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억새 물결도
역사의 아픈 흔적
재악산과 재약산
<신증동국여지승람> 밀양도호부 항목을 보면 “종이·차(茶)와 피리 만드는 대나무(笛竹)가 영정사(靈井寺)에서 난다”고 적혀 있다. 스님들이 생산해 조정에 공물로 바친 물품인가 보다. 영정사는 지금 표충사가 되어 있고 표충사는 재약산(載藥山)에 들어 있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재약산이 아닌) 재악산(載嶽山)에 영정사가 있다”고 적었다.
이를 근거로 삼아 일제강점기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따라 재악산이 재약산으로 바뀌었다며 원래대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있다. 그래서 지난해 표충사는 산문을 새로 만들면서 현판에 재악산이라 썼다. 하지만 ‘재약산’은 1858년 제작된 표충사 지장보살탱화의 화기(畵記)에 이미 나온다. 일제강점보다 52년이 앞서는 시기다. ‘재약산 표충사에서 불사를 크게 일으켜 지장전에 봉안한다(載藥山表忠祠大作佛事奉安于此地藏殿재약산표충사대작불사봉안우차지장전).’ 여기서 표충사는 사당을 뜻하는 표충사(祠)다. 이 사당은 표충사(寺) 절간 안에 있다.(사당 표충사는 밀양 출신인 사명대사를 크게 모신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키고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백성을 구출해 온 공을 인정해 나라에서 세웠다. 표충사는 원래 밀양 영축산 자락에 있었는데 1839년 영정사 자리로 옮겨와 지금에 이르렀다.)
재악산은 천황산·능동산·가지산·운문산·억산·배내봉·간월산·신불산·영축산·향로산 등 1000m급 산악들을 실었다는 뜻인 듯하고 재약산은 약수와 약초를 머리에 이었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1960년대 만들어진 표충사 안내도를 보면 특이하게도 ‘약물’(=약수) 표시가 북쪽과 동쪽에 하나씩 두 군데 되어 있다. 약수는 표충사 이전 절간 이름인 영정사와도 관련이 되어 있다.
신령스러운 우물과 사자평
표충사 공식 기록을 따르면 처음 시작은 654년으로 신라시대가 된다. 원효스님이 재약산에 터를 잡아 죽림정사(竹林精寺)를 지었다.(지금도 대광전 뒤편에 대숲이 우거져 있는데 아주 명품이다.) 이어 인도 출신 황면(黃面)선사가 여기에 829년 삼층석탑을 세우고 인도에서 가져온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셨다. 이와 함께 우물을 파고 약수를 얻어 사람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당시 임금이 흥덕왕이었는데 셋째아들이 요즘 말로 살갗이 썩어문드러지는 한센병을 앓았다. 옛날에는 문둥병이라 하여 하늘이 내리는 형벌=천형(天刑)으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황면선사한테 보내어 절간에서 나는 물을 마시고 그 물로 씻고 했더니 셋째아들이 깨끗하게 나았다.
임금이 감격하여 “죽림정사에서 나는 산초(山草)와 유수(流水)가 모두 약초와 약수”라 하면서 신령스러운(靈) 우물(井)이 있는 절간(寺) 영정사로 이름을 바꾸게 했다. 이는 대광전 맞은편 우화루(雨花樓)에 있는 편액 ‘古靈井(고영정)’으로 그 흔적을 남겼다. 영정사의 신령스러운 우물은 산꼭대기 사자평과 이어진다. 재약산 정상 수미봉 동남쪽 비탈 해발 700~800m에 자리잡은 억새평원으로 2006년 12월 28일에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이 되었다.
표충사를 끼고 오른쪽으로 해서 자드락길을 오르면 산마루 가까이에서 사자교를 만나게 된다. 조그만 콘크리트 다리인데 사자평으로 이어지는 들머리가 된다. 아래에서 여기까지는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이었지만 이 다리를 건너면서부터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비스듬한 평지가 이어진다. 여기서부터 사자평에 해당되는데 여기에는 물이 솟아나는 자리가 여럿이다. 모두 아홉 군데라고 한다.
