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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창녕 청도천변 비봉리 패총

김훤주 2021. 9. 29.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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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덕분에 세상에 나온

8000년 전 사람살이

 

태풍 매미의 악몽

2003년 추석 연휴는 끔찍했다. 태풍 매미가 한반도에 머무른 시간은 12시간도 되지 않았다. 추석 다음 날인 912일 오후 3시 제주도 근접과 저녁 830분 남해안 상륙을 거쳐 이튿날 새벽 230분 동해상 진출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매미는 강풍과 폭우로 경상도를 서남에서 북동으로 비스듬히 지르면서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바다는 만조가 겹치는 바람에 최고 4m를 넘는 해일이 해안을 덮쳤다. 산골에서는 빗물이 계곡으로 쏟아져 몰리면서 비탈이 사태 졌다. 바닷가 마산에서는 젊은이들이 건물 지하에서 해일을 만났고 화왕산 산기슭 창녕에서는 한 집안이 고스란히 흙더미에 묻혔다.

상류에서 빗물을 받아 안아 부풀어 오른 낙동강은 경남에 이르러 남강·밀양강 같은 지류와 토평천 같은 지천으로 거슬러 올랐다. 낮은 데서 높은 데로 오르는 역류였다. 역류는 상류에서 밀려내려오는 빗물과 맞닥뜨리면서 한 번 더 요동쳤다. 그 탓에 우포늪을 둘러싼 대대제방을 비롯해 창녕·의령·합천 등 곳곳에서 제방이 터졌다. 건물이 잠겼고 인명은 스러졌다. 14개 시·156개 시··구의 1657개 읍··동에 특별재해지역이 선포되었다.

물이 고여 있는 자리가 비봉리패총 발굴 현장이었다. 오른쪽 건물은 양배수장인데 지금은 창녕비봉리패총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다. 문화재청 사진.

 

비봉리 양·배수장 유수지

창녕 부곡면 비봉리 양·배수장도 침수를 피하지 못했다. 비봉리 마을은 동서 방향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뒤편 북쪽에는 월봉산이 자락을 펼치고 마주 보는 남쪽에는 비룡산이 솟아 있다. 동쪽으로 청도천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면서 마을서 나오는 개울물을 받아들인다. 비봉리 양·배수장은 이 개울 수위를 조절한다. 물이 모자라면 청도천에서 양수하고 물이 넘치면 청도천으로 배수한다. 그래야 마을 앞 들판을 온전하게 보살피고 지킬 수 있다.

한국농어촌공사는 20044월 비봉리 양·배수장 확장 공사를 시작했다. 매미보다 더한 폭우도 감당할 수 있도록 펌프 용량을 늘리고 그에 걸맞게 물이 머무를 유수지(遊水池)를 새로 파는 작업이었다. 이렇게 바닥을 덜어내자 묻혀 있던 조개층이 모습을 나타냈다. 옛적 사람들 살았던 자취였던 것이다. 공사는 중단되었고 발굴이 시작되었다. 국립김해박물관이 20041130~이듬해 823, 2010315~109일 두 차례 진행했다.

비봉리 양·배수장 일대는 2007828창녕 비봉리 패총으로 사적 제486호에 지정되었다. 패총은 조개더미다. 조개더미는 지금으로 치면 쓰레기장이다. 먹고 남은 뼈나 껍데기 또는 쓸모가 없어진 생활용품을 여기 내다버렸다. 조개무지는 정착 생활의 증거다. 떠돌아다녔다면 쓰레기가 쌓일 리 없기 때문이다. 비봉리 패총은 다섯 층으로 구분된다. 아래 세 층은 8000년 전~6500년 전, 위 두 층은 각각 6500년 전~5500년 전과 5500년 전~4000년 전으로 짐작된다.

비봉리패총에서 발견된 8000년 전 나무배. 문화재청 사진.

가장 아래 다섯 번째 층에서는 소나무 쪽배가 나왔다. 통나무 속을 파내어 만든 배로 세계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축에 들 만큼 귀한 유물이다. 넷째 층에서는 토기와 자돌구(刺突具:작살·창 끝에 붙여 찌를 수 있도록 짐승뼈로 뾰족하게 만든 도구)가 나오기 시작했으며 셋째 층에서는 그물추가 나오기 시작했다. 둘째 층에서는 돌도끼와 갈돌, (삿대)와 함께 당대인들의 예술 감각을 엿볼 수 있는 멧돼지무늬토기가 나왔다.

