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년간 작은 씨앗 품은
생명의 어머니
가야 옛터 함안 성산산성
성산산성은 함안군 가야읍 광정리 조남산(해발 136m) 정상에 있다. 1.4km남짓을 돌로 쌓아 둘렀다. 무진정(이수정)에서 오르면 10분 안팎이 걸려 동문 자리에 이를 수 있다. 맞은편 서쪽이 가장 높고 그 다음 높은 북쪽에서 낮아지기 시작하여 가운데에 평지를 이룬 다음 남쪽으로 가면서 높아진다. 높지는 않아도 여기 능선에 서면 사방으로 트인 풍경이 눈에 담긴다. 한복판은 옴폭하게 꺼져 분지를 이루고 동쪽으로 골짜기가 나면서 열려 있다. 성산산성 자리는 지금 보아도 요충이다. 함안 이쪽저쪽 골짜기에서 남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여러 물줄기들과 그것들이 펼쳐놓은 들판까지 한 눈에 장악되는 지점이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1991~2016년 조사했더니 600년대 초반 신라 사람들이 쌓은 석성이었다. 1530년 펴낸 조선시대 지리책 <신증동국여지승람>과 1587년 당시 부사 정구가 지역 역량을 모아 펴낸 읍지인 <함주지>에는 ‘가야국 옛 터(伽倻國 舊墟)’로 나온다. 발굴에서는 신라 유물이 나왔지만 기록은 가야와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함안이 신라 영토가 되기 전에는 아라가야의 터전이었다. 산성은 아라가야가 먼저 쌓았고 신라는 나중에 500년대 중반 일대를 점령한 뒤 고쳐 쌓았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신라 진흥왕이 함안에서 낙동강 동쪽 건너편 창녕을 점령하고 555년 하주(下州)를 설치하더니 561년에는 거기다 척경비를 세웠다. 또 562년에는 후기 가야 맹주 경북 고령의 대가야를 쳐서 마지막 가야 세력을 멸망시켰다. 그러므로 함안에 있던 아라가야 또한 이와 비슷한 시기에 신라의 지배 아래 들어갔을 것이다.)
쓰레기로 버려졌던 목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신라 사람들이 쌓은 석성이라고 못 박은 데에는 근거가 있었다. 산성 안의 습지 둘레에서 나온 유물들이 물증이 되어 주었다. 인공 연못인지 자연 습지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아마 지하수가 솟아나는 자리에 사람들이 연못을 조성했을 것이다. 습지와 동문 쪽 성벽 사이 부엽층에서 먹으로 글을 쓴 나뭇조각(木簡목간)이 308점이 쏟아져 나왔다. 동물 뼈·조개껍질 등 다른 유물과 함께였다.
우리나라에서 목간 308점이라 하면 어마어마한 숫자다. 지금껏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목간은 모두 1239점이라 한다. 말하자면 성산산성 한 군데에서 나온 목간이 전체의 25%에 이르는 것이다. 이렇게 비중이 높다보니 역사·고고학계의 관심 또한 쏠릴 수밖에 없었다. 학계는 이들 목간이 성산산성과 직접 관련이 있는 유물이라고 철석 같이 믿었었다. 신라가 500년대 말~600년대 초 성산산성을 쌓을 때 이에 필요한 인력·식량·물자를 동원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꼬리표=바코드로 간주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2015년 1월 8일 열린 한국목간학회 정기발표회에서였다. 이주헌 가야문화재연구소 당시 소장이 ‘성산산성의 부엽층과 출토 유물의 검토’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목간에 적혀 있는 내용은 성산산성 축조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취지였다. “요즘 우리가 편지를 보관하지 않듯이 옛날 사람들도 목간을 한 번 쓰고 나면 버렸다. 목간이 발견된 더미에는 목기·토기·철기에 더해 동물뼈와 생선가시도 있었지만 갈대·나무껍질·풀·나뭇잎 같은 식물유기물이 대부분이었다. 목간과 다른 쓰레기들이 함께 버려져 있던 더미를 산성에 물이 새지 않도록 하려고 제3의 장소에서 퍼 날랐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옛날 신라 사람들이 습지와 성벽 사이에 풀·나무·잎사귀로 주로 이루어져 있던 쓰레기 더미를 집어넣었다. 습지에서 물이 새어나가도 성벽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흙은 물을 머금으면 흐물흐물해진다. 하지만 풀이나 나뭇잎으로 되어 있는 부엽층은 오히려 솜처럼 뭉쳐져 단단해진다. 이런 이치를 옛날 사람들이 알고 습지의 물기를 차단하기 위하여 풀과 나무와 잎사귀가 뒤섞인 더미를 가져와 집어넣었는데, 거기에 버려진 목간도 섞여 있었던 것이다.
