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통영로 으뜸 명품 옛길 한티고개 걷기

김훤주 2014. 5. 11.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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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은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비롯됐습니다. 임진왜란 개전 직후 이순신 장군이 초대 통제사로 임명된 이래 통제영은 한산도와 가배량 등에 설치됐었었습니다.

 

그러다 임진왜란 끝나고 여섯 해 뒤인 1604년 지금 자리에 정착했답니다. 이로써 임금이 있는 서울과 통제사가 있는 통영을 잇는 통영(별)로가 열렸습니다. 통영(별)로는 조선 십대로 가운데 경남이 종점인 유일한 도로랍니다.

 

통영로와 통영별로는 다른 십대로와 함께 고속도로 같은 기능을 했으나 일제강점과 개발독재를 거치면서 거의 완전히 소멸됐습니다. 요즈음 동래로(서울~동래)나 해남로(서울~해남)는 종이 위에나마 복원이 됐지만 통영로는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티고개를 넘는 일행들.

 

2011년 5월 경남도민일보가 창간 12주년 특집기획으로 두류문화연구원(원장 최헌섭)과 함께 빠짐없이 현장을 답사하고 신문에 연재하면서 복원에 나섰습니다. 경상도에 나 있는 통영로로 서울에 이른 다음에 전라도에 나 있는 통영별로로 돌아오는 길로 왕복 2000리입니다.

 

이제 그 대장정을 3년만에 마무리하게 됐습니다. 4월 27일 통영 광도면 원산마을에서 문화동 통제영 본영에 이르는 마지막 구간 12km 가량을 답사했던 것입니다.

 

이번 답사와 연재는 통영로 최초 완주에 더해 최초 지상 복원이라는 성과를 냈습니다. 이를 작으나마 기념하기 위해 걷기나 옛길을 좋아하는 47명을 모아 함께 나섰습니다.

 

 

오전 10시 원산마을에 이른 일행은 들머리 고인돌에 먼저 눈길을 던졌겠지요. 산뜻한 모양이었거든요, 덮개돌이 옆으로 길쭉하고 아래위로 납작했는데 보기 드물게 날렵했습니다.

 

고인돌은 여기 통영로 옛길이 지나는 일대가 오래 전부터 사람 살기에 좋은 조건을 갖춘 터전임을 일러주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옛길은 드문드문 콘크리트로 덮여 있었고, 대부분은 흙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걷기 좋은 길이었습니다. 마을 오른쪽으로 굽어지며 골짜기를 따라 넘는 고개인데 그다지 가파르지도 않았답니다.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지팡이 짚은 이)이 길 한가운데 난 크령을 두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따라다니며 살아가는 크령은 밟으면서 다녀야 한다고, 그래야 그이들 번식에 도움이 된다고.

 

구름까지 나서서 하늘을 덮고 해를 가려주는 바람에 땀이 별로 나지도 않았지만, 그늘도 이어지고 바람까지 불어 걷기에는 더없이 딱 좋았습니다. 길은 미녀의 몸매처럼 곳곳에서 휘어집니다.

 

걷는 사람들은 멀리 펼쳐지는 초록 물결과 가깝게 다가서는 여러 풀·나무·꽃에 번갈아 눈길을 빼앗깁니다. 어떤 이는 카메라를 높이 들어 원경(遠景)을 찍고 어떤 이는 허리를 숙여 근경(近景)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하얀 풀꽃이 보기 좋았던 모양.

 

"이야!" "우와!" 감탄사 몇 차례 내질렀더니 어느새 고개 마루. 오른쪽으로는 섬이 둥둥 떠 있는 남해바다입니다.

 

송전탑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고개마루를 지나는 모습.

 

길을 내려가다 무심결에 바라보니 멀리 벽방산쪽 산자락에 바람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높은 스님 느닷없이 내리치는 죽비 소리에 깜짝 놀라는 행자처럼, 털썩, 송화가루가 노랗게 한꺼번에 휘날리는 양이 "우와!" 소리를 한 번 더 내뱉도록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먼 데와 가까운 데가 모두를 즐겁게 해준 옛길 내려서는 중간 지점. 관덕저수지랑 이어지는 왼편 길에는 '구신비'가 있고 맞은편 길가 오른쪽에는 구현겸 통제사 불망비가 있었습니다.

 

불망비와 구신비는 둘 다 바위 표면을 갈아내고 만든 마애비입니다. 그런데 구신비는 글자가 죄 파내진 반면 불망비는 글자가 뚜렷합니다. 구신비에는 전설이 있습니다. 구(具)씨 성 가진 통제사가 모함으로 사약을 받고 죽었습니다.

