼에 찔려 죽었으니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했을 것이다. 더욱이 초검 뒤에 하는 복검은 시신이 부패하여 악취가 코를 찌르게 마련이었다. 복검관은 낯선 고을에 갔어도 아무나 만날 수 없는 등 법률상 제약까지 까다로웠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옥사가 터지면 이웃 고을 수령들은 달아나 숨기 바빴다.

 

오횡묵도 바로 옆 의령에서 옥사가 터지자 곧바로 숨었다. 1890418일 해질 무렵 입곡 동구에 이르러서였다. 관아가 10리만 가면 되는데 아전이 보낸 전인(專人)이 와서 아뢰었다. “오늘 저녁에 동래수사 이재호가 군에 들어와 이청(吏廳)에서 묵습니다. 또 의령 옥사로 복검관 일이 있으니 관아로 돌아오지 마십시오.” 동래수사는 경상좌수사로 군수보다 상급이다. 옥사도 옥사지만 상관 접대까지 겹쳐서 번거로우니 바깥에서 며칠 지내시라는 얘기였다.

오횡묵이 이튿날에 머물렀던 청희당.

대접이 좋았어도 마음은 불편하고

오횡묵은 곧바로 남서쪽 관아 가는 길을 버리고 정남쪽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 숲안 마을에 들었다. “진사 조병규(趙昺奎)의 집에 가서 잤다. 그 숙부 구암(懼庵) 조성충(趙性忠)이 여러 자질들과 더불어 와서 보았다. 젊은이들을 보니 모두 훌륭하고 오묘하여 유가에 걸맞은 의표가 있었다. 또 접대하는 범절이 지극하니 내가 태수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대접이 극진해도 편하지는 않았다. “사람을 많이 거느리고 폐를 끼치니 마음이 매우 불안했으나 형세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본래 생소한 곳에 몸을 붙여 자지를 못한다. 까닭 없이 남의 집에 누를 끼치기 싫기 때문이다.”

이튿날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침나절에 찾아온 수형리 구시권의 보고는 이랬다. “여러 고을 수령들이 모두 자리를 피하는 바람에 아직 복검관이 청해 들여지지 못했습니다. 옥사는 의문스러운 곡절이 많고 단서를 조사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삼가 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행차가 바깥에 계시니 자취를 감추고 자리를 피하여 일이 안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돌아오시는 것이 낫겠습니다.”

모희재. 오횡묵은 마을 한가운데 있는 청희당에 머물다가 눈에 띌까봐 더 깊숙한 여기로 옮겨갔다. 재실 기능을 잃으면서 현판은 청희당으로 모셔 갔다. 

청희당에 머물다 옮겨간 모희재

이튿날에는 조성충의 집으로 옮겼다. “청희당(淸羲堂) 편액이 달려 있고 소기(小記)도 있었다.” “집이 무릇 서까래가 여럿 되고 소박하면서도 누추하지 않으니 놀 수 있고, 쉴 수 있고, 읊을 수 있고, 바람 쐴 수 있어 공(영휘)에게 아주 마땅하다.” 청희당은 집주인의 선조 영휘(永輝)의 당호였다.

청희당도 안전한 거처는 아니었다. 조성충이 마을 한가운데 있어서 눈에 띄기 쉽다며 더 깊숙한 재실로 옮기자고 권했다. “선대 재실이 맑고 한가로우며 고요하고 한쪽 구석에 있어서 절대 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방구들과 마루는 충분히 앉고 누울 수 있습니다.”

20일 그리로 옮겼다. “모희재(慕羲齋)라 편액되어 있고 칸이 무릇 여섯인데 방과 청이 셋씩이다. 곳간과 살림집이 하나씩 있고 다른 것은 없다. 배산임수 지형에 큰 나무가 두루 둘러 있고 뜰 앞에는 한 그루 오동나무가 있다.”

