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대군물을
언제쯤 볼 수 있을까?
한 해 두 차례
대규모 군악의장
그야말로 장관
복장부터 절차까지
전통 양식 꼼꼼하게 기록
관련 무형문화재 전무해
학자들 "재구성·활용을"
기존 행사 연계 제안도
군물(軍物)은 전통시대 군악의장으로 보면 된다. 군물에 대한 기록은 우리나라 어느 지역에서도 여태까지 확인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함안총쇄록>에는 진행 순서와 절차, 복장과 양태는 물론 참여 인원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평상시에 보통 규모로 치러지는 ‘군물’이 한 차례, 특별한 때에 대규모로 펼쳐지는 ‘대군물’이 두 차례였다.
진을 치고 전투까지 연출하는 대군물
1890년 3월 14일자 <함안총쇄록>에는 오횡묵 군수에게 아전들이 대군물에 대하여 “봄·가을 군사 점고 때 거행합니다” 하고 아뢰는 장면이 나온다.
“좌수·별감은 군복(軍服)을 갖추고 칼을 찹니다. 천총(千摠)·파총(把摠)은 갑옷과 투구를 갖춥니다. 중군(中軍) 이하 장교들은 군복을 갖추고 활과 칼을 찹니다. 제리(諸吏) 이하는 전복(戰服)을 입고 창을 듭니다. 나머지 군졸들은 전복을 입고 각각 총·칼·창 등을 듭니다.
천총·파총은 군사를 앞장서 이끌고 나가 지과정 남쪽 마당에서 원진(圓陣)을 둘러칩니다(札住), 중군은 지과정 앞으로 나가 문을 짓습니다(作門). 사또 행차는 북과 나팔, 총수(銃手)·집사·통인·하리(下吏) 수십 명과 큰 깃발이 쌍쌍이 앞에서 인도합니다. 좌수·별감은 말을 타고 배행(陪行)하며 여러 아전과 관노들은 뒤따라 모십니다.
지과정 앞문을 만든 자리에서 방포삼성(放砲三聲)으로 문을 연 뒤 청 위에서 좌기합니다. 군사 점고하는 일로 호령하면 천총·파총·중군·좌수들이 각각 거느린 군사를 이끌고 달려와 모입니다. 서로 맞서 싸우는 모양으로 4~5합 가량 겨룬 뒤 모두 지과정 앞 원진으로 나아가 대(臺) 위의 호령을 기다립니다. 진을 파한 뒤에는 좌수 이하가 군례(軍禮)로 차례로 알현하거나 아침 조회처럼 사사로 알현합니다. 활쏘기 시합 등도 차례대로 거행합니다.”
군장을 갖추고 군악을 울리면서 행진을 벌이는가하면 진을 치고 서로 맞서 겨루기도 하는 봄·가을 정례 행사였다. 열병식에 더하여 간단한 군사훈련까지 진행하는 셈이다.
왕비 탄신 대군물은 흥청망청
대군물은 만백성이 기뻐하는 국경일에도 펼쳐졌다. 1892년 9월 25일은 왕비의 탄신일이었다. 다양한 경축행사가 이수정(二樹亭)에서 사각(巳刻)부터 치러졌는데 그 마지막을 장식한 것이 바로 대군물이었다.
오횡묵은 먼저 “가벼운 죄수는 풀어주고 삼반관속과 고을 유생과 어린아이들과 지치고 고단한 사람들에게 돈을 베풀었다. 활쏘기와 총쏘기를 한 다음 맞힌 사람은 물론 맞히지 못한 사람에게도 상금을 주었다. ‘기쁨을 널리 한다’는 뜻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백성들은 대낮부터 흥겨웠다. “날은 길하고 때는 좋아서 사람마다 취하고 배부름이 땅에 그득그득하다. 기뻐하여 부르고 즐거워 뛰노니 참으로 태평세월이고 환하게 빛나는 세상이다.”
땅거미(薄昏)가 지고 대군물이 시작되었다. 행진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전투하는 모습도 연출되지 않았다. 모두 마시고 취하여 흥청망청 들떠서 날뛰는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한편으로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에게 평소 불만을 터뜨리는 기회로 삼기도 하였다.
“하던 대로 하려면 마땅히 이수정에서부터 말을 달려야 하지만 길이 좁아 멈추고 지과정에서 거행하라 명령했다. 육인교를 타고 길에 오르니 관속들이 등을 하나씩 들고 깃발 달린 장대를 높이 들어 앞을 열고 뒤에 늘어섰다. 휘영청 밝게 빛나니 밤이 아닌데도 달이 떴고 봄이 아닌데도 꽃이 피었다.
