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주남저수지 다호리에 서린 역사와 생태

김훤주 2016. 1. 26.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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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인공이 절반씩인 주남저수지 


주남저수지는 낙동강 배후습지가 뿌리입니다. 홍수가 지면 강물이 넘쳐흐르면서 옆으로 자연제방과 배후습지를 동시에 만들어냅니다. 100년 전만 해도 주남저수지 일대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데는 낙동강을 따라 길쭉하고 도도록하게 솟은 자연제방 둘레뿐이었고 그것도 밭농사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주남저수지가 생기기 전에는 주남저수지 일대와 지금 벼논을 이룬 대산들판은 대부분 자연습지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벼농사를 짓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해마다 물에 잠겨 실농하고 대파(代播:다른 씨앗을 대신 뿌림)하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 일본 사람이 세운 무라이(村井:むらい)농장이 1910년대 자연제방이 배후습지와 만나지는 경계선을 따라 둑을 쌓았습니다. 무라이제방입니다. 낙동강 본류가 아니라 배후습지로부터 물이 들지 않도록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무라이농장은 그 뒤(1940년대로 짐작)에 산자락으로 바짝 붙여 다시 제방을 쌓았습니다. 



이로써 주남저수지가 생겨나게 됐고 주남저수지와 무라이농장 사이 배후습지는 벼논으로 개간돼 오늘날 풍요롭고 넉넉한 들판을 이루게 됐습니다. 자연습지는 그만큼 사라졌으며 농토는 그만큼 늘어났습니다. 자연습지는 그다지 소중한 존재가 아니었으며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쌀 한 톨이 더 귀한 대접을 받던 시대였습니다. 


주남돌다리와 저수지 수문 


주천강 수문도 이 때 들어섰습니다. 주천강은 주남저수지와 낙동강을 이어주면서 동읍과 대산면을 가르는 경계도 되는 물길입니다. 주천강에는 주남돌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자연석만으로 다릿발을 세웠으며 판석도 모두 널찍한 자연석입니다. 동읍 판신마을과 대산면 고등포마을을 잇는 다리인데 누가 언제 어떻게 왜 이렇게 돌다리를 놓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튼 세월의 더께가 거뭇거뭇하게 묻은 모습은 둘레 우묵한 풀들과 어우러져 상당히 그럴 듯합니다. 




거기서 낙동강 쪽으로 200m 정도 가면 ‘주남교’라는 다리가 하나 나옵니다. 위에 덮어씌운 콘크리트와 철제 난간은 전혀 별스럽지 않지만 그 아래쪽은 건축물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정육면체로 다듬은 돌을 가지런하게 쌓고 콘크리트로 이어 붙였습니다. 다릿발 구실을 하는 부분이 무지개 모양인데 가운데 둘은 낮고 옆쪽에 둘은 높다랗습니다. 




1940년대 주남저수지 제방을 쌓을 때 함께 설치됐던 수문이었습니다. 바닥을 보면 수문이었음을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 다듬은 돌과 콘크리트로 마감을 했습니다. 그 높이가 주천강 평소 수위와 똑같이 맞춰져 있습니다. 주남저수지 쪽 바닥을 보면 가로로 길게 홈이 파여 있습니다. 수문을 가로막는 철판이 완전히 내려가면 그 홈에 꽉 차게 끼일 것입니다. 


적어도 70년은 넘은 건축물인데 아직도 금간 데 하나 없이 튼튼해 보였급니다. 재료인 돌이 풍기는 분위기 때문인 듯도 싶은데, 여기에 아치 곡선과 높고 낮은 수문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이 있어서 근대문화재로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바닥에 파인 홈과 짝을 이뤘던 철판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것은 주남저수지 쪽으로 해방 이후 새로 낸 콘크리트 수문으로 옮겨갔습니다. 주남교 상류 800m쯤에 있는 이 콘크리트 수문은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수문보다 아름답지도 못하고 튼튼하지도 못한 것 같습니다. 



주남저수지는 둘레길이 필요해 


주남저수지는 주남저수지 하나만 이르기도 하지만 다른 두 저수지까지 함께 일컫기도 합니다. 보통 주남저수지라 하면 사람들은 대개 주남저수지 하나만 떠올리지만 주남저수지뿐만 아니라 그 북쪽 산남저수지와 남동쪽 동판저수지까지 모두 아우르는 말인 것입니다. 