오횡묵은 여기 기문도 기록으로 남겼다. “청희당 조공 영휘가 여기 살다가 세상을 떠나니 장지를 산기슭에 마련하였다. 현손 성각(性覺)이 작은 집을 아래에 짓고 모희라 편액했다.” 성각은 성충의 친형이고 병규의 부친이다.

청희당의 서까래와 들보들. 아래 가운데에 모희재에서 가져온 현판이 걸려 있다. 
청희당의 정문 소오문(嘯傲門).  소오는 거리낌없이 휘파람 불며 노니는 것을 말한다 .

바위에 새긴 연계두 글자

오횡묵이 거처를 한 번 더 옮기지 않았다면 여기 바위에 글자를 새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흐르는 물을 끼고 한 마장을 오르니 좀더 나가니 연계(硯溪)라는 데가 있는데 바닥이 비탈지고 물소리가 졸졸거렸다. 주인이 내게 연계두 글자를 새길 수 있도록 써 달라고 하였다.”

한강 선생이 일찍이 이 군에 군수를 하면서 경내에 각자를 많이 남기셨는데 지금 이 또한 같은 뜻입니다.” “감히 그에 견주어 말할 것은 아니지만 팔힘을 시험하여 명승지에 자취를 올리도록 해보겠습니다.” 떠난 뒤에 기억하는 단초로 삼으려고 자연에 글자를 남기는 일이 옛날에는 흔했던 모양이다.

바위에 글자가 새겨진 것을 보러 나선 때는 72일이다. “앞서 연계(硯溪)’ 두 글자를 써서 조성충의 집에 보냈더니 상류 시냇가의 바위면에 이제 다 새겼다면서 한 번 와서 보기를 청하여 걸음하게 되었다. 새로 새긴 데에 붉은 물감을 메워서 완연(宛然)한 것이 사랑스러웠다. 곁에는 여음동천(廬陰洞天)’ 넉 자를 새겼는데 조 씨가 스스로 쓴 것이다.” 여음동천은 광려산() 북쪽() 골짜기(洞天)라는 뜻이다.

위쪽 바위에 새겨져 있는 '연계'와 '여음동천' 각자를 조병옥 이장(왼쪽) 쳐다보고 있다.
연계.

세상 넘기 어려웠던 보릿고개

오횡묵은 숲안마을에서 많은 일을 겪었다. 관아에 있었으면 듣고 보고 느낄 수 없었던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 첫머리에 오횡묵이 직접 목격한 농가의 모습과 민간의 질고(疾苦)가 있었다.

몇 년 전부터 몸이 관아에 거처하면서 마을과 떨어져 있게 되었다. 매번 춘궁기(窮節)마다 백성들이 먹고살기 어려움을 걱정하지만 그래도 현장에서 목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요즘 백성들 사정이 허둥지둥 급하게 양식 꾸러 다니는 줄을 어찌 알았으리요.”

보릿고개(麥嶺)를 주제로 시를 지어 안타까움을 풀기도 하였다. “이 고개는 다른 고개와 달라서/ 오를 때면 낯빛이 바뀌고/ 팔다리가 절로 게을러진다네.//뒤주 속 곡식은 봄이 되기 전에 다했고/ 불 때는 아낙에게 말을 걸었더니/ 고개 넘기가 한 마디도 어렵다네.”

 

일반 백성과 아름다운 인연도

장삼이사 평범한 백성과 진심을 주고받는 아름다운 사연도 꽃피웠다. “재실 앞 살림집 주인은 주인옹의 종숙(從叔) 조순식(趙順植)이다. 영계 한 마리 담배 약간 복분자 한 사발을 어린아이를 시켜 보내며 말하였다. ‘비록 작고 모자라지만 한가한 가운데 드시라고 올립니다.’ 대개 구석진 데 외롭게 살면 가난하고 구차함을 알 수 있는데도 이렇게 인사를 닦는다.”(1890. 4. 21.)

