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스님 화엄벌 전설과
KTX 원효터널의 공존
갈등의 현장에서 시작된
평화의 탑 쌓기
한국 불교의 성지 화엄벌
양산 천성산에는 내원사가 있다. 신라시대 고승 원효(617~686)가 창건했다는데 관련 설화는 이렇다. 673년 담운사(淡雲寺)에 머물고 있을 때 보니 당나라 태화사의 법당이 산사태로 매몰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거기서는 1000명 대중이 모인 가운데 법회가 열리고 있었다. 원효가 널빤지에 ‘해동원효척판구중(海東元曉擲板求衆)’이라 써서 날려 보냈다. 해동의 원효가 널빤지를 던져서 대중을 구한다는 뜻이다. 널빤지는 태화사에 이르러 공중에 떠 있었다. 이 신기한 모습을 보려고 1000명 대중이 법당을 빠져나왔다. 바로 그 때 뒷산이 무너지면서 법당을 덮쳤다. 덕분에 목숨을 구한 대중들이 바다 건너 신라로 와서 원효의 제자가 되었다.
원효는 이들이 머물 수 있도록 일대에 대둔사와 상·중·하내원암 등 90개 사암을 지었다. 아울러 천성산 상봉에서 1000명 대중에게 화엄경을 강론하여 성불하도록 하였다. 이 산의 이름은 거기서 성인 1000명이 나왔다고 하여 천성산이 되었다. 화엄경을 강론했던 자리에는 화엄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90개 사암은 그 후 하내원암만 남고 모두 없어졌다. 1898년 내원사로 이름이 바뀐 하내원암은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탔다가 1955년 재건되었다. 담운사는 원효가 지금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불광산 자락에 지었던 절 이름이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담운사는 척반암(擲盤庵)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척판암(擲板庵)이 되어 있다.
상(盤)이 되었든 널빤지(板)가 되었든 한반도 남쪽에서 집어던져 중국 대륙 한가운데까지 날아갔다면 무조건 기적이다. 가장 오래된 관련 기록은 중국 송나라 스님 찬녕이 988년 지은 <송고승전(宋高僧傳)> 제4권의 ‘당신라국황룡사원효전(唐新羅國黃龍寺元曉傳)’에 나온다. “원효는 처음부터 행적이 다양하였다. …… 때로는 상을 던져 대중을 구하였고(척반이구중或擲盤以求衆) 때로는 물을 내뿜어 불길을 잡았다.” 1695년 하동 쌍계사에서 간행된 <화엄현담 회현기(華嚴懸談 會玄記)> 제20권의 ‘해동원효’에도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두 기록 모두 원효가 이런 행적을 어디서 어떤 사람에게 행했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적혀 있지 않다.
그러다 1634년 우운당 진희대사가 편찬한 <천성산 운흥사 사적>에서 구체적인 내용이 나온다.(운흥사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지금은 정족산이라 일컫는 반계길 207-22 일대에 있었던 절간이다.) 주인공은 여전히 해동 원효이지만 장소와 대상은 다르다. 불광산 척판암이 아닌 경북 경주의 단석산 척반대에서 던졌고 구출한 대중도 태화사가 아닌 중원 대도 법운사(中原 大都 法雲寺)에 있었다. 화엄벌에 관해서는 적혀 있지 않지만 천성산이 천성산이 된 까닭과 천성산에 90개 사암이 있었다는 얘기는 나온다. 그러니까 원효가 아주 빼어난 업적을 남기는 바람에 생겨난 전설이 중국까지 건너가 <송고승전>에 기록으로 남았고 이를 근거로 삼아 새롭게 스토리텔링이 진행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천성산이 원효의 척판구중 설화를 품을 수 있었던 까닭은 첫째 바위가 많은 데 있다. 원효에게 의탁한 1000명 대중은 성불한 뒤에 모두 바위로 남았다. 실제로 천성산2봉(비로봉, 855m)은 혼자 서기도 힘들 정도로 뾰족한 바위이다. 또 천성산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법수계곡은 양쪽 모두 깎아지른 절벽이다. 저마다 멋진 모습을 한껏 뽐내며 서 있는 기암괴석들이고 근육과 골격을 있는대로 드러내 놓은 바위들이다.