주남저수지 셋은 앉은 자리가 탁월합니다. 자연생태가 아니라 농업과 관련해서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람사르문화관과 생태학습관이 있는 주남저수지 동쪽 제방을 사람들은 가장 많이 찾습니다. 여기 올라 저수지를 향해 서면 북쪽에서 남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펼쳐지는 산줄기가 보입니다. 


백월산과 구룡산 줄기들인데, 거기서 흘러내리는 물들은 남김없이 산남 주남 또는 동판저수지로 모여들게 돼 있습니다. 홍수 예방과 가뭄 대비라는 저수지 본래 기능을 톡톡히 하는 셈입니다. 주남저수지는 대산면 동읍 들판뿐만 아니라 창원공단 여러 사업장들에도 물을 대어주고 있습니다. 



세 곳 저수지는 제방으로 나뉘어 있고 물길로 이어져 있습니다. 세 저수지를 다 둘러보려면 24km 남짓을 걸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 둘레길이 나 있지 않습니다. 길이 없지는 않으나 토막토막 끊겨 있습니다. 둘레길을 두고는 찬성과 반대 양쪽에서 말들이 많습니다. 생태환경과 철새 보호를 위해 둘레길을 만들면 안된다는 주장도 있고 관광 활성화를 위해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철새·생태 보호를 위해서도 둘레길을 내는 편이 낫다고 봅니다. 까닭은 이렇습니다. 둘레길은 주남저수지로 사람을 끌어들여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알게 하는 방편이 됩니다. 주남저수지는 창원·김해·부산 같은 도시가 가까이 있기 때문에 개발 압력이 무척 세다고 합니다. 개발 압력을 법률과 행정만으로 감당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창원·김해·부산 등 가까이 있는 여러 도시민들이 주남저수지를 많이 사랑하고 아끼도록 하는 것만이 개발 압력에 맞서는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안이라고 봅니다. 물론 많은 도시민들이 찾음으로써 무슨 이득이 생기면 그 과실은 가장 먼저 일대 지역 주민들한테 돌아가야 맞겠습니다. 


산남저수지 주남저수지 동판저수지 


세 곳 저수지는 저마다 특징이 뚜렷합니다. 가장 작은 산남저수지는 찾는 사람도 가장 적습니다. 세 곳 가운데 유일하게 낚시가 허용되는(2015년 12월 현재) 때문인지 낚시꾼은 자주 눈에 띕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새들에게는 좋은 쉼터가 되고 있습니다. 개구리밥·물옥잠·마름 같은 작은 물풀이 수면을 덮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풍경은 한가로우면서도 아름답습니다. 



주남저수지는 씩씩하고 다채롭습니다. 트여 있는데다 넓기도 해서 시원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물풀은 많지 않지만 연이 한 켠에 무리지어 있고 잎사귀 하나가 최대 2m인 가시연도 봄·여름에 볼 수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좀 허전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동쪽 제방(가장 많이 찾는)에서 보는 풍경에 한정됩니다. 



주천강 시작점에서 아스팔트 도로를 버리고 제방을 따라 들어가면 느낌이 다른 풍경들이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그러다 산남저수지와 만나지는 어름에서 왼편으로 꺾으면 양버들들이 수직으로 높이 솟아 있습니다. 수평으로 펼쳐지는 수면에 긴장감을 더해주는 새로운 풍경인 것입니다. ‘아, 좋구나!’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동판저수지는 숨은 듯이 앉아 있습니다. 왕버들과 버드나무가 둘레와 물 속 곳곳에 자라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아기자기하고 다정다감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툭 트이는 시원스러움도 없지는 않습니다. 동판저수지 남쪽 제방을 걷다가 멀리 백월산으로 눈길을 던지면 수평선이 길게 뻗어나갑니다. 그 위로는 드문드문 물버들이 삐죽 솟아 있고요. 


사람이 별로 찾지 않다 보니 낮에 철새들이 종종 들러서 쉬었다 가곤 합니다. 동판저수지 둑길을 가을·겨울에 거닐 때는 좀더 조심해야 하는 까닭이 되겠습니다. 


철새에 목을 매면 철새도 제대로 못 본다 


주남저수지는 자연습지인 동시에 인공저수지입니다. 철새들의 보금자리인 동시에 농업시설인 셈입니다. 1980년대 이래 철새도래지로 전국에 알려지면서 유명 관광지로도 꼽히게 됐습니다. 창원시는 주남저수지에서 겨울이 되면 철새축제도 열곤 합니다. 