23일에는 조순식이 오횡묵 앞에 나타났다. “쑥대머리에 맨발로 이마에는 갈대삿갓을 쓰고 앞에서 절을 했다. 또 영계 한 마리 담배 한 움큼 복분자 한 사발을 꿇어앉아 올렸다. ‘앞집에 사는 조가입니다. 어제 저물어 돌아오는 중에 행차가 친히 문밖에 이르러 했다고 들었습니다. 깊은 산골 백성이 높은 분이 방문하는 은택을 입었습니다. 감동스럽고 죄송스러워 감히 와서 사례합니다. 가난하여 의관도 없어 본래 모양을 무릅쓰고 그대로 올립니다.’”

오횡묵은 감동하였다고 한 번 더 일러주면서 가져온 음식은 사양하였다. “일전에 세 가지를 보낸 바는 쉽지 않은 일이라 매우 감동하였다. 마주하여 사례하려고 어제 갔으나 농사 때라 일이 많아 만나지 못했다. 어찌 바쁜데도 굳이 겨를을 내어 좋은 음식을 또 바치는가? 고마운 뜻에 모두 물리지는 못하고 복분자는 받지만 닭과 담배는 돌아가 농군들 먹이는 데 베푸시라.”

이밖에도 70명이 한꺼번에 모내기하는 장면도 구경하고 서재 시편 평가를 해주고 선생 대접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 초계 원님이 의령옥사 복검관을 맡으면서 25일 돌아왔다. 이런 인연 때문에 524일 마을을 다시 찾았다. “며칠 잇달아 머문 적이 있기에 몸소 한 번 둘러보지 않을 수 없다. 권농을 할 겸 담배 다섯 움큼 반 바늘 다섯 봉지 돈 한 냥 아홉 전 일 푼을 나누어 주었다.”

 

오탁수로 질병을 다스리고

오횡묵과 숲안마을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89269일 옥사가 진주·의령·고성·칠원 네 곳에서 한꺼번에 터졌다. 오횡묵은 광려산 백련사(白蓮社:지금 광산사)로 숨었다가 14일 거처를 옮겼는데 바로 모희재였다. 이 때 오횡묵은 몸이 습하여 여름을 맞아 여러 고질을 앓고 있었다. 천만 뜻밖에 이튿날 조성충에게서 가까이에 약수가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소 울음이 들릴 만한 곳에 오탁수(烏啄水)가 있습니다. 백련사터 석벽 사이에서 나옵니다. 아이들의 복학(=자라배)과 눈병에 신기한 효험이 있고 일흔 노인이 한 달만에 아이를 생산할 수 있었던 여러 증험이 있습니다.” 오횡묵이 듣고 마시니 과연 체한 기운이 문득 내려가는지라 신기하게 여겼다.” 조성충은 이처럼 까마귀가 돌을 쪼아 뚫어 만든 우물(烏啄石井穿成)’에서 오횡묵을 위하여 떠나는 19일까지 날마다 물을 길어왔다.

 

전 면장 심상련 기념비.

산천은 간 곳 없고 건물은 그대로

숲안마을을 찾았더니 건물은 옛 모습 그대로인 반면 자연 경관은 바뀌어 있었다. 오횡묵이 모희재에서 둘러본 경관은 아래로 무논이 사다리꼴로 층층이 되어 있고 활 한 바탕 거리까지 시냇가가 모두 광활하고 기름졌”(1890. 4. 20.)는데 그 자리에는 저수지가 들어서 있었다.

제방 옆 길가 암반에 내력을 알려주는 빗돌이 하나 서 있다. 전면에 전 면장 심상련 기념비(前面長 沈相鍊 記念碑)’라 가운데 크게 적혔고 좌우로 각각 작은 크기로 열여섯 글자가 적혔다. 골짜기를 못으로 만들고(因谷爲池) 이 동네가 복을 받아(此坊福星) 마을에 인구가 늘어(閭里增戶) 못 위쪽에 비석을 세웠다(碑于池上). 옆면을 보니 소화(昭和) 19(1944) 1월 세웠는데 조열제(趙說濟)가 짓고 이호제(李鎬濟)가 썼다고 되어 있다. 심상련이 면장을 지내며 저수지를 만들었고 면장을 그만둔 뒤 마을 주민들이 빗돌을 세운 것이다.

