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순천만에서 깨닫는 사천 갯벌의 소중함

김훤주 2014. 3. 9.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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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 사랑 고3역사문화탐방] (8) 사천시

 

2013년 12월 9일 떠난 사천시의 '우리 고장 사랑 고3 역사 문화 탐방'의 주제는 '타산지석(他山之石)'이었습니다. 갯벌 하면 사람들은 순천만을 먼저 떠올리지요. 사천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저는 들었습니다.

 

사천도 갯벌이 무척 너르거든요. 이렇듯 사천의 보물이 갯벌이라는 것은 사천에 사는 사람들도 잘 모릅니다. 사천만이나 광포만은 경남에서 가장 넓습니다. 이런 갯벌을 어떻게 잘 보전해서 제대로 활용하고 더불어 이름도 널리 알릴 수 있는지 전남 순천시 순천만을 찾아 친구들과 함께 갯벌의 값어치를 되새겨 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사천은 문화유산도 갯벌과 관련된 것이 많답니다. 가산창을 비롯한 조선시대 조창(조세 창고), 매향비, 작도정사, 쾌재정 같은 것들이 모두 사천에 갯벌이 없었다면 생길 수 없는 유물입니다.

 

해산물도 풍성합니다. 이렇게 먹을거리가 많다보니 철새도 많이 날아들고 남해안 중요한 물고기 산란장 구실까지 한답니다. 아울러 드넓은 갯벌이 안겨주는 멋진 경관은 사람들 마음에 심미적인 작용도 합니다. 또 비토섬 일대는 전래 설화 별주부전의 무대이기도 하답니다.

 

순천만 갈대밭 들머리에서.

 

잘만 가꾸고 살려 쓰면, 순천만처럼 갈대가 풍성하지는 않다 해도 사천 사람들에게 여러 모로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한 갯벌입니다. 그래서 이번 탐방의 첫걸음은 서포면 조도마을 들머리 광포만이 한눈에 드는 자리로 향했습니다.

 

탐방에 참여한 학생 70명과 선생님 10명은 썰물 때를 맞아 물이 쫙 빠져 더욱 너르게 드러난 갯벌을 바라봤습니다. 광포만은 우리나라 으뜸 갯잔디 군락지랍니다. 갯잔디는 기수갈고둥 같은 조그만 생명을 품고 기릅니다.

 

광포만 갯벌을 찾은 일행.

 

이런 조그만 생명들은 생태계 먹이사슬 피라미드에서 가장 낮은 부분을 감당하면서 그 피라미드를 통째로 떠받칩니다. 광포만을 비롯해 사천 바다의 생산성이 높은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쌀쌀한 날씨 탓인지 여기 갯벌의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인 갖가지 게들이 많이 나와 있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눈 밝은 아이들은 꺼먼 개흙을 뒤집어쓰고 꼬물거리는 콩게나 칠게 따위를 보고 탄성을 내지릅니다.

 

게들은 개흙을 자기 몸 속에 집어넣고 그 가운데 영양분은 먹고 나머지는 밖으로 내놓습니다. 영양분이 게에게는 먹을거리이지만 사람에게는 오염물질입니다. 말하자면 게들의 생명 활동이 사람에게는 갯벌 정화가 되는 셈이랍니다.

 

어쩌면 이런 설명들보다 친구들의 마음을 흔든 것은 눈 앞에 펼쳐지는 드넓은 갯벌 앞에서 그동안 책상머리에서 답답했던 시간들을 훌훌 털어내는 홀가분함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앞에 누렇게 보이는 풀들이 갯잔디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다는 말을 듣습니다.

 

광할한 갯벌을 눈으로 담고 나서 옮겨간 곳은 사천의 또다른 명소 다솔사입니다. 다솔사는 들머리 잘 자란 솔숲과 전통차로도 이름나 있고 절간의 소담스런 분위기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적멸보궁과 극락전을 거쳐 오솔길 따라 올라가면 나오는 차밭 가운데 서 있는 잘 자란 은행나무 아래에서 다솔사 전체 풍경을 제대로 내려다봅니다.

 

다솔사는 역사적으로 아주 뜻깊은 절간입니다. 아울러 일제강점기 불교계 민족운동의 중요 거점이기도 했습니다.