 

구신비. 새겨져 있던 글자들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죄 파내져 버렸습니다.

 

구현겸 통제사 불망비. 구신비 맞은편에 있습니다.

 

시신을 운구하다 여기를 지나는데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책임관 꿈에 죽은 통제사가 나타나, '역모 누명으로 죽었다. 바위에 공적을 적고 충신이라 새기면 움직이겠다'고 했습니다. 시킨대로 했더니 다시 움직였습니다. 새긴 글자는 진실을 두려워한 모함꾼들이 도로 파냈습니다.

 

구씨 성 통제사는 바로 옆 불망비의 주인공 구현겸(具顯謙)입니다. 1774년 7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통제사를 지냈습니다. <영조실록> 50년 6월 10일치에 '구현겸을 통제사로 삼았다'고 나오고요, 이듬해 7월 10일치에는 '구현겸이 신회에게 핍박받아 경질됐다'고 적혀 있습니다.

 

따라서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은 적은 없는 것이지요. 이를 두고 최헌섭 원장은 "구현겸 통제사 불망비가 바로 옆에 있어 자연스레 구씨 성 통제사가 주인공이 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런 빗돌은 보여지는 데 목적이 있는만큼, 왕래가 잦은 이런 길목에다 세웠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여기 이 고개가 통영로 옛길임을 일러주는 또다른 증표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개울을 따라 내려온 사람들은 들판과 만나는 데 놓인 정자에서 도시락을 풀었습니다. 원래 여기서 버스를 타려 했으나 걷는 데 신이 난 사람들은 점심조차 서둘러 먹더니 국도 14호선 만나는 데까지 내쳐 걸었습니다. 한티고개가 정말 명품이었던 때문이겠지요.

 

들머리 고인돌, 고개마루에서 보이는 바다, 굽이굽이 휘어지는 산길, 구신비·구현겸 통제사 불망비들이 좀더 짜임새 있게 버무려져 있었다면 더욱 좋았겠다 싶은 생각은 들었습니다만.

 

서포루 올라가다 돌아보면 오른쪽으로 복원된 통제영 건물들이 보입니다. 왼편 시멘트 건축물들은, 일제강점기 통영성 위에 만들어진 상수도 시설물.

 

서포루에서 노니는 모습들.

 

원칙대로는 옛길 전부를 걸어야 하나, 마흔 넘게 사람이 참가해 있는데다 자동차 내달리는 한길가가 위험도 해서 충렬사 앞까지 버스로 옮겨갔습니다.

 

또 원래대로는 동포루를 거쳐 통제영으로 들어야 맞지만, 동피랑 유명세 때문에 동포루에 이미 올라가 봤던 이들이 많아서, 새로 복원한 통제영이 제대로 내려다보이는 서포루로 해서 세병관으로 이르렀습니다.

 

복원된 통제영 십이공방. 왼편 큰 건물이 세병관.

 

우리나라 가장 큰 목조건물인 세병관은 언제 봐도 우람하답니다. 일행은 통제사가 집무하던 운주당, 사택에 해당되는 내아, 주전소터, 비탈진 언덕배기 전망 좋은 정자들로 이뤄진 후원을 차례대로 둘러본 다음 십이공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후원과 앞쪽 운주당/세병관 사이에는 이런 우람한 나무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갈수록 시원해지겠지요. 그늘이.

 

이 가운데 주전소터는 수군 최고 지휘부로서 독자적 화폐 발행권까지 가질 만큼 권한과 책임이 엄청났음을 일러주는유적으로 우리나라 하나뿐인 현장이라고 합니다.

 

주전소 건물 자리.

 

주전소 화폐 만들던 자리.

어쨌거나 십이공방에는 옛날 장인들 작업장과 물건 간추리거나 쌓아두던 자리, 관리들이 장인 부리던 자리들이 복원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螺鈿匠) 송방옹 선생과 제114호 염장(簾匠) 조대용 선생의 작업 모습을 보고 얘기를 들은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나전장은 조개껍질로 자개를 만들어 나무에 박아먹는 솜씨꾼이고 염장은 대나무발을 멋지게 만드는 사람이지요.

 

송방웅 나전장.

 

조대용 염장.


일행은 다시 세병관에 올라 통영(별)로 최초 완주를 기념하는 자체 행사를 간단히 치른 다음 조금은 이른 시각인 오후 4시 서호시장 들머리 남옥식당에 가서 해물탕 등으로 뒤풀이를 풍성하게 가졌습니다. 통영시에서 기꺼이 지원해준 보람으로 이번 나들이가 이렇게 좀더 알차진 셈이지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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