비봉리패총에서 발견된 멧돼지무늬토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토기에 새겨진 멧돼지무늬를 바탕으로 새로 구성한 멧돼지 모습.

눈길을 끄는 유물은 가장 위층에 많았다. 우리나라 최초 똥 화석과 망태기가 나왔으며 장신구(裝身具)도 발견되었다. 몸을 치장하는 일은 먹고사는 일의 고달픔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난 다음에나 가능하다. 아울러 아래층에서 자돌구와 그물추가 나온 데 이어 낚싯바늘도 새로 나타났다. 그물보다 낚싯바늘이 더 새로운 어로 수단이었을까? 이처럼 조그만 유적에서 이토록 엄청난 유물이 쏟아지는 것도 드문 일이다.

무엇을 먹었을까? 재첩··꼬막 껍데기가 나왔다, 민물과 짠물이 만나는 기수역(汽水域)에서 잘 자라는 것들이다. 일대가 지금은 내륙 한가운데지만 당시는 바닷가였다. 여기에 더해 상어 척추와 가오리 꼬리뼈, 잉어 이빨도 나왔다. 사슴·멧돼지··늑대·호랑이··물소·고라니·쥐처럼 네발짐승의 뼈도 나왔고 꿩·오리 같은 새도 뼈가 발굴되었다. 사슴이 가장 많았고 멧돼지·개가 다음으로 많았다. 고고학에서는 사슴·멧돼지는 사냥감이고 개는 사육감으로 본다.

식물로는 도토리·가래(호두 비슷한 가래나무 열매솔방울·조가 나왔다. 당시는 솔방울도 특정 부분을 먹었나 보다. 저장 구덩이도 90개가량 되었다.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등고선을 따라 포물선 모양으로 이어져 있었다. 당시 해안선이어서 여기 이들 갯벌 구덩이에 바닷물이 들어왔을 것이다. 옛날 사람들도 도토리에서 떫은맛을 내는 타닌 성분을 없애는 데 짠물이 효과적인 줄 알고 있었다. 조는 불에 그을린 채 발견되었다. 농경의 산물인지 아니면 채집의 결과인지는 잘 분간되지 않는다고 한다.

 

창녕비봉리패총전시관

창녕비봉리패총전시관

·배수장은 창녕비봉리패총전시관으로 탈바꿈했다. 지하 1층과 지상 1층은 전시 공간으로 새롭게 가꾸었다. 발굴 현장을 재현해 놓는 한편으로 발굴에 썼던 도구와 기록도 갖추었다. 토기는 대부분 진품이지만 재료가 나무·풀이거나 짐승뼈인 것은 복제품이 더 많다. 가래·도토리·솔방울·씨앗 등도 복제품이지만 옛날 느낌이 나게 해서 내놓았다. 진품은 국립김해박물관에 있다. 토기 재료인 흙은 썩지 않지만 나무··뼈는 썩는다. 썩지 않도록 보존 처리하는 시설은 국립김해박물관에 있다.

유물이 나오기 전 유수지였던 데는 흙으로 덮고 잔디를 깐 다음 호랑이·멧돼지·사슴 모형을 세웠다. 건물 겉면은 여기서 출토된 여러 토기 무늬와 멧돼지 모양을 재현해 놓았다. 잔디밭에 내려가면 마주 보이는 벽면에는 신석기인들의 모습, 들판에서 사냥하는 수렵과 바다·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로, 나무와 풀에서 열매나 씨앗을 거두는 채집도 나타내었다.

창녕 비봉리 패총 발굴 현장은 주변과 같은 높이로 매립되어 위에는 이처럼 호랑이 사슴 멧돼지 모형이 세워져 있다.

눈길을 사로잡고 발길을 끌어당기는 현장감은 그다지 크지않다. 그래도 공간을 나름 그럴듯하게 꾸며 역사·문화적으로 중요한 유적이 발견된 자리라는 장소성을 살려놓았다. 전시관에 제자리를 내어준 양·배수장은 맞은편 기슭으로 이사를 마쳤다. 창녕비봉리패총전시관은 201741일 문을 열었다(관람료 없음).