 

'님의 침묵'을 지은 만해 한용운은 1917~18년 이태 동안 다솔사에 머무는 등 12년 넘게 드나들었으며 여기 전각 응진전을 1930년 보수하기까지 했습니다. 또 안심료 앞 뜰에는 황금편백들이 심겨 있는데, 1939년 만해 회갑 기념 모임을 하면서 심은 나무라 합니다.

 

다솔사로 들어가는 학생들. 앞에 보이는 건물이 대양루입니다.

 

다솔사 하면 떠오르는 또다른 이가 소설가 김동리입니다. 1935년 등단한 김동리는 1961년 소설 '등신불'을 발표하면서 한 번 더 유명해졌는데 그 창작 배경이 다솔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다솔사에 머물던 때 여기서 소신공양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1960~61년 다솔사에 있으면서 작품을 썼던 것이랍니다.

 

설명은 이어집니다. 다솔사를 두고 한용운이나 김동리 같은 유명 인물을 떠올리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최범술(법명 효당曉堂)이라는 사천 출신 스님이 있었기에 다솔사가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었다고 거듭 힘주어 말했습니다.

 

지역에 좋은 것을 두고도 언제나 서울바라기가 되는 요즘 아이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1916년 출가한 최범술은 여러 갈래로 항일독립운동을 벌이다가 1920년대 불교계 항일 비밀 결사 만당(卍黨)을 조직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이 만당의 당수(黨首)로 추대된 이가 바로 만해 한용운입니다.

 

또 1934년에는 최범술이 사천에 광명학원(光明學院)을 세워 민족교육에 나섰는데 김동리는 이것이 계기가 돼서 다솔사와 인연을 갖게 됐습니다. 1936~40년 광명학원에서 교사 노릇을 하는 동안 여기 다솔사에서 '등신불'의 뼈대가 되는 이야기를 갈무리하게 됐다고 합니다.

 

최범술과 더불어 다솔사에 자주 머물면서 함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고받았던 인물 가운데 김범부가 있어서 이런 배경으로 말미암아 김동리가 사천 그리고 다솔사에 올 수 있었답니다. 김범부는 김동리보다 나이가 열 살 넘게 남은, 맏형이었습니다.

 

순천만 갈대밭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광포만 갯벌과 다솔사를 거쳐 순천으로 옮겨갔습니다. 점심으로는 꼬막 정식을 준비했답니다. 순천만 바다가 만들어내는 별미 가운데 하나입니다. 밥상은 꼬막으로 푸짐했습니다. 하지만 간편하고 손쉬운 음식에 익숙한 친구들은 꼬막을 까먹는 데 서툴렀습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 자연에서 나오는 좋은 음식을 마주할 수 있었던 것도 귀한 경험이 되었으리라 싶습니다.

 

갈대밭에 파묻힌 일행이 마치 점처럼 떠 있습니다.

 

순천만 생태공원에서 학생들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습니다. 사천이랑 그리 멀지 않은 데라서 한두 차례는 와 봤으리라 짐작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이번이 첫걸음인 친구가 대부분이었답니다. 마침 휴일 다음날인 월요일이어서 사람이 많지 않은 공원을 가로세로로 뛰어다닙니다.

 

 

 

 

 

여학생 한 무리는 함께 걸음한 여자 선생님이랑 함께 갈대밭 속으로 들어가 폭 파묻혔습니다. 모습은 보이지 않고 웃음소리만 들립니다. 순천만은 네 철 모두 아름답지요. 봄은 연둣빛으로, 여름은 짙은 초록으로, 가을은 갈색으로, 그리고 겨울은 물기를 죄다 빼어낸 서걱거림으로 아름답습니다.

 

갈대밭에 파묻힌 선생님과 아이들.

깊어가는 겨울 갈대를 배경으로 데크를 따라 거닐며 서로서로 사진을 찍어주느라 바빴습니다. 갈대밭 사이로 난 데크는 맞은편 언덕배기 용산으로 이어집니다. 여기 마루에 오르면 순천만 일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용산전망대에서.

 

둥글고 커다랗게 타원형으로 연잎처럼 모여 있는 갈대 군락이 곳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학생들에게서 말소리가 잦아듭니다. 어떤 신비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용산전망대에서.

 

날씨가 흐리고 때로는 비까지 내려서 오후 햇살이 조용하게 물결치는 바닷물에 튕겨져나오는 모습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차갑지만은 않은 바람을 맞으며 갈대밭을 몸으로 누리는 싱그러움은 남았답니다. 오후 4시, 일행은 사천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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