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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인공 남강댐에 생겨난 자연 습지들

김훤주 2020. 6. 9.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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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발길 끊기니 물총새 둥지로 물풀 고향으로

 

남강댐=진양호의 역사

경남 또는 진주에 살면서도 남강댐=진양호를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은 그냥 있다는 사실만 안다. 어떤 사연을 품었으며 어떤 곡절을 겪었는지는 모른다.

 

남강댐은 박정희 시절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으로 8년 공사 끝에 저수용량 13630t으로 1969년 준공되었다. 계획홍수위를 40.5m에서 46m5.5m 높여 저수용량을 3920t으로 2.3배가량 늘리기 위하여 보강공사를 벌인 때는 1989~2003년이다. 남강댐은 또 진주·사천·고성·통영·거제·하동·남해에 연간 생활·공업용수 22440t과 농업용수 22680t을 공급한다.

 

전기생산량도 한 해에 4130kWh에 이른다. 홍수 조절 기능도 한다. 200년에 한 번 닥치는 홍수를 기준으로 최대 유입량을 초당 1400t으로 잡았다. 4050t(남강 본류 800t 가화천 3250t)은 방류하도록 했고 남는 6350t은 댐에 담아두도록 했다. 69년 준공 당시는 최대 유입량 1570t에 방류량 남강 본류 2000t과 가화천 5460t으로 모두 7460t이었다. 보강공사로 저수용량이 2배 이상 늘면서 방류량은 남강 본류와 가화천 모두 크게 줄였다.

만지교에서 바라본 완사습지.

그런데 알고 봤더니 앞선 역사가 파란만장했다. 시작은 1920~25년 조선총독부가 세운 낙동강 개수(改修)계획이었다. 남강 일대와 낙동강 하류(밀양 삼랑진~부산 하단)의 홍수 방지가 목적이었다. 조선총독부는 낙동강 본류 연안 공사와 부산 운하 건설이 포함된 이 계획에서 남강댐과 방수로 위치를 정하고 1926~34년 댐 공사를 진행했다.

 

방수로 공사는 이태 뒤인 1936년 시작되었으나 1943년 일제가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토석 200를 파낸 상태(공정률 70%)로 중단되었다. 해방 이후 1949년 미국 원조를 받아 다시 착공하지만 이듬해 6.25전쟁이 터지면서 또 중단되었다. 남강댐은 세계사적 사건으로 착공과 중단을 반복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일제의 조선 지배 정책은 남쪽 농업 북쪽 공업(南農北工)이었다. 남쪽 평야지대는 일본 식량 공급기지로 삼았고, 북쪽 산악지대는 풍부한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군수산업을 일으켜 대륙 침략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일제강점기 건설된 댐은 주로 북한에 있다. 압록강 수계에 수풍댐을 짓고 부전강·장전강에 유역변경식 댐을 지은 것이 대표적이다. 수량이 풍부하고 협곡이 발달되어 있어 수력발전이 손쉬웠기 때문이다. 남한에서는 해방되고 나서도 1960년대에야 대형 댐이 제대로 착공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남강댐만은 그보다 40년 전인 일제강점 초기에 계획되고 착공되었다. 왜일까?

사천 곤명면 금성마을 연강정 일대 언덕 풍경.

상습 수해 지역 진주

남강댐물문화관에 가면 일제강점기 신문이 전시되어 있다. 이를 보면 일찍부터 남강댐을 지으려고 한 까닭이 짐작된다. “사천·삼천포 200채 무너져”(1925911일자), “진주 300채 물에 잠겨/ 인명 피해도 적지 않아”(192971일자), “폭우 다시 쏟아져 단성에 통곡소리”·“진주 수곡면 수재로 20채 남짓 휩쓸려”(192974일자), “진주 침수”(193288일자) 등이 잇따른다.

 

1933년에는 72일에 폭우 지나간 남도 수해 속보라고 호외까지 내었을 정도다. “굶주림에 우는 수만 생명/ 가장집물은 흙탕물에 쓸려가고/ 재해에 성홍열·복통 등 전염병 발생”·“남지교도 무너질 듯/ 낙동교 크게 위험”·“남강도 범람해 진주 50채 쓸려가등이 내용이다. 1935911일자는 진주 침수만 300만평/ 경남 지역 자동차 전부 불통이었고 1936815일자는 경남 2000채 남짓 침수/ 굶주림과 추위에 우는 1만 이재민/ 논밭 510만 평 물에 잠겨”·“삼랑진·구포 물바다”·“삼랑진 제방 무너져 1500명 피난”·“구포 제방도 위험이었다.