물론 이런 바위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았다. 중국에서 온 1000명 대중이 원효와 함께할 너른 터전도 더불어 필요했다. 천성산1봉(원효봉, 922m) 바로 아래가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다. 평지의 개활지처럼 드넓은 평원이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냥 넓다는 느낌만 들지만 능선을 따라 내려가 평원으로 들어서면 양옆으로 억새밭이 끝없이 펼쳐지면서 확장해 나가는 느낌도 든다. 천성산1봉쪽 화엄벌은 흙으로 뒤덮여 부드러운 곡선을 자랑하는 반면 천성산2봉쪽 법수계곡은 흙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암석이 날카롭고 가파르다. 바위와 평원이 공존하는 보기 드문 산이라 하겠다.
한국 불교의 자존심 원효
<사진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1999년 발행, 번역 리상호·사진 강운구)를 보면 원효는 “나면서 특이하게 선생에게 배우지 않았다.”(377쪽) 또 여덟 살 아래인 의상과 함께 “서방으로 가서 불교의 교화를 참관하고자 …… 요동으로 길을 잡아 나가다가 변경의 수비군에게 첩자라 하여 붙잡혀 수십 일 동안 갇혔다가 간신히 풀려 돌아왔다.”(380쪽) 나중에도 의상은 영휘(永徽) 초년(650년)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지만 원효는 떠나지 않았다.(<송고승전>의 ‘당신라국의상전(唐新羅國義湘傳)’에 나온다.) 원효는 이렇듯 스스로 터득한 순종 토종이었다.
원효는 이름 그대로 신라 불교의 첫(元) 새벽(曉)이었다. 원효는 저술을 많이 해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만 해도 <화엄경소>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법화경종요> 등 스무 가지가 된다. 불교 대중화에도 힘써 “오막살이 가난뱅이와 어중이떠중이들까지도 죄다 부처님 이름을 알게 되고 모두 염불 한 마디는 할 줄 알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야말로 컸던 것이다.”(379쪽) 원효(元曉)라는 이름은 스스로 일컬은 것이다. <사진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379쪽에 “자칭 원효라고 부른 것은 부처님의 광명이 처음으로 번쩍인다는 뜻이다. 원효는 역시 우리말이니 당시 사람들은 모두 우리나라 말로 ‘첫새벽(始旦)’이라 불렀던 것이다”라 적혀 있다.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이차돈의 순교(527년)를 거치면서다. 이차돈의 순교는 신라가 자발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였음을 뜻한다. 그렇다 해도 중국을 통하여 신라에 불교가 들어왔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중국 불교가 신라 불교보다 ‘한 끗’ 위였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신라 사람들은 원효의 척판구중 설화로 이것을 뒤집어엎었다. 원효에 이르러 신라 불교가 중국 불교를 구제할 뿐만 아니라 가르치게까지 되었다. 이차돈의 순교 이후 150년만에 신라 불교가 중국 불교의 아류를 벗어나 자생력을 표명한 사례로 볼 수 있겠다.
불교 본연의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 다들 아는대로 사람이 제대로 깨달으면 자기가 뛰어나다고 우쭐거리지 않는다. 뒤집어 말하자면 우쭐거림은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는 방증이 된다. 우쭐거리는 사람은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척판구중 설화는 이런 우쭐거리는 기미가 뚜렷하다. 신라 사람들이 원효를 통해 신라가 중국보다 낫다고 뻐기는 유치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척판구중 설화는 신라 불교가 자생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음을 일러주는 역설(逆說)이기도 하다.