하지만 철새를 보기 위한 주남저수지 나들이는 별로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까닭은 이렇습니다. 철새, 특히 그 화려하고 거대한 ‘군무’에 목을 매면 실망하기 십상입니다. 철새는 사람들을 위해 일부러 연출해주는 존재가 아니거든요. 두세 시간 또는 하루종일 기다려도 보지 못할 때가 적지 않고 또 본다 해도 아주 짧은 순간이랍니다. 몇 시간씩 추위를 견디는 괴로움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럴 바에는 주남저수지와 그 둘레에 고유한 아름다움과 미덕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철새에 목을 매면 이런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측면도 있습니다.) 철새들이 무리지어 날아오르거나 내려앉는 모습은, 볼 수 있으면 좋고 못 봐도 그만인 덤으로 여기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직 철새를 눈에 담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도 합니다. 2015년 2월 일본으로 생태 관련 취재를 갔었는데, 그 때 거기서 고니를 봤습니다. 고니는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겨울철새입니다. 일본 고니는 사람을 보더니 헤엄을 치면서 따라왔습니다. 다가오더니 부리를 내밀어 사람 손을 더듬었습니다. 동판저수지에도 같은 고니가 있는데, 인기척만 느껴져도 멀리 달아납니다. 한국 사람은 고니가 날아오르는 사진을 찍기 위해 돌을 던지고 일본 사람은 녀석들 배고플까봐 먹을거리를 챙겨줍니다. 


합산패총 다호리고분군 신방리 음나무군 


주남저수지 일대는 역사·문화 현장이기도 합니다. 이를 증명하는 유물 가운데 하나가 ‘합산패총’입니다. 산남저수지 동쪽 가운데 물을 향해 튀어나온 부분으로 마을 이름도 합산입니다. 합(蛤)은 조개입니다. 


합산마을 가까운 산남저수지 풍경.


2000년 전 일대 언덕배기에 살던 사람들이 먹고 쓰고 남은 쓰레기를 내다버린 장소입니다. 패총(貝塚), 조개무지는 바닷가에 만들어집니다. 당시는 여기가 바다였다는 얘기입니다. 민물과 짠물이 만나는 경계지점이라 짐작하면 되겠습니다. 


다호리고분군도 있습니다. 주남저수지 들머리 다호마을 뒷동산이 저수지로 흘러내리는 비탈에 있는 대략 2000년 전 가야 무덤들입니다. 1988~1991년 발굴에서 ‘골드바’와 맞먹는 ‘철부(鐵斧, 쇠도끼)’, 해외 교역을 보여주는 중국 화폐 오수전, 통나무 속을 파서 만든 널 등등 드문 유물들이 제법 나왔습니다. 


문화 측면에서 뜻깊고 가치로운 것들도 여럿 있습니다. 붓과 긁개(요즘으로 치면 지우개)와 칠그릇(漆器)이 나왔습니다. 붓·긁개는 다호리 옛 사람들이 문자 생활을 했음을 알려주는 증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됐다고 합니다. 칠그릇은 중국 일본 영향을 받지 않은 고유한 전통 옻칠 문화를 알려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뜻깊은 문화유산이 출토된 습지인데도 현장에는 안내판만 있을 뿐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들을 거리가 제대로 없습니다. 합산패총은 안내판도 눈에 띄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은 어려워도 머지않은 시기에 박물관 또는 전시관이 생겨야 하지 않겠나 생각해 봅니다. 


신방초교 뒷동산에 있는 신방리 음나무군(천연기념물 제164호) 네 그루는 그래서 무척 반갑습니다. 적어도 700년은 살았다니 옛날 모습과 사연을 그대로 품고 있는 몇 되지 않는 존재라서 그렇습니다. 음나무는 삿됨을 막고(防邪) 귀신을 쫓는(逐鬼) 역할을 합니다. 바로 옆에 동판저수지가 있음을 감안해 옛 모습을 재구성해보면, 음나무가 있는 일대가 항구와 마을의 경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여기서 주남저수지 쪽으로 더 가서 나오는 다호마을에는 옛적 항구라 짐작해 봄직한 지명도 남아 있습니다. 동쪽 끄트머리 일대를 ‘짝지’라 하는데 ‘닻’을 이르는 옛말이라 합니다. 배가 항구에 닿으려면 닻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마을 이름 ‘다호’도 어쩌면 ‘(배가) 닿다’ 할 때 그 어간 ‘닿’과 관련돼 있는 듯 싶습니다. 


김훤주 


※ 경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가 창원시 지원을 받아 비매품으로 펴낸 <이야기지도로 찾아가는 창원의 역사와 문화>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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