 

진주 일대에서 예전부터 홍수가 크고 잦았다는 것은 조선 시대 <고종실록>에서도 확인된다. 고종 2(1865) 92일자 기사를 보면 경상감사 이삼현이 ‘721일 비바람으로 진주 등 22개 고을에서 가옥 2044호가 유실되고 207명이 압사했으며 배가 875척이 망가지고 염전도 71곳이 무너졌습니다라고 아뢰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밖에 1865917일자, 186883일자, 1872115일자, 1873년 윤610일자와 116일자, 1878811일자와 919일자, 187939일자와 610일자, 18881228일자, 18911230일자 등 재위 45(1863~1907) 동안 진주 등 고을의 집을 잃고 떠도는 백성과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을 위하여 휼전(恤典=물건 등을 주어 구제함)을 베풀었다는 기사가 최소 열두 차례 나온다.

 

남강에서 흐르는 유수량은 낙동강 전체의 27%에 이른다. 연간 평균 강우량이 전국 1200mm보다 1.3배 많은 1519mm이기 때문이다. 홍수 때는 42%까지 높아지기도 한다. 게다가 북서쪽 백두대간과 남쪽 낙남정맥 때문에 빗물은 다른 데로 빠져나가지 못한 채 내륙으로만 몰린다. 이런 조건에서 진주 시가지 홍수 피해를 없애고 낙동강 본류 하류의 제방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남강댐으로 물을 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와 동시에 별도로 방수로를 내어 물을 빼내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그래서 1936년 홍수를 계기로 진주 상류 4지점에서 가화천을 거쳐 사천만 바다로 이어지는 방수로(너비 40m, 깊이 4m, 길이 11km)를 내는 공사를 서둘렀던 것이다.

까꼬실습지의 고사목이 서 있는 사이로 동물 발자국이 찍혀 있다.

인공댐에 들어선 자연 생태

남강댐은 식수 공급원이 되면서 깨끗한 수질 유지를 위하여 개발행위가 제한되어 왔다. 덕분에 자연환경이 좋아졌다. 멸종위기동물인 수달이 되살아나서 일대가 진양호수달서식지야생동물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되기도 했다.(남강댐에는 이밖에도 진양호 야생동·식물보호구역과 대평야생동·식물보호구역이 더 있다.)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는 노루·고라니·멧돼지·산토끼·삵 같은 짐승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모래언덕에는 물총새가 둥지를 틀었고 딱다구리 나무 쪼는 소리는 심심찮게 들려오게 되었다.

어린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는 사평습지. 소나무는 습지가 육지화되면 가장 먼저 들어온다.

남강댐은 습지도 새로 만들었다. 골풀·세모고랭이 같은 물풀이 물과 뭍의 경계에서 자라고 마름은 물 위에 떠 있으며 말즘은 물속에서 흐늘거린다. 조금 위에는 버들이 부풀어 올라 있고 좀 더 높은 확실한 뭍에서는 조그만 소나무가 군데군데 자란다. 갯버들이나 물버들은 습지의 육지화를 일러주는 지표이며 소나무는 거의 육지가 되었다는 지표다. 예전에는 뭍이었지만 지금은 물에 잠긴 곳에서는 요절한 어린 고사목(枯死木)들이 가느다란 몸통을 드러내고 있다.

 

대평·사평·금성·완사·오미·까꼬실의 습지들

지역에 따라 나누면 대충 이렇다. 모든 이가 두루 일컫는 통칭은 되지 못하고 임시로 붙인 이름인 가칭은 될 수 있겠다. 대평습지는 대평면 소재지에서 지방도 1049호선을 타고 남쪽으로 상촌리에 가면 나타난다. 왼편으로 물속에 수풀이 있고 고사목도 보인다. 똑같이 물에 잠긴 자리이지만 한편에는 무엇이 새로 자라고 한편에는 무엇이 스러지고 있다.

 

상촌리 지난 다음 남행하면서 왼편으로 창고 건물이 있는 사거리에서 왼편으로 들면 사평(沙坪)마을 일대 사평습지가 나타난다. 언덕과 비탈이 사암이어서인지 남강댐으로 향하는 내촌천은 거의가 모래() 들판()이다. 육지화가 빨라 버들도 많지만 소나무도 띄엄띄엄 자란다. 재빠른 침식 때문에 옛적 콘크리트도로가 들려 있는 데도 많다.

모래땅이라 빠르게 침식되고 있는 사평습지. 그 때문에 콘크리트길이 공중으로 들려 있다.

사천시 곤명면 금성마을은 덕천강이 흘러드는 어귀다. 덕천강 쪽으로는 연강정(練江亭)과 어우러지고 남강댐 쪽으로는 버들이 무리를 지었다. 금성교 위에 서면 둘 다 보인다. 이름을 붙이자면 금성습지가 될까.