이래서 처음에는 연계(硯溪)’여음동천(廬陰洞天)’ 글자가 옛날 조성충과 오횡묵이 보았던 다른 멋진 풍경들과 함께 물에 잠기지 않았을까 걱정을 했다. 하지만 숲안마을 이장 조병옥 씨(51)가 그렇지 않다고 일러주었다. “선대가 바위에 각자를 남겼다는 말씀을 듣고 몇 년 전에 찾아놓았다.”

 

각자는 저수지 50미터 정도 아래 널찍한 바위벽에 있었다. 지금은 옛날과 달리 숲이 우거지고 그늘도 들어 어둡고 물기가 많아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왼쪽 가슴께에 세로 50센티미터 정도 연계와 그 오른쪽으로 세로 20센티미터 안팎 여음동천이 새겨져 있었다.

일산정. 진사 조병규가 후일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던 강학 공간이다.

조 이장과 함께 건물도 둘러보았다. 마을 들머리 청희당은 정문이 소오문(嘯傲門)인데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모두 여섯 칸으로 목재가 야무지고 관리도 잘 되고 있었다. 그때 오횡묵이 읽은 소기도 있었는데 청희당기(淸羲堂記)였다. <함안총쇄록>에는 글쓴이가 동곽 이우육(東郭 李宇錥)’인데 청희당기에는 진사 재령(進士 載寧) 이우육인 것이 달랐다.

청희당기.

모희재는 저수지 왼쪽 언덕에 있고 오횡묵이 적은대로 여섯 칸 크기였다(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둘러싼 나무들은 보이지 않고 마당에는 오동나무 대신 오래 된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조 이장은 옛날에는 집안 서재로 썼는데 지금은 마을에서 멀어서 재실 기능을 접었다고 했다. 여기 달려 있던 모희재와 성추헌(省楸軒) 현판은 청희당으로 옮겨졌다.

조병규의 집은 청희당 뒤로 조금 떨어져 있는데 옛날 모습은 잃었다. 일산정(一山亭)은 조병규(1846~1931)가 집 근처에 1924년 지은 강학 공간이다. 최석기 경상대 한문학 교수는 논문 일산 조병규의 학문과 문학에서 함안 대표 학자로 유생들을 규합하여 강학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면서 무너져가는 도를 부지하려고 혼신의 노력을 하였다고 하였다.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으로 마당에 연못과 배롱나무·은행나무가 인상적이었다.

 

오탁수 자리도 확인되고

청희당은 지금 그대로 괜찮아 보였고 일산정은 경관이 가장 좋지만 보살핌이 필요해 보였다. 모희재는 옛 모습을 되살리면 좋겠는데 지금 콘크리트길 말고 왼쪽 개울을 건너 옛길을 찾으면 근처 빗돌까지 구실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연계와 여음동천 각자는 길이 없어 찾아들어가기 어려웠는데 제방 근처에 안내판을 하나 세우고 통로도 하나 내면 좋겠다 싶다.

오횡묵이 마신 오탁수도 위치가 확인되었다. 저수지 못 미쳐 오른쪽으로 불당골 골짜기가 있는데 거기 샘물로 씻으면 피부병이 낫는다는 얘기를 마을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었다. 조 이장은 지금은 찾는 사람이 없지만 18년 전에 가서 물을 길어온 적이 있다고 했다.

 

경남도민일보 2019814일자에 나가고 2020년 펴낸 <조선시대 수령은 어떻게 다스렸을까>에 실린 글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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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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