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풍운아 채현국과 시대의 어른들

4화.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 방배추 어른의 꿈

기록하는 사람 2015. 3. 18.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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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주먹 방배추를 이긴 세 사람


방동규. 1935년생. 한국 나이로 81세. 채현국 어른과 동갑이다. 그러나 동규라는 본명보다 ‘전설의 주먹’ 또는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배추’라는 별명이 더 유명한 어른이다. 아예 성(姓)까지 붙여 ‘방배추’라고도 불린다.


‘주먹’이라는 수식어가 말해주듯 그는 1950년대에 전국에서 알아주는 싸움꾼이었다. 그러나 요즘 말하는 ‘조폭’은 아니었다. 그는 소속이 없었다. 철저히 ‘나홀로 주먹’이었다.


그에게 한 번 겨뤄보자며 찾아오는 건달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여러 명이 떼거리도 달려드는 싸움도 회피하진 않았다. 1952년 을지로 6가에서 깡패 17명과 싸운 일이나 1954년 서울 성동역 근방의 대로변에서 카빈 소총을 들이대는 군인깡패 3명을 제압한 사건은 지금도 회자되는 일이다.


방배추 어른 @김주완


물론 17대 1로 싸운 건 처절하게 졌다. 그가 패배한 몇 번의 싸움 중 하나였다. 한 번은 1954년 당시 스물 세 살이던 백기완(1932년생, 84세, 현 통일문제연구소장)에게 따귀를 얻어맞고도 대응하지 못한 일, 다른 한 번은 1986년 월간 <말> 보도지침 사건으로 쫓기던 김태홍(1942~2011, 전 국회의원)을 도피시킨 혐의로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경관 이근안으로부터 살인적 고문을 당하고도 보복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는 이근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당시를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리지만, 그런 그를 아주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의 그물망에 걸린 사람인 건 그나 나나 마찬가지일 테니.”


백기완은 첫 만남에서 이렇게 물었다. “뭐. 별명이 배추라고? 힘깨나 쓴다고 들었어. 그래, 한 번에 몇 명이나 때려눕히는데?”


그가 대답했다. “한 열 명쯤이야, 뭐….”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백기완이 벌떡 일어서며 따귀를 올려붙였다. “잔망스런 놈아! 사나이가 주먹을 쥐면 천하를 울리고 세상을 쥐고 흔들어야지, 겨우 사람이나 때려? 사내자식이 그걸 힘자랑이라고 하고 다니냐? 재수 없는 놈, 당장 내 앞에서 꺼져버려!”


‘물렁살에 바늘뼈’인 이 서생의 손맛이 매울 리는 없었으나 아무 대응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일 이후 며칠 뒤 다시 찾아가 친구를 맺었고,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부산민예총에서 열린 채현국 어른 강연회. 저 뒤쪽에 방배추 어른도 보인다. @김주완


백기완·황석영과 함께 ‘조선 3대 구라’가 된 까닭


그런 ‘전설의 주먹’ 방배추 어른이 부산에 왔다. 지난 11일 부산민예총이 발행하는 격월간지 <함께 가는 예술인>이 채현국 어른을 초청, 간담회를 하는 자리에 오랜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서 찾아온 것이었다.


80대의 노구였지만 30~40대 못지않게 단단한 몸집과 떡 벌어진 어깨가 아직 녹슬지 않은 주먹임을 알게 해주었다. 그의 팔뚝은 내 허벅지보다 굵었다. 인터뷰는 주로 술자리에서 이뤄졌다.


먼저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에 대해 물어봤다.


“어디서 그 말이 나왔는지 몰라요. 그런 말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싸움을 안 해봐서 그렇지, 싸움은 이 세상에 최고가 없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내가 싸우기만 하면 나보다 약골들만 많이 걸려갖고 내가 주로 이겼지. 그게 자꾸 과장되고 이러니까 그런 거고 그래요.”


그는 <배추가 돌아왔다>(2006, 다산책방)는 책에서 자신의 주먹인생에 대해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나는 주먹으로 이름깨나 날렸지만 이들(다른 주먹)과는 다르다. 그리고 인생 선배 뻘인 시라소니나 김두한과도 다르다. 나에게 주먹, 그리고 싸움은 세상살이의 한 기술에 불과했다. 50년대 주먹들이 정치적으로 우파라면 나는 차라리 좌파에 가깝고, 이후 무리를 이루며 활동한 조폭에 비하자면 나는 철저히 '나홀로 주먹'이었다.”


오랜 친구 채현국 어른과 만나 파안대소하는 방배추 어른. @김주완


그는 또한 백기완, 황석영과 더불어 ‘조선 3대 구라’로 통하기도 한다. 이 말은 어떻게 나온 말일까.