 

완사습지는 완사천이 남강댐으로 흘러드는 어귀에 있다. 작팔교와 만지교에서 전경이 보인다. 만지교는 완사천 남강댐 합류 직전 지방도 1001호선상에 있다. 작팔교는 상류로 지방도 따라 1km 남짓 더 올라가 오른쪽 작팔길 방향으로 2km 남짓 가면 나온다.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원시림이고 또 원시천이다. 물줄기는 굵고 가는 모래를 깔면서 흐르고 양옆으로 풀과 나무가 자란다.

작팔교에서 바라본 완사습지. 자연 그대로 원시적인 모습으로 모래톱이 형성되어 있다.
남강댐 물이 빠지면 수몰되어 있던 자리가 나타나기도 하는 오미습지 일대. 멀리 대전통영고속도로를 받치는 다릿발이 보인다.

 

오미습지. 안쪽은 남강댐 수몰로 말라 죽은 고사목이 그대로 있고 가장자리는 습지 지표 식물인 버들이 에워싸고 있다.

오미천과 일대 오미습지에도 비슷한 풍경이 있다. 완사습지에서 대각선으로 남강댐 건너편이다. 여기 대전~통영고속도로 다릿발 아래(오미리 1035-1)에는 남강댐 수몰 이전 옛날 다리도 하나 있다.

그윽하고 잔잔한 느낌을 주는 사평습지.

까꼬실(=귀곡동)습지도 있다. 원래는 무척 커다란 마을이었지만 남강댐이 들어서면서 물에 잠기는 바람에 사람들은 모두 바깥으로 나왔다. 이렇듯 사는 사람은 없어졌어도 농사짓는 땅은 일부가 남았다. 사평마을을 지나 남강댐 가장자리 흙길·콘크리트길을 따라 자동차를 타고도 한참 들어간 다음, 옛날 논밭 자리(대평면 내촌리 581-4)에 주차하고 걸어서 황학산을 넘어야 갈 수 있다. 2km가 넘는 산길인데 가파르지 않지만 만만하지는 않다.

수면 위로 군데군데 고사목이 솟아나 있는 까꼬실습지.

산길이 만만찮다 보니 이리로 해서 드나드는 주민은 없다. 까꼬실이 섬은 아니지만 남강댐 때문에 육지 속 섬이 되어 있는 까닭이다. 진양호공원 선착장에서 까꼬실 가는 배가 날마다 뜨는데 주민만 탈 수 있고 외지인은 태워주지 않는다.

 

오전 9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16km 남짓 둘러보았더니 습지가 곳곳에 확인되었다. 학교터도 있었는데 건물은 사라지고 운동장에는 풀이 가득했다. 귀곡국민학교다. 옛날 넉넉한 그늘로 아이들 웃음소리 품었을 플라타너스 세 그루는 말라 죽어 있었다. 전봇대 네 개는 마을이 사라지면서 제 역할을 잃은 채 앞으로 나란히를 하고 있다. ‘충효라 적힌 빗돌은 봐주는 이 없어도 반짝반짝 빛이 났으며 뒤로는 파초가 남아서 훌쩍 웃자라나 있었다.

 

남강댐은 뜻하지 않게 이처럼 둘레 곳곳에 습지를 만들었지만 사람들 관심은 크지 않다. 지금 이대로 두어도 습지야 망가지지도 사라지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좀 더 많이 알려져 많은 이들이 걷고 보고 누리면 그 자체로도 즐거운 일이다. 여기에 더하여 남강댐 같은 인공의 산물조차 사람이 제대로 관리하고 개입할 경우 이렇듯 멋진 습지를 베푼다는 인식까지 다함께 공유한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귀곡국민학교 자리. 오른쪽에 말라 죽은 플라타너스가 있고 왼쪽 멀리 충효라 적힌 까만 빗돌이 있다.

대평리 신석기시대~삼국시대 유적

남강댐은 또 진주 대평리 유적을 선물로 남겼다. 1975~99년의 발굴에서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삼국시대 유적이 확인되었다. 생활도구와 장신구가 출토되었고 집터·마을터·무덤·밭터도 나왔다.(논터는 나오지 않았지만 논농사를 짓지 않은 것은 아니라 한다. 수몰 지역 발굴이라는 한계로 발굴 지역에 논터가 포함되지 않았을 뿐이라 한다.)

 

고고학계에서는 청동기시대 사회사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넉넉하게 얻은 발굴이라 평가한다는데 어쨌든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습지에 기대어 삶을 이을 수밖에 없었음을 한 번 더 입증하는 유적이라 하겠다. 지금 진주시 대평면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에 갈무리되어 있다.

 

김훤주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에 실린 글입니다. 경남도민일보의 '도서출판 피플파워'에서 201811월 출간했으며 2008년 펴낸 <습지와 인간>의 후속편에 해당됩니다. 2019년 문화관광부·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우수출판콘텐츠 세종도서에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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