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전두환 회식과 이명박 회식

김훤주 2008. 7. 22.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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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 회식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 회식은 정말 폭발적이었습니다. 지금 세상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 세상은 진짜 폭압적이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어느 한 분야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상 전체가 폭압적이었고 분위기 자체가 억압적이었습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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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고개 숙인 이는 방우영. 경남도민일보 사진

82년이나 83년 시절에는 대학 교정에서 보통 누군가가 나서서 “학우여!”  소리를 지르고 전단을 뿌리면서 데모가 시작됐는데 이 틈을 전두환 정권은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시위를 한 번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나마 확보하려고 어떤 이는 나무에 올라갔고 어떤 이는 학교 식당에서 식판을 뒤엎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사복 경찰의 눈을 피해 학교 건물 옥상에서 밧줄을 타고 중간쯤에서 시위를 주동하기도 했는데 경찰이 줄을 흔들어 대는 바람에 진짜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3.
서너 해 뒤 제가 들어간 공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00명 남짓했는데 현장을 바라볼 수 있는 2층 관리사무실은 유리로 돼 있었습니다. 상무의 순찰은 시도 때도 없이 이뤄졌습니다.

작업 시간에 잠시 농담을 하려 해도 언제나 용접 불꽃을 튀기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곧바로 왜 작업하지 않느냐는 닦달이 뒤를 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그렇게 불꽃을 내고 있어도 생산과장이 소리도 없이 다가와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머리꼭지가 서늘해졌습니다.

저는 그렇지 않았지만, 저보다 ‘쨤밥’이 많았던 동료들은 ‘노기스’(버니어 켈리퍼스를 뜻하는 일본말)로 머리를 찍혀가면서 선반을 배웠고 볼트로 뒤통수 맞아가면서 제관을 배웠답니다.

공장장-직장-반장으로 이어지는 지휘 명령 체계는 피도 눈물도 통하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오로지 생산만을 위해 존재하는 인간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말해 잔업을 한 주일에 두 번 빼기가 힘들었습니다. 수요일은 잔업이 없는 날이었으니, 그것 말고 한 번 더 빼기가 그렇게도 어려웠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금성사에 납품을 하는 공장이었는데 저더러 불량 수리하러 들어가라 했습니다. 저는 일하던 차림 그대로 화물차에 실려 금성사 2공장에 들어갔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짝의 불량을 바로잡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화물차에 싣고 온 과장이란 인간이 아무 얘기도 없이 그냥 가 버렸습니다. 언제 갔는지도 저는 몰랐습니다.

낮에 실려 온 저는 그 화물차가 다시 실으러 온 이튿날 오후에야 도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낯선 작업장에서 잠도 제대로 못잤습니다. 끼니도, 없는 식권을 어찌어찌 마련해 겨우 국수를 챙겨 먹었습니다. 정말 분했습니다.

4.
제가 다니던 ‘우성공업’은 한 달에 한 번 꼴로 회식을 시켜줬습니다. 지금은 엄청 시들해져 버린 마산수출자유지역 후문 앞 일대 식당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대로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기억나는 상호는 삼각집과 소화집 정도입니다. 회식은 그야말로 장관(壯觀), 아니면 가관(可觀)이었습니다. 지금과는 처음부터 다릅니다.

회식은 주로 반별로 이뤄졌는데, 밥도 들어오기는 했지만 사람들은 주로 술과 안주를 입에 댔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30분이나 1시간쯤 지나면 노래를 부릅니다.

숟가락 젓가락이 휘어지도록 상판을 두드립니다. 그러면서 술을 마시고 악을 쓰듯이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 쪽이 시끄러워집니다. 싸움이 붙었습니다.

싸움의 상대방은 대부분 반장이 아닙니다. 반장도 아니면서 ‘상습적으로’ 회사 편을 들거나 아니면 아니꼽게 구는 인간입니다. 사람들은 뜯어말립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누군가는 악다구니를 해댑니다. 노래소리는 끊어졌다가 다시 울립니다.

1년 남짓한 공장 생활에서, 제가 악다구니를 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회식 자리에서 제가 취하지 않은 적도 없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이 여럿 생겨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병원에 사람이 실려가는 때도 있습니다.

이튿날, 몇몇은 결근을 합니다. 이 가운데에는 “여기 말고 일할 데가 없는 줄 아냐!!”, “야이 개××야.” 또는 ㅈ이나 ㅆ으로 시작하는 소리를 지른 사람이 포함돼 있습니다. 술을 퍼 마시고 떡이 돼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직장과 반장은 아침에 출근 점검을 한 다음 공장을 나갑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오지 못하는 이들 집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부분이 달래어져 점심 먹고 난 즈음에는 공장에 돌아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이들은 용접기를 잡거나 선반을 돌립니다.

5.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당시 억압적인 노무관리와 폭발적인 회식 자리는 맞붙어 있습니다. 나아가, 평소 억압적 노무관리를 가능하게 하는 안전판이 바로 폭발적 회식 자리였습니다.

물론, 지금 회식은 전혀 그렇지 않은 줄 압니다. 폭압이 줄거나 없어진 만큼 폭발 또한 줄거나 사라졌습니다. 제가 있는 경남도민일보 회식 자리도 그렇게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 더 돌이켜보면, 제가 공장에 들어가기 전 대학 회식도 만만찮게 폭발적이었습니다. 선배나 학교 당국이 대상은 아니었지만, 대학 회식도 늘 광란으로 끝나곤 했습니다.

저는 두렵습니다. 폭압하는 세상과 폭발하는 회식이 맞물려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지금 회식이 폭발하지 않는 까닭은 그래도 세상이 예전만큼은 폭압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여러 사람들이 벌인 노력이 이런 세월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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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숙인 고개인지 모르겠습니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6.
그러나, 불행히도, 저는 그렇지 않은 기미를 지금 봅니다. 촛불 국면을 맞아 대통령 이명박은, 자기 본색과 어울리지 않게 두 번 사과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과를 거짓 아니면 사기이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대통령 이명박은 곧바로, 촛불을 든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사과한(또는 사과를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이후로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경찰 또는 검찰을 앞장세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에 옛날로 손쉽게 돌아가리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세상이 사람을 폭압하지는 않을까 겁이 납니다.

이명박이 전두환과 겹쳐 보이면서, 이명박이 전두환보다 더한 물건이 아니냐 생각이 굳어지면서, 저는 회식 자리조차 20년 전으로 돌아가 버리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김훤주

이명박 정부 비판 상세보기
김영규 지음 | 박종철출판사 펴냄
[머리말] 이명박 정부를 고발하고 이 정부의 대안을 찾기 위해, 이명박 정부 비판과 대안이란 이름으로 모두 3권을 발간할 계획이다. 이 가운데 첫 권을 『이명박 정부 비판』이란 이름으로 오늘 그의 취임식에 맞추어 탈고하였다. 제2권은 『이명박 정부 주요 정책 평가』이고, 제3권은 『이명박 정부의 대안』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사회과학의 일반적 수준에서 규명한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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