“몰라요. 모르지만 내 생각엔 이런 것 같아요. 대통령과 사진 찍으면 그걸 집에다 걸어놓잖아요. 또 유명한 영화배우와 알지도 못하는데 사진 한 번 찍었다고 집에다 걸어놓잖아요. 그런 것처럼 내 주위에는 소위 학삐리들이 많아요. 좋은 학교 나오고 공부 많이 하고 뭐 이런 녀석들이 대부분 약골 아니에요? 팔뚝도 가늘고…. 그런 사람들 잠재의식에는 내가 힘세고 그런 게 좋았던 모양이야. 그래서 뭐 ‘배추가 세다. 또 배추가 말도 잘하고 멋있다. 그런데 난 그와 친하다.’ 뭐 이런 것 같아. 그런데 실제로 난 뭐 말도 잘하지 않는데….”


이렇게 겸손을 떨었지만, 실제 만나본 그는 ‘3대 구라’답게 말에는 리듬이 있었고 감칠맛이 넘쳤다. 논리정연하기도 했다.


-백기완 어른을 처음 만났을 때 따귀를 맞고도 대응하지 않은 이유는 뭔가요?


“처음엔 어이가 없었지만 무언가 시대정신을 담고 있는 듯한 그 기운….”


-그 기운과 배짱에 제압당하신 건가요?


“그 배짱이라는 게 그냥 개인적인 의미로는 배짱이지만, 조금 좋게 얘기하면 이념, 철학, 인생관 그런 것이겠죠. 대단하죠. 지금도 성질이 대단하고…. 그런데 그 후부터 내가 심각하게 사회생활을 하면서 뭔가 가부를 결정할 때 기완이 영향을 많이 받았죠.”


나도 돈이 제일 좋다. 그러나…


-한 때 서해화성이란 회사의 대표이사도 하셨고, ‘살롱드방’이라는 고급 양장점도 하셨지만, 서독 광부 생활과 파리 낭인, 보신탕집, 자장면집, 그리고 노느메기밭이라는 공동체 생활 등 주로 육체를 쓰는 노동을 많이 하며 살아오셨잖아요? 홍익대 법대를 다니셨는데, 왜 지식노동을 하지 않으셨나요?


“노느메기밭에 내 모든 걸 바치고 싶었으니까. 어떤 사람은 내가 일하는 걸 보고 노동은 신성하다 그래요. 그런데 노동이란 것은 아주 하기 싫은 것, 이걸 안 하면 죽겠으니까 억지로 하는 게 노동이지 하고 싶어서 하는 건 노동이 아니라 취미거든. 그런 걸 직접 해보지 않은 사람은 구별을 잘 못하죠. 내가 그 칼 마르크스라는 사람 책도 봤는데 물론 그 사람 이론적으로 천재고 그 당시에 그런 이론을 정리한 게 대단한데, 단 한 가지 이 사람 약점은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글쓰는 일도 일이지 않나요?


“마르크스가 글을 쓴 것도 노동이라 치지만, 글을 써서 출판사에서 팔렸어야지 노동이지, 팔리건 안 팔리건 엥겔스가 계속 봐줬거든. 그래서 먹고사는 데 아무 걱정이 없었던 사람이에요. 오직 가난했던 것뿐이지. 그러니까 노동자하고는 좀 달라요. 그 사람 책을 몇 권을 봤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생기냐면 계급사회라는 게 생기는 거죠. 이 사회는 노동자가 잡아야 한다는 그런 이론이 나온 것도 직접 월급을 안 타봤기 때문에 나온 것 아니냐는 거죠.”


-그렇지만 선생님도 마르크스처럼 자본주의에 순응하는 걸 거부하고 그렇게 살아오셨잖아요.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기회도 많았는데 왜 이렇게 순탄하지 않은 삶을 살아오셨나요?


“나도 이 세상에 뭐가 제일 좋냐 그러면 돈이 제일 좋다고 그래요. 돈처럼 좋을 게 없어. 그런데 왜 벌 기회가 있었는데 안 벌었냐. 그런데 그렇게 해서 벌면 안 되는 것 같아요. 정권에 야합을 한다든가, 비겁한 일을 한다든가, 가난한 사람을 착취한다든가 그렇게 해서 잘 살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가난하게 사는 게 행복하지.”


채현국과 방배추. @김주완


-돈이 좋고 돈을 벌고 싶은데 힘없는 사람을 착취하거나 정권과 야합하거나 그렇게는 벌 수 없었다고 하셨는데, 실제 그런 방법 말고는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나요?