모두 진탕 취하여 대오를 잃고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로 뒤섞였다. 집사·병교들에게 묵은 원한이 있는 통인·관노들은 이 때를 틈타 제대로 일을 못했다고 책망하며 기운을 내어 골을 때리고 큰 소리로 위협하였다. 거느리고 이끄는 행렬이 흐트러지고 집사·병교들이 엎어졌다. 감독하고 타일러 차례로 채우고 매워져 행렬이 대오를 이루고 걸음을 재촉하였다. 처음에 비추어 차츰 정리되니 또한 장관이었다.”
천총의 몰골은 염라대왕도 웃을 정도
“지과정에 들어와 말타기로 바꾸었고 때맞추어 횃불이 함께 이르니 등불과 좌우에서 서로 뒤섞였다. 우천총 김희열(金喜烈)이 취하고 혼미하여 말에서 떨어졌는데 크게 다쳤을 것 같았다. 그런데 오히려 다치지 않았다 하고 다시 말을 타고 다니며 ‘늙어도 정정하다’는 소리를 들으려 애쓰니 또한 취기 탓으로 참으로 웃음거리다.
좌천총 강시호(姜時虎)는 다행히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또한 늙었기에 말 타고 가는 것이 위태위태한 모양으로 왼쪽으로 쓰러질 듯 오른쪽으로 기울어질 듯 밧줄 끊어진 외로운 돛단배가 바람 부는 물결 위에 있는 것 같았다. 옆에서 끼고 붙들어 주는 도움을 받았지만 또한 모두 취하여 꿈처럼 혼미한 가운데 있었다.”
오횡묵은 “염라대왕 같은 엄한 성격도 보고 응당 크게 웃을 것이다”고 했다. 더불어 즐거움과 기쁨도 가득한 하루였다. 이렇게 해서 “관아로 돌아오니 이미 해시(亥時)였다.” 꼬박 12시간 넘게 종일 놀았던 것이다.
◇원님 덕에 나팔 불고
대군물은 이처럼 크고 다채로웠지만 그냥 군물은 규모도 작고 내용도 단순하였다. 1889년 4월 21일 오횡묵 함안군수를 맞이하는 부임 행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군물은 무진정이 있는 괴항동에서 시작되어 지과정에 들른 다음 남문과 객사를 거쳐 동헌에서 마무리되었다.
“삼반관속이 일제히 공손하게 예를 갖추어 맞이하였고 군물에 이르기까지 일체를 대령하였다. 집사(執事)라는 사람이 군복을 갖추어 입고 명령을 들었으며 기치와 포군·인리·통인들은 모두 대열을 지어 앞에서 인도하였다.”
“…지과정에 올라 잠깐 쉬는데 술과 안주가 올라왔다. 공복(公服)으로 갈아입은 뒤 나팔을 세 번 부는 군령(軍令)을 행하고 육인교에 올랐다. …소위 전배(前陪)들은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앞에서 인도하였고 소위 집사들은 걸어서 뒤따르며 영솔하였다. 풍악이 앞서 나아가고 검은 일산은 하늘에 펼쳐졌다. …남문 밖에 서서 잠시 멈추니 문 안에서 방포일성(放砲一聲)이 났고 이에 들어갔다. 성 위에는 서서 구경하는 남녀가 빽빽하였다.”
민폐가 염려되어 중지했던 대군물
다시 1890년 3월 14일로 돌아가 보자. 아전들이 그처럼 대군물 절차를 상세히 보고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백성들 사기 진작을 위해서든 관아 분위기 일신을 위해서든 한 번 해보면 어떻겠느냐 권유하는 뜻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보고를 받은 오횡묵은 민폐가 생길까봐 걱정되니 하지 말자는 취지로 에둘러 말했다. 아전들은 관아에서 일하는 사람들로만 하면 되고 또 백성들에게 알릴 필요도 있다면서 한 번 해야 한다고 맞받았다.
오횡묵이 반문했다. “민폐 때문에 조정에서 군사 점고를 정지한 것은 특히 수십 년이 되었다. 농사에 힘써야 할 때 어찌 한 번 움직임을 관람한다고 대단한 일이겠느냐?”