하지만 신라 불교의 완전한 자립이 아주 멀리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삼국유사>에 보면 창원 백월산의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이야기가 나온다. 부득과 박박은 3년 동안 기도하고 염불한 끝에 709년 사월초파일 다음날에 제각각 미륵불과 미타불로 성불하였다. 성불한 둘은 마을사람들에게 설법을 한 다음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뻐기지도 우쭐거리지도 않았다. 원효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 남짓 만에 이루어진 사건이다. 신라 불교의 진정한 자립은 중국 유학 없이 깨달은 토종 스님만으로는 이룰 수 없었다. 중국을 거치지 않고 토종 부처가 생겨날 수 있게 된 다음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화엄벌과 화엄늪의 상생
화엄늪은 화엄벌 한가운데에 있다. 화엄벌은 35만 평가량이고 화엄늪은 3만5000평 남짓이다. 화엄늪이 없었으면 화엄벌도 존재하지 않았다. 거꾸로 화엄벌이 없었어도 화엄늪은 생길 수 없었다. 이탄층(泥炭層)이 있어야 습지가 되기 때문이다. 스펀지처럼 물을 머금는 이탄은 풀과 나무가 죽어서 일부는 썩고 나머지 섬유질은 그대로 남으면서 만들어진다. 억새 등등이 무리지어 자라지 않으면 이탄층은 생겨날 수 없다. 화엄벌과 화엄늪은 이렇게 서로 기대어 있다.
화엄늪은 1998년 발견되었다. 그런데 일대에는 특별하게 물이 솟는 자리가 없다. 그렇다면 여기 습지에 고인 물의 근원은 무엇일까? 한국교원대학교 오경섭 명예교수(지질학)는 두 가지를 꼽는다. 하나는 천성산을 이루는 안산암이다. 이 암석은 매우 단단하지만 차갑고 눅눅한 환경에서는 쉽게 풍화되어 토산을 이룬다. 다른 하나는 천성산에 모이는 아열대 대양기단의 젖어서 축축한 공기이다. 그래서 천성산에는 짙은 안개비가 잦다. 짙은 안개비와 안산암의 풍화=토산 형성이 서로를 받쳐주면서 화엄늪 같은 고산습지가 형성되었다는 얘기이다.
천성산은 골짜기가 법수·대성·안적계곡 등 열두 개를 헤아릴 정도로 많다. 그리고 그 골짜기마다에는 타고 내리는 물줄기가 풍성하다. 천성산 동쪽을 흐르는 부산 수영강과 울산 회야강이 모두 화엄늪 아래에서 시작된다. 회야강의 지천인 주진·혈수·소주·주남·곡천천과 수영강의 지천인 법기·여락천이 모두 천성산에 근원이 있다. 서쪽을 흘러 낙동강으로 드는 양산천에도 천성산은 내송·다방·북부·호계·대석·백록·상리·용연천을 풀어 내린다. 화엄늪을 비롯해 습지가 많기 때문이지 싶다. 무제치1~6늪, 대성1~6늪, 안적1~4늪, 정골1~2늪 그리고 학골늪과 밀밭늪 해서 스물을 웃돈다.
요즘 이런 습지들이 말라간다는 얘기가 나온다. 천성산에는 KTX가 다니는 13.5km짜리 원효터널이 남북으로 뚫려 있다. 원인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 하는 걱정이 있다. 원효터널은 2003년 12월 착공되었다. 앞서 같은 해 10월에는 당시 내원사 산지기이던 지율스님이 착공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내었다. 원고는 도롱뇽이었고 피고는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이었다. 천성산에 도롱뇽이 무수하게 살고 있는데도 관련 환경영향평가는 한 마리도 없다고 부실하게 작성된 데 대한 항의였다. 지율스님은 다섯 차례 200일 넘게 단식을 하면서 소송을 진행했으나 2006년 6월 대법원은 재항고심을 기각했다.