“거의 없죠. 초기자본주의에는 자수성가라는 게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는 안 먹고, 안 자고, 안 입고, 남이 열 시간 일하면 스무 시간 일하고, 쉰 떡을 사먹으면서…. 그러면 돈을 벌 수 있었어요. 그런데 요새는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거지가 되는 거야. 요새 경쟁사회는, 지금 이게 말기자본주의죠 이게…. 없어지기 전까지 이게 발악하는 방법은 자본집중, 권력집중 뭐 이런 게 되어갖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안 돼요. 이건 어쩔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나같이 무식한 놈도 가끔 책을 보는데, 바쿠닌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러시아 아나키스트인데, 아나키즘이라는 게 권력을 무조건 반대하는 거지. 그래서 국가라는 것도 권력이다. 그래서 국가까지 무시하는 사람인데도 이 사람이 마지막 얘긴 그걸 했어요. 사형선고까지 받고 별 고생을 한 사람이 ‘지금을 정리하기 위해선, 지금을 부정하기 위해선 지금보다 더 큰 힘이 아니면 안 된다’ 그랬어요. 양심 갖곤 안 된다는 거지. 양심이나 제도 갖곤 절대로 안 된다는 거지. 백 년 전에 그랬어요. 대단한 사람이지. 그래서 그런 사람 이야기를 나같이 무식한 놈도 기억을 하지.”


힘없고 능력 없는 사람도 함께 살자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최근 정부의 성과급 중심 임금 개편이나 ‘저성과자’ 해고 가이드라인 마련 등 정책은 어떻게 보시나요?


“일을 많이 하고 잘난 사람은 돈 많이 주고, 못하는 사람은 적게 주고, 아주 못하는 사람은 퇴출시킨다? 이건 노예의 노동력을 착취할 때 사용했던 방법이에요. 서로 노예끼리 잡아먹고 자기가 살기 위해서 상대를 죽이고…. 그걸 백 년 전에, 2차 대전 전에 했던 경제이론이야.”


-선생님이 1970년대 100만 평의 농장에서 ‘노느메기밭’을 했던 것과는 정 반대의 정책이군요.


“신체적으로 태어날 때 무능력한 사람이 있잖아요. 무능력하니까 굶어죽어야 하는 거야? 그래도 똑같이 먹어야지. 똑같이 노나먹자는 게 노느메기야. 옛날에 우리가 고사를 지내고 제사를 지내요. 그러면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민주적이냐 하면,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높고 아무리 고조할아버지라도 혼사 살면 떡 한 덩어리만 줬어요. 아무리 천하고 지위가 낮아도 식구가 열이면 열 덩어리를 줬죠. 이게 노느메기라는 우리나라의 분배원칙이에요. 그래서 내가 노느메기밭을 하면서 일을 많이 한 놈이라고 더 많이 주고 몸이 아파 일을 못해 쉬어도 덜 주는 게 아니라 똑같이 분배를 했어요. 공동분배 원칙이죠.”


-그런 노느메기밭을 왜 못하게 되었나요?


“그렇게 하니 (당시 박정희 정권이) ‘이놈이 빨갱이 아니면 이럴 수 있냐’고 한 거요. 그래서 날 잡아가서 고문하고 6개월 징역을 살았지. 그 때문에 내가 마흔 한 살 때부터 이가 없어. 이러고 내가 40년을 살았어요.”


방배추 어른은 보디빌딩 전국대회 우승이 꿈이다. @김주완


그의 치아는 모두 의치다. 그때의 후유증으로 이가 모두 빠져버렸다. 1974년 김일성과 교신을 했다는 터무니없는 혐의로 끌려가 간첩 누명을 쓰고 복역했다. 그때 감방에서 친구 백기완도 만났고,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들어온 이호철, 임헌영, 그리고 대학생 유홍준도 만났다. 그 후 12년이 지난 1986년 또다시 남영동 대공분실에 불려가 악몽같은 고문을 당하게 된다.


2005년에는 당시 문화재청장이었던 유홍준의 도움으로 경복궁 관람안내 지도위원을 했고, 노무현 정부가 마감되자 미련 없이 사표를 냈다가 그를 평소 좋아하던 경복궁 관리소장이 부르는 바람에 다시 돌아가 지난해 12월 말까지 근무한 후 두 번째 사표를 던졌다.


그는 올 10월 전국체전 보디빌딩 종목 장년부에 출전해 우승하는 게 목표다. 그러나 그걸 준비하기 위해선 운동과 식이요법 등에 돈이 많이 든다고 한다. 그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다시 직장을 물색하고 있다. 부디 방배추 어른의 꿈이 이뤄지길 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이 바라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요?


“응. 나는 아나키즘 책을 많이 봐요. 그게 미래학이니까. 현실가능성은 없어도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을 존경합니다. 물론 비현실적이지. 그러나 미래학이라는 건 언젠가 이루어지는 거지, 지금 뭐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니까. 이거 뭐 너무 구라를 많이 깠나? 이거 내가 말려들어갔네.”


-3대 구라시잖아요.(웃음)


“뭐야? 당신 기자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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