제3의 장소에 버려져 있던 목간이기에 성산산성과 직접 관련짓기는 어려워졌다. 그렇다 해도 당시 지배체제의 실상을 알려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2016년 발굴된 사면목간을 보기로 들 수 있다. 글자가 56개 있는데 네 면 모두에 돌아가면서 적어 넣어 사면목간이라 하는 모양이다. 진내멸(眞乃滅) 마을(村)의 주인(主)이 □성(□城)에 있는(在) 미즉이지 대사(弥卽尒智 大舍)와 하지(下智)에게 올리는 보고서다. 이타리 급벌척(伊他罹 及伐尺)이 법(法)대로 한다며 부역을 30일 하고 돌아갔고, 이를 두고 앞선 법(法)으로 따져보니 60일이 맞는데 자기가 어리석었다면서 두려워하며 아뢰는 내용이다(대사와 급벌척은 벼슬이름). 이를 통해 학계에서는 경주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1500년 전에 이미 문서 행정과 율령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얘기한다. 이 가운데 문서 행정은 목간 그 자체가 일러주는 바이다. 다음으로 율령은 고대 법률을 말하는데 이는 목간에 거듭 나오는 글자인 ‘法’이 잘 일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율령 통치는 요즘 말로 하면 법치주의가 된다. 특정 지배자의 기분이나 주관이 아니라 두루 인정받는 객관 기준인 율령에 바탕을 두고 다스린다는 얘기다. 조남산 꼭대기 함안 성산산성이 습지를 끼고 있었기에 이를 알려주는 신라 목간이 지금껏 썩지 않고 남을 수 있었다.
산꼭대기에서 나온 연씨
연 씨앗도 나왔다. 성산산성 안 습지에서였다. 습지 아래 퇴적지층 4~5m 깊이에 박혀 있던 연씨 10개를 2009년 5월 8일 찾아내었다. 곧바로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이 탄소연대측정을 했더니 650년 전~760년 전 고려시대로 나왔다. 습지에 연꽃이 피었고 꽃이 지면서 연밥이 달렸으며 그 연밥이 가라앉아 700년 세월을 견뎠다. 이로써 성산산성은 두 번 눈길을 끌었다. 한 번은 습지와 성벽 사이에서 나온 목간으로, 다른 한 번은 습지 밑바닥에서 나온 연 씨앗으로. 한 번은 해당 분야 전문가한테, 다른 한 번은 지역과 전국의 일반 대중한테.
보통 사람들의 반응은 이랬다. “우와, 어떻게 조그만 씨앗이 600년 넘게 버티냐!” 물론 다른 나라에서는 2000년 넘었어도 연 씨앗이 싹을 틔운 적이 있다.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고려시대 연실은 물에 불리니까 곧바로 닷새만인 13일 3개가 싹을 틔웠다. 하나는 나중에 포기가 나누어지면서 네 개로 불어났다. 이듬해인 2010년에는 첫 꽃대가 6월 20일 솟고 첫 개화가 7월 7일 벌어졌다.
꽃은 빛이 짙지 않고 옅은 선홍이었다. 숫자가 그다지 많지 않은 꽃잎은 전체에 색깔이 고르게 입혀져 있었다. 개량을 거듭한 요즘 연꽃과는 품격과 자태부터 달랐다. 고려불화 은은한 연꽃을 닮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함안군청은 아라홍련이라 명명했다. ‘아라’는 당연히 아라가야에서 나왔다. 처음엔 어디에서 기르는지 장소조차 공개하지 않았다. 지금은 함안박물관 근처에 시배지를 만들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대신 CCTV가 24시간 돌아가고 사람이 손을 뻗어도 연에 가닿지는 못하도록 되어 있다.