한 때 크게 다쳤던 습지
사자평에게는 50년도 더 묵은 상처가 하나 있었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 만든 군사작전도로가 그것이다. 작전도로가 군사용으로 효용을 다한 다음에는 민간 지프들 차지가 되었다. 이른바 ‘오프로드’를 즐기는 민간인들이 지프를 끌고 와서 도로를 누벼댄 것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 그랬다. 때문에 도로는 풀과 나무가 자라지 못했고 지반 또한 흐물흐물해지고 말았다.
풀이나 나무가 자라나 있으면 그 뿌리들이 흙을 붙잡았을 텐데 그러지 못하다 보니 비가 내릴 때마다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엄청나게 비를 뿌린 2002년 태풍 루사와 2003년 태풍 매미에 표시가 나게 파였다. 그러다가 태풍 에위니아가 집중호우를 뿌린 2006년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생채기가 생겼다. 군사작전도로를 따라 위에서 아래로 굵고 길게 두 군데가 파였다. 너비가 15~30m이고 깊이가 5~10m이며 길이는 둘을 합하면 4km는 족히 되었다. 작은 골짜기라 할 만했다. 여기서 바위와 자갈과 모래와 흙이 엄청나게 쏟아져 내려가 쌓이는 바람에 아래 단장천이 사상초유로 범람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산허리가 이렇게 되면 산마루에서 사자평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던 빗물이 파인 골을 따라 곧바로 빠져나가게 된다. 물이 습지로 스며들지 못한 채 그냥 흘러나가면 따로 물이 솟는 자리가 있다 해도 습지는 메말라지게 마련이다. 2006년 12월 28일 사자평이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이런 상처를 다스려야 한다는 소리가 높았던 이유다. 우여곡절 끝에 경남도청과 환경부가 밀양시청과 함께 2008년 복구 작업을 벌이게 됐다. 그런데 이 복구가 ‘사방(砂防)사업 차원에서 접근한’ 엉터리였다. 작전도로가 파여 나가면서 생겨난 골짜기를 그대로 두었다. 다만 골짜기 바닥을 직선으로 곧게 다듬고는 위에 바위를 깔았다. 이러면 더 이상 토사가 쓸려나가지는 않는다. 동시에 둘레 습지로 물이 스며드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스며들 틈도 없이 흘러내려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습지를 복원하는 공사가 아니었다. 그냥 물이 잘 빠져나가도록 배수로를 내는 공사였던 것이다.
보통 이런 잘못을 저지르고 나면 그 잘못을 바로잡는 결정을 하기가 더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런데 환경부가 그렇게 해냈다. 2012년 창원대학교 산학협력단에 연구 용역을 맡겨 앞선 공사가 잘못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자 이듬해인 2013년 곧바로 사자평 생태복원사업에 나서 2015년에 마무리지었다. 초점은 인공으로 배수로를 내는 바람에 가로막힌 물의 흐름을 원래대로 되살려 습지가 물기를 더 많이 머금을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맞추었다. 먼저 배수로를 다시 메워 2002년 이전으로 돌렸다. 다음에는 습지 쪽으로 물길을 내고 물길이 마주치는 데에는 웅덩이를 만들어 물이 땅 속으로 스며들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한 덕분에 지하수 수위도 높아졌고 습지식물도 많아졌다. 낙동강유역환경청에 따르면 연평균 지하수위가 2013년 지표 아래 34.9㎝에서 16년 11.9㎝로 불쑥 높아졌다. 물기를 좋아하는 진퍼리새와 골풀, 꽃창포 같은 풀들이 무리지어 자라는 등 차지하는 면적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버드나무와 진퍼리새
사자평을 대표하는 습지식물로는 물억새가 으뜸으로 꼽힌다. 수미봉이 멀리 보이는 기슭에서부터 건너편에 이르기까지 너르게 무리를 지었다. 한가운데로는 깊은 산중답지 않게 물이 끊어지지 않고 흐른다. 양쪽 비탈에서 물을 받아 모래나 자갈도 함께 굴린다. 이것이 표충사에서는 약물로 솟아나고 그 아래에 모여서는 단장천을 이루어 흐른다.