공군부대 떠난 자리 원효늪
천성산1봉 근처에 공군 부대 레이더기지가 있었다. 1961년부터 주둔했는데 2003년 12월 철수했다. 2006년에는 군사보호구역에서도 해제가 되었다. 그 뒤 2012년까지 두 차례 지뢰제거작업이 벌어졌고 남은 지뢰 제거를 위한 추가 작업을 국방부는 계획하고 있다. 2016년 양산에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배치한다는 얘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그 때 후보지가 바로 여기였다. 그런데 여기에 또 습지가 세 군데 있(었)다. 토지 소유자인 내원사는 애기늪·원효늪·사자늪이라고 임시로 이름을 붙여 관리하면서 자연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지율스님은 “옛날에는 산자락을 차지한 군부대가 원망스러웠는데 이제는 오히려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2003년 12월 15일 도롱뇽 소송 현장점검을 위하여 천성산을 올랐을 때 여기 이 공군부대 담자락을 지나면서 입에 올린 말이다. 이 엄청난 역설(逆說)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양산시청에서 2004년 해맞이공원 조성 계획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천성산1봉 둘레에 서면 동해가 한 눈에 들어온다. 2014년에도 한 번 들먹인 적이 있지만 시대의 변화와 뜻있는 이들의 노력으로 이제는 없었던 일이 되었다. 그렇지만 양산시청은 2017년 다시 천성산1봉 아래에 ‘천성산 산림복지단지’를 만들겠다고 들고 나왔다. 지율스님의 역설이 역설로만 들리지 않게 만드는 현실이라 하겠다.
이런 가운데 천성산1봉에서 평화의 탑 쌓기가 진행되고 있다. 2017년 3월 18일 찾았을 때는 자잘한 돌로 만들어진 지름 4m 안팎 동그라미가 하나 있었다. 흰색 광목으로 만든 조그만 플래카드에는 산주(山主) 내원사가 적어놓은 글이 있었다. “천성산 정상(원효봉)에 주둔하던 군부대가 철수한지 15년이 지났지만 복원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부득이 돌경계를 만들었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처음 보았을 때 이게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잘 짐작되지 않았다. 내려와 알아보았더니 평화의 탑을 쌓는 자리였다.
여기에는 내원사와 지율스님은 물론이고 천성산의 친구들이나 도롱뇽의 친구들 등 천성산 일대 습지를 지키는 운동을 벌여온 이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무슨 조직적인 운동은 아니었다. 이렇게 테두리를 만들어놓고 찾아오는 이들로 하여금 하나씩 둘씩 돌을 얹도록 하는 것일 따름이었다. 주체들 또한 마찬가지로 틈나는 대로 한 번씩 찾아와 돌을 올리는 정도에 그친다고 한다. 11월 16일 다시 찾았을 때는 탑이 제법 기반을 갖추고 허리께까지 올라가 있었다. “한반도의 평화, 이곳에서 시작되다.”고 쓰인 나무팻말이 꽂혀 있었고 한가운데 놓인 반질반질한 돌에는 ‘평화의 탑’이라 적혀 있었다.
틀린 것은 아니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속세와 무관하게 여겨지는 깊은 산중이기는 하지만 어찌어찌하다 보니 대립과 갈등의 한복판이 되고 말았다. 공군부대가 여기에 왜 있었을가? 한반도의 분단과 남북 대결 냉전 때문이다. 군사기지가 철수한 뒤로는 가로늦게 사드를 배치하느니 마느니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한반도 남북의 분단과 대립이 동아시아 차원으로 전개되면서 중국과 미국이 맞서는 바람에 생겨난 일이었다.
대립과 갈등은 습지를 둘러싸고도 벌어진다. 2000년대에는 KTX 원효터널 굴착과 이에 맞서는 도롱뇽 소송이 있었고 2010년대에는 천성산 정상 개발과 이에 맞서는 습지 복원과 보전이 현재진행형이다. 그러고 보니 원효 사상의 핵심이 화쟁(和諍)이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화쟁을 요즘 말로 쉽게 말하면 화해+소통이 되는 모양이다. 화해+소통으로 화쟁이 이루어지면 갈등과 대립을 뛰어넘기는 식은 죽 먹기다. 원효 스님의 전설이 어린 이 천성산에서 팻말처럼 한반도 평화가 시작될 수 있을까?
※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에 실린 글입니다. 경남도민일보의 '도서출판 피플파워'에서 2018년 11월 출간했으며 2008년 펴낸 <습지와 인간>의 후속편에 해당됩니다. 2019년 문화관광부·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우수출판콘텐츠 ‘세종도서’에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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