함안천과 무진정
조남산 정상에 서면 북쪽으로 너른 들판이 눈에 든다. 1900년대까지는 대부분이 갈대 무성한 늪지대였다. 왼편으로는 아라가야의 주인공들이 말이산을 베고 누워 고분군을 이루었다. 오른편에서 함안천은 남에서 북으로 굽이치며 남강을 향하여 엎드렸다. 사람들은 조남산과 말이산의 동·남·서쪽 기슭에 모여 살았다. 성산산성은 이 일대를 품고 앉아 장악하고 있다.
옛날 교통편의 중심은 뱃길이었다. 산길은 없었고 있어도 좁았다. 짐이 많거나 무리를 지었을 때는 물길로 움직이는 것이 제격이었다. 성산산성에서는 일대 물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북쪽으로 바라보이는 남강 일대는 물론이고 남강과 이어지는 함안천 일대까지 모든 움직임이 파악된다. 군사 요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요충도 습지를 품고 있지 않았다면 사람이 머무를 수 없었다. 사람이 지키지 않으면 제 노릇을 할 수 없는 것이 산성이다. 그리고 그런 습지에 기대어 목숨을 부지했던 것은 연꽃도 마찬가지였다.
조남산 아래 무진정 일대도 한 번 살펴볼 만하다. 원래는 함안천에 포함되는 자연 습지였다. 함안 조(趙)씨 집안에서 호가 무진(無盡)이고 이름이 삼(參)인 조상을 기리려고 1567년 세운 정자다. 정자 앞 함안천 언저리에다 둑을 둘러서 연못을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 겉으로 보기에는 함안천과 무관하게 독립된 지형이 되어 있다. 어쨌거나 고려시대 연 씨앗은 성산산성 한가운데 산정습지에서는 발아를 멈추었지만 그래도 여기 함안천과 무진정 연못에서는 싹을 틔우지 않았을까.
부자쌍절각(父子雙節閣)과 충노대갑지비(忠奴大甲之碑)도 있다. 연못 가까이에 바짝 붙어 있다. 모두 함안 조씨 관련이다. 부자쌍절각은 효를 다한 아버지(父)와 충을 다한 아들(子)의 목숨 바친 절개를 기리는 빗돌 둘을 모시는 전각이다. 아버지 준남(俊男)은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왜적이 조상 무덤을 파헤치는데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들 계선(繼先)은 그로부터 30년 뒤 정묘호란을 맞아 종군했다가 평안도 의주에서 숨을 거두었다. 충노대갑지비는 쌍절각의 주인 아들을 모시고 전장에 따라갔던 몸종 대갑이 주인공이다. 대갑은 혼자 돌아와 주인의 유품을 바치면서 그 죽음도 함께 고하였다. 대갑은 전장에서 주인을 따라 죽었어야 마땅한 신분이었다. 하지만 대갑은 부음을 전할 연줄이 달리 없어서 죽지 않고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주인을 잃고 혼자 무슨 낯으로 살겠느냐며 강물에 몸을 던져 삶을 마쳤다. 충노대갑지비는 부자쌍절각의 정문인 성인문(成仁門) 오른편에 오종종하게 들어서 있다. 양반이 노비한테 “너희들도 대갑을 본받아 목숨 걸고 주인을 섬겨라”고 다그치던 교육 현장 구실을 대대로 하지 않았을까 싶다. 습지는 이처럼 조선시대의 지배이데올로기까지도 함께 휘감고 흐른다.
※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에 실린 글입니다. 경남도민일보의 '도서출판 피플파워'에서 2018년 11월 출간했으며 2008년 펴낸 <습지와 인간>의 후속편에 해당됩니다. 2019년 문화관광부·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우수출판콘텐츠 '세종도서’에 선정되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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