물론 습지식물은 물억새 말고도 많다. 나무로는 먼저 버드나무가 있다. 바람 따라 파도치는 억새평원을 배경으로 삼아 드문드문 자리잡고 있다. 평원 한가운데서 상하좌우로 흔들리며 곡선미를 뽐낸다. 이런 깊은 산중에서 버드나무를 보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 풀로는 억새 다음으로 진퍼리새가 꼽힌다. 억새밭에도 있고 나무숲 아래에도 있다. 줄기는 집단을 이루면서 우묵하게 자라고 뿌리는 원뿌리와 곁뿌리의 구분이 없이 수염처럼 많이 뻗어나 자란다. 이것들이 흙도 꽉 움켜쥐고 물도 흠뻑 머금는다. 진퍼리새 뿌리가 이런 역할을 멈추면 흙도 물도 비탈 아래로 죄다 쓸려 내려간다. 사자평을 계속해서 습지로 유지시켜주는 1등공신인 셈이다.
진퍼리새가 수북한 이쪽저쪽을 헤쳐 보면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는 위로 기름띠가 누렇게 나타나 있기 십상이다. 식물이 죽어 썩을 때 나오는 기름기다. 습지에서는 식물이 생명을 다하여 죽어도 완전 분해는 되지 않고 부분적으로만 분해된다. 부분 분해되고 남은 것들이 계속 쌓이면 이탄층(泥炭層)이 된다. 이는 스펀지처럼 물을 머금고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억새와 진퍼리새는 이처럼 죽어서도 살아서도 물을 머금는다.
덕분에 2017년 10월 21일 사자평에 올랐을 때 여러 가지 꽃들을 볼 수 있었다. 잔대는 이미 꽃도 지고 잎도 시들어 버린 상태였다. 용담은 어지간해서는 한두 포기도 보기 어려운 풀이지만 여기서는 자주색 꽃을 매단 채 곳곳에 있었다. 붉은 꽃을 방울 모양으로 매단 산부추도 적지 않았다. 더하여 가느다란 꽃대에 하얗게 꽃이 올라앉은 방울새란도 눈에 띄었다. 바닥 가까이 줄기에서 하얀 꽃잎 다섯 장을 펼친 물매화도 있었다.
낙동강유역환경청의 사자평 감시원 이병주씨는 식물뿐 아니라 동물도 크게 늘어났다고 말한다. “삵은 물론이고 담비도 많아졌어요. 아침에 올라와서 감시카메라를 들여다보면 담비가 종종 찍혀 있어요. 또 목에 이빨 자국이 난 채 죽어 있는 노루나 고라니도 자주 보는데요, 담비가 그랬겠지요.” 담비는 우리나라 생태계 먹이사슬에서 호랑이(멸종) 다음 자리에 놓인다. 이병주씨는 삵의 똥도 알려주었는데 다가가 살펴보니 짐승털이 섞여 있었다. 삵은 육식성이다.
손바닥만 한 고사리분교
사자평은 물이 나는 덕분에 깊은 산중이지만 마을을 이룬 적도 있었다. 하지만 보통 생각처럼 다닥다닥 모여 살지는 않았다. 소설가 배성동은 2013년 펴낸 답사기 <영남알프스 오디세이-억새야 길을 묻는다>에서 이렇게 적었다. “사자평마을은 십 리 간에 집들이 뚝뚝 떨어져 있었다. 재약산 아래 양지바른 땅에 두서너 집 있었고, 주개 대가리에 한두 집, 칡밭 인근에 두 집, 또 함석 막사가 있는 사자평 목장에 두 집 정도였다.”
사자교를 지나자마자 나타나는 고사리분교(정식 이름은 산동초등학교 사자평분교)터는 그런 사람살이의 흔적이다. 처음에는 화전민이 쓰던 흙집을 쓰다가 나중에 콘크리트로 교실을 새로 지었다. 지금은 건물은 사라지고 교적비만 남았다. 1997년 세운 빗돌에는 ‘1966년 1월 29일 개교하여 졸업생 36명을 배출하고 1996년 3월 1일 폐교되었음’이라 적혀 있다. 1966년이면 정부가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화전민을 사자평 일대로 끌어 모으던 시점이다. 이 조그만 학교가 그 구심 노릇을 했을 수 있겠다. 지금도 운동장 자리는 맨 땅이 드러나 있지만 교실 자리는 억새가 우거져 있다. 둘 다 손바닥만 하다. 왼쪽으로 단풍나무가 두 그루 둥글게 어우러진 모습이 멋지다. 아래에는 앉아 놀기 좋도록 바윗돌 셋이 나란하다. 아이들은 여기서 야외수업도 심심찮게 했겠지.