아전들의 대답은 이랬다. “관(官=수령)이 모아 점고하는 것은 읍의 군정(軍政)을 크게 하나 되게 하는 일입니다. 대군물로 좌기해도 관속과 고지기들로만 거행하면 조금도 민폐가 없을 것입니다. 예전부터 간혹 거행한 것은 이런 법례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대군물이 어떤 민폐를 끼쳤고 언제 그만두었는지는 더 이상 설명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전후 맥락과 사정을 충분히 알기는 어렵게 되었다.
우스우면서도 눈물겨운 장면들
결국 오횡묵은 대군물을 행하기로 하였다. “아침조회를 하고 바로 나팔을 세 번 불도록 명령하고 지과정으로 나아갔다.” 실제로 펼쳐진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지금부터 <함안총쇄록> 속으로 함께 들어가보자.
“천총 이주모(李冑模)는 나이가 70살 남짓이고 작년 가을 아전에서 물러나 관례대로 천총에 임명된 사람이다. 쇠약한 몸으로 갑옷과 투구를 쓰고 손에 쇠도리깨(鐵枷)를 들고 말안장에 앉았다. 몸은 약하고 옷은 무거운데 말까지 달리니 견디지를 못했다. 잘못하면 떨어질 것이고 떨어지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거느린 포수들이 불쌍히 여겨 10여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둘러싸고 부축하였다. 달리는 말안장에 기댄 몸은 기울어져 수십 명 포수의 손 위에 의지하게 되었다. 성에 가득한 구경꾼 수천 명이 한꺼번에 크고 작은 고함을 지르며 기이한 모습에 포복절도했다.”
“소위 활·칼 등도 모양이 기괴하고 기괴하다. 촉나라 승상(제갈공명)이 농상에서 보리를 벨 때 장식한 신병(神兵) 일반의 모양 같았다. 나도 종종 크게 웃었고 여러 관속들도 소리 내어 웃었다. 서로 짝이 되어 말하기를 ‘아무개 아무개가 입은 군복과 전복은 모두 이웃과 인척에게 빌렸고 이마저도 못 구한 사람은 여편네 치마폭을 찢어 썼다’고 하였다. 군졸들의 갖추는 것이 이처럼 구차하다고 다들 말했다. 저마다 진(陳)이 아닐 때는 스스로 견딜 만하지만 무리지어 모인 것을 보면 마치 도깨비 아니면 허수아비 같다고 한다.”
그 모습을 지켜본 오횡묵은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저들을 어디에 쓰겠는가? 하지만 그 사정도 딱하다”면서 탄식했다. 일제에 망하기 직전 조선의 실체가 이랬고 조선의 역량이 이런 정도였다.
마지막에는 참여 인원이 몇몇인지를 적어놓았다. “진을 파하고 좌기취(坐起吹)를 한 다음 군례(軍禮) 등은 전례대로 거행하였다. …삼반관속 197명은 1인당 1전5푼씩 따로 나누어 주고 파좌취(罷座吹)를 하였다.” ‘좌기’와 ‘파좌’는 업무의 시작과 마침이고 ‘취’는 나팔을 부는 것이다.
함안대군물의 출현을 기다리며
(대)군물은 1896년 이후 광무개혁으로 서양식 군대 제도를 들여오면서 사라졌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군물 또는 대군물과 관련하여 지정되어 있는 무형문화재는 하나도 없다. 합천군 초계면 대평마을에서 문화재 지정이 되지 않은 상태로 전승되는 대평군물이 유일하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의 군사행동과 관련되어 있고 군물보다는 농악에 가깝다는 특징이 있다.
노성미 경남대 국어교육과 부교수(문화재청 무형문화재 전문위원)는 “대군물의 전체 과정과 실제 연행에 대해 <함안총쇄록>이 알차게 기록하고 있다”며 “이를 바탕으로 기예와 문헌에서 전문가 도움을 받으면 충분히 재현할 수 있고 나아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가능성도 작지 않다”고 밝혔다.
노 교수는 또 “현실적으로도 대군물을 재구성하여 활용할 필요가 있다”며 “이를테면 사월초파일 무진정 낙화놀이에서 대군물을 연행하면 둘 다를 더욱 빛나고 풍요롭게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자치단체와 지역 주민들의 관심과 의지가 뒷받침된다면 <함안총쇄록>에서 글자로만 남아 있는 대군물이 ‘함안대군물’로 되살아날 방도가 있다는 전문가의 진단이다.
※ 경남도민일보 2019년 8월 1일자에 나가고 2020년 펴낸 <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에 실린 글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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