 

습지의 원형과 인간 삶의 바탕

지금 전시관으로 바뀐 양·배수장과 유수지는 원래 논이었다. 대략 1000정도 된다. 엄청난 유물이 발굴된 조개더미는 그러니까 요 조그만 넓이의 논바닥 아래에 있었다. 신석기시대 일대 지형을 떠올려보면 이렇게 생겼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가는 여기 낙동강이 당시는 바다였다. 여기로 청도천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든다. 지금 청도천은 4를 더 가야 낙동강과 만나지만 당시 청도천은 비봉리 유적까지만 민물이었다. 청도천은 비봉리 어귀에서 갑자기 넓어지면서 양쪽으로 편평한 저습지를 이루고 있(). 그런 저습지가 바다와 만나는 경계선에는 모래톱이 길게 쌓였을 것이다. 지금도 두 흐름이 만나는 데서는 그와 같은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긴 모래톱은 안쪽을 물결 잔잔한 호수처럼 만들었다.

전시관 바깥 벽면에 형상화되어 있는 당시 사람들의 물고기 잡는 모습.
전시관 바깥 벽면에 구성되어 있는 당시 사람들의 사냥하는 모습.
전시관 바깥 벽면에 나타나 있는 당시 사람들의 농사짓는 모습.

신석기시대 비봉리 사람들은 이런 환경에서 살았다. 청도천 쪽에서는 잉어를 거두고 민물과 짠물이 뒤섞이는 데서는 재첩과 꼬막을 잡았으며 갯벌에서는 조개를 캤다. 때때로 소나무 쪽배를 타고 노를 저어 바다에 나가 상어나 가오리도 잡았다. 비룡산·월봉산에서는 도토리·솔방울·가래를 따고 사슴·멧돼지를 사냥했으며 골짜기를 타고 내리다 부채처럼 펼쳐지는 선상지 들판에서는 조 같은 곡물 씨앗을 얻었다. 움막은 지금도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따뜻한 남향 산기슭에 장만했을 테고.

옛날 상황에서 보면 비봉리보다 살기 편한 데는 그리 많지 않았다. 바다와 하천은 풍성한 먹을거리도 보장하고 안전한 교통로까지 제공했다. 천천히 흐르는 청도천 강물을 따라서는 남북으로 오갈 수 있었고 바다를 통해서는 동서 방향 왕래를 손쉽게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바다는 내륙 깊숙하게 들어와 있었던 덕분에 거센 파도나 깊은 흐름 같은 위험이 제거된 상태였다. 토기는 물가에 지천으로 널린 흙으로 빚으면 되었고 움막이나 망태기를 만드는 데는 갯벌에 우묵하게 자라는 갈대·물억새 따위 풀들을 갖다 쓰면 그만이었다. 비봉리 유적은 인간의 삶이 습지에서 비롯되었음을 제대로 일러주고 있다.

 

낙동강 둘레가 두루 편한 삶터

비봉리보다 더 편한 삶터는 드물었지만 그에 버금가는 데는 적지 않았다. 비봉리 사람들이 소나무 쪽배를 타고 건너다녔을 바다(지금 낙동강) 맞은편 창원 주남저수지 바로 옆에는 철기 시대 다호리 고분군이 있고 산남저수지 어름에는 합산패총이 있다. 비봉리에서 동남쪽으로 10가량 떨어진 밀양 하남들판 한복판 백산에도 조개더미가 있다. 지금 낙동강이 휘감아 흐르는 밀양·창녕·창원 등지에는 이 밖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조개더미가 수없이 많().

창녕비봉리패총전시관 내부 발굴 당시 패총 지층을 재현해 놓은 자리.

태풍 매미는 분명 끔찍한 비극이었지만 이렇게 작으나마 선물도 하나 남겨주었다. 그림자만 있고 빛이 없는 경우는 언제나 없다. 비봉리 양·배수장이 태풍 매미로 물에 잠기는 바람에 갖은 중요한 유물을 발굴할 수 있었고 이것들은 이후 한반도 내륙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게다가 물에 젖은 습지였기 때문에 열매·씨앗·망태기·나무배·짐승뼈 따위가 수천 년 세월을 건너뛰어 썩지 않고 제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다.

당장 이루어지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품어보는 바람 하나. 전시관 옆 들판 논바닥 아래 지층은 비봉리 유적과 연장선에 있다. 논 전체는 늘려 잡아도 20정도다. 나라에서 이를 통째 사들여 발굴을 한다면 정말 귀중한 유물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지 않을까.

 

김훤주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에 실린 글입니다. 경남도민일보의 '도서출판 피플파워'에서 201811월 출간했으며 2008년 펴낸 <습지와 인간>의 후속편에 해당됩니다. 2019년 문화관광부·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우수출판콘텐츠 세종도서에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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