억새밭도 사람살이의 자취를 품었다. 탐방로 오른쪽 골짜기 건너편에 억새밭이 층층을 이루고 있다. 농사짓던 사람들이 떠난 뒤 밭자리에 억새가 비집고 들어가 자라는 바람에 그리 되었다. 가서 보면 그 때 사람들이 둘레에 만들었던 언덕과 두둑이 그대로 있다. 탐방로 가까이에 비탈진 억새밭에서도 사람들은 가축을 키우거나 밭농사를 지었다.
1990년대 들어 재약산을 소유하고 있는 표충사가 이들을 사자평에서 나가도록 했다. 사자평 사람들은 농사도 지었지만 자기가 기르던 가축을 장만해 등산객들한테 파는 장사도 했다. ‘살생을 하지 말라’는 예나 이제나 부처님의 으뜸 가르침이다. 적어도 경내에서는 살생이 이뤄지지 않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사람들을 내보냈었다. 이렇게 해서 사람이 사는 민가는 1997년에 없어졌고 고사리분교는 그보다 한 해 전에 문을 닫았다.
일제가 스키장 만들려다 생겨난 억새밭
소설가 배성동이 쓴 <영남알프스 오디세이>는 2013년에 출간된 책이지만 내용은 1990년대 중반 이전, 어쩌면 80년대인 것도 같다. “소장수는 억새 수풀을 헤집었다. …… ‘허리까지 차는 억새밭 걷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비 오는 날이면 더 힘들고, 해 뜨기 전에는 아침 이슬에 옷이 흠뻑 젖어’라며 투덜거렸다. …… 소장수는 ‘사자평은 소 천국이었어. 목장에는 풀어놓은 소가 수백 마리도 더 되었지’라고 말했다.”
책에는 노인도 한 명 나온다. “노인은 자신이 사자평에서 도자기를 굽던 도공의 후예라고 밝혔다. ‘지금도 사자평에는 선조 도공들이 굽던 도요지가 있고, 깨어진 조각도 나와.’” 해방 전에는 도자기마을로 대엿 집밖에 없었지만 한국전쟁 이후 많을 때는 여든 집이 넘었다는 말도 했다. 그러면서 “‘떠나고 싶어도 100만 평 넓은 땅, 검은 노다지를 두고 갈 수가 없었어. 검은 흙은 감자나 당근, 도라지, 더덕, 참나물, 고사리, 칡 농사가 잘 되었지’라며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밝혔다.”
작가는 노인에게서 억새밭이 생겨난 경위도 듣고는 옮겨 적었다. “…… 노인이 주절대는 말들의 아귀를 여차여차 꿰맞춰 보면 이러했다. 본래 사자평은 군데군데 숲이 우거졌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스키장을 만들기 위해 마구잡이로 나무를 베어버리는 바람에 온통 억새밭으로 변하고 말았다. 노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가을 정취를 물씬 일으키는 사자평도 일제식민지의 잔재라는 아픈 역사를 감추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금 사자평 억새는 사람키보다 더 크게 자라 있다. 위를 가리는 나무가 없기 때문이다. 일제 스키장 조성 공사 이전에는 아마 오종종했을 것이다. 나무 아래서는 햇볕을 제대로 못 받는 탓인지 훌쩍 자라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자평은 여러 사연을 품은 채 재약산 산마루에 바짝 붙어 있다. 아름답고 훌륭하고 좋은 사연만으로 이루어지는 역사는 이 세상에 없다. 아름답지 않고 훌륭하지 못하고 가슴 아픈 사연도 뒤섞여 있다. 사람들은 가을이 되면 하얗게 출렁이는 억새 파도를 보기 위해 재약산을 오른다. 그러나 정작 사자평은 사람들이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갖은 사연을 품은 채로 여기 이렇게 있다.
※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에 실린 글입니다. 경남도민일보의 '도서출판 피플파워'에서 2018년 11월 출간했으며 2008년 펴낸 <습지와 인간>의 후속편에 해당됩니다. 2019년 문화관광부·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우수출판콘텐츠 ‘세종도서’에 선정되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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