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동차를 가지지 않은 이유
나는 차가 없다. 운전면허증도 없다. 앞으로도 차를 가질 계획이 없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계기는 진주에서 남성당한약방을 하고 있는 김장하 선생 이야기를 들은 것이었다. 1991년이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노릇을 시작한지 1년이 좀 넘은 시기였다.
그분이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있던 진주 명신고등학교를 무상으로 국가에 헌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수십억 원의 사재를 들여 고등학교를 설립, 명문으로 키운 사람’이고, ‘정부의 전교조 교사 해직 압력에 굴하지 않고 단 한 명의 교사도 자르지 않은 사람’이며. ‘워낙 검소하여 자동차도 없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궁금했다. 한약방으로 그렇게 많은 돈을 벌 수 있을까? 사립학교 이사장이 어떻게 전교조를 인정하고 감싸 안았을까? 돈 많은 사람이 자가용도 없다고?
인터뷰를 해보고 싶었으나 그분은 또 언론 인터뷰에 응하지 않기로도 유명하다고 했다. 학교를 통째로 헌납한 일 자체가 뉴스거리인지라 수많은 언론매체가 인터뷰 요청을 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심지어 자신이 가장 큰 후원자로 있는 <진주신문>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았다.
인터뷰는 이뤄지지 않았으나 ‘자동차가 없는 부자’라는 말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동료기자들이 너도나도 할부로 차를 살 때도 나는 끝내 사지 않았다.
진주시 동성동에 있는 남성당한약방 건물. @김주완
두 번 부탁했다가 두 번 모두 거절당했다
이후에도 나는 김장하 선생한테 두 번의 거절을 당했다. 한 번은 1999년 <경남도민일보>를 시민주주신문으로 창간할 때였다. 그를 찾아갔다. 우리 주주로 모시기 위해서였다. 그때도 이미 그가 민주화운동과 각종 시민운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는 이야길 들은 터여서 당연히 주주가 되어줄 줄 알았다. 그리 길지는 않았던 내 설명을 듣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진주신문만 해도 저에겐 버겁습니다.”
<진주신문>은 1990년 역시 시민주주로 창간된 주간신문이었다. 진주지역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토호‧기득권세력에서 자유로운 독립언론이었다. 나는 짧은 그의 말에서 거절당한 서운함보다 <진주신문>에 대한 진한 애정을 느꼈다. 두 말 않고 이렇게 말하곤 바로 일어섰다.
“예. 알겠습니다. 진주신문 잘 키워주십시오.”
두 번째 거절은 최근이다. 재작년이었다. 내가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을 맡은 후 창간한 자매 월간지 <피플파워>에서 그를 꼭 인터뷰하고 싶었다. 여전히 응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전화를 걸었다. 인터뷰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그가 말했다.
“전 그런 거 안 합니다.”
이처럼 인터뷰에 거푸 실패했지만 시대의 어른을 소개하는 이 코너를 통해 그의 삶이 주는 메시지를 꼭 전하고 싶었다.
김장하 선생은 언론 노출을 꺼리는 바람에 사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 사진은 경상대학교에서 구했다. @경상대학교
최연소 한약종상 면허 합격, 재물을 모으다
김장하(金章河, 1944~). 경남 사천의 지독히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중학교도 간신히 졸업했다. 친구들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 그는 삼천포의 한 한약방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낮에는 약을 썰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그의 나이 열아홉에 한약종상(현 한약업사) 면허시험 공고가 났다. 매년 나는 공고가 아니어서 그는 미성년자임에도 응시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만 20세가 안 됐다는 이유로 면허는 1년 뒤인 1963년에 발급됐다. 사천시 용현면 석거리에 한약방을 열었고, 이내 명의(名醫)라는 소문이 나면서 그에게 약을 지으러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후 진주시 동성동 지금의 자리에 남성당한약방을 옮겼으나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당연히 많은 재물도 쌓였다.
아픈 사람, 사회적 약자를 통해 많은 돈을 벌어들인 그는 생각했다. 이 많은 돈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의 결론은 ‘아픈 사람들에게 번 돈으로 내가 호의호식할 순 없다’였다.
남성당한약방에 걸려 있는 '남성문화재단' 현판. 세월의 두께가 느껴진다. @김주완
문형배(1965~) 판사도 그에게 장학금을 받아 대학을 마친 많은 인재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김장하 선생을 찾아뵙고 다음과 같이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오늘의 제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감사드립니다.”
그랬더니 선생의 말은 이랬다고 한다.
“내가 아니었어도 자네는 오늘의 자네가 되었을 것이다. 만일 내가 자네를 도운 게 있다면 나에게 감사할 필요는 없다. 나는 사회에서 얻은 것을 사회에 돌려주었을 뿐이니 자네는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 감사해야 한다.”
이처럼 김장하 선생은 누구를 ‘도왔다’고 하지 않는다. ‘돌려줬다’고 말한다. 다음은 재물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똥은 쌓아 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되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돈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누어야 사회에 꽃이 핀다.”
국립 경상대학교가 명예박사학위를 주려하자 수차례 고사하다 개교 60주년을 맞은 2008년 대학측과 지역사회 인사들이 다시 설득에 나서자 마지못해 받기로 한 명예박사학위 수여식장에서 그가 했던 말이다.
김장하 선생의 활짝 웃는 모습. @국립 경상대학교
재물에 대한 그의 이런 철학은 나누는 삶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본인이 말을 하지 않으므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나 단체가 그의 지원을 받았는지 숫자나 규모를 가늠할 수는 없다. 다만 어쩔 수 없이 드러난 것만 해도 세간에 기부로 이름난 사업가들과는 뭔가 다름을 알 수 있다.
병든 사람의 돈, 나를 위해 쓸 수는 없다
앞에서 언급했던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해 국가에 헌납했다. 그것도 체육관과 도서관 등 모든 학교시설을 다 지어놓고, 더 이상 확충할 게 없을 때 그랬다. 그 땅과 시설을 시가로 치면 100억 원이 넘는 것이었다고 있다.
그가 왜 학교를 설립했고, 왜 헌납했는지는 1991년 8월 그의 이사장 퇴임사에 나와 있다.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을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내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명신고등학교 전경.
그렇게 설립한 학교를 국가에 헌납한 이유는 이랬다.
“그런 이유에서 설립된 것이 이 학교이면, 본질적으로 이 학교는 제 개인의 것일 수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본교 설립의 모든 재원이 세상의 아픈 이들에게서 나온 이상, 이것은 당연히 공공의 것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이 본인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본교가 공공의 것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공립화요, 그것이 국가 헌납이라는 절차를 밟아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김장하 선생이 사는 집이다. 그는 이 허름한 건물 3층에 산다. @김주완
그는 또 국립 경상대학교 최초의 기부 건축물인 남명학관을 건립하는데 앞장섰고, 최초의 백정해방운동이었던 형평운동기념사업회를 창립해 인권운동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지금은 폐간했지만 진주신문의 최대 후원자였고, (재)남성문화재단을 설립해 장학사업도 벌이고 있다.
지리산생명연대 공동대표와 상임의장도 했고, 수많은 시민운동단체를 후원해왔다.
또 1억 5000만 원의 기금으로 ‘진주가을문예’를 신설, 매년 시와 소설 부분 수상자를 선정해 1500만 원의 고료를 지원하고 있다. 지금까지 20회 수상자를 배출했다.
이밖에도 진주문화연구소를 창립 후원하고 있고, ‘진주문화를 찾아서’라는 문고 발간사업도 계속하고 있다.
김장하 선생이 1억 5000만 원을 출연해 제정한 2006년 가을문예 시상식 @진주신문
그가 가장 멀리하는 것 ‘정치’
그러나 김장하 선생이 유독 멀리하는 게 있다. 바로 정치다. 1995년 진주지역 시민사회에서 민선 진주시장 후보에 김장하 선생을 범민주 단일후보로 추대하자는 결정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렸다. 결국 범민주 후보는 내지 못했다.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후보시절 그를 찾았다. 남성당한약방에서 약 50분 간 그를 만나고 나온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수행한 김성진(전 청와대 행정관)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참 좋은 분을 만났네. 정말 좋은 분이다. 정치인을 만나 훈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 직후 부산 벡스코에서 ‘부산·울산·경남 민(民)에게 듣는다’는 토론회를 개최했다. 당선자측은 이 자리 1번 테이블에 김장하 선생을 초대했다. 그러나 김장하 선생은 아예 그 자리에 참석을 거부했다.
정치와 정치인을 멀리하는 것, 그리고 돈은 세상의 것이라는 철학 등 많은 부분이 앞서 소개한 풍운아 채현국 어른과 닮았다.
72세의 나이에도 얼굴 표정이 참 해맑다. @국립 경상대학교
이제 이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때가 됐다. 지금까지 채현국, 장형숙, 방배추, 양윤모, 김장하 어른까지 소개했지만, ‘그저 이런 분이 있다’는 정도에 그쳤다는 게 아쉬운 점이다.
김장하 선생을 직접 인터뷰하는 것도 실패했지만 포기하진 않을 것이다. 그분에 대해 더 많은 공부를 한 후 다시 찾아뵈려 한다. 그리고 그분의 삶을 제대로 기록하여 그의 삶이 우리 사회에 던져주는 울림을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다.
※포털 다음 뉴스펀딩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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