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전두환 일당의 역사 왜곡과 의병장 전제

김훤주 2013. 6. 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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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시 눈길을 끌고 있는 전두환

 

요즘 전두환이 다시 사람들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전두환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원흉입니다. 1987년까지 정권을 쥐고 군사독재를 하면서 숱한 영혼과 육체를 괴롭힌 잘못이 있습니다.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지금 전두환이 사람들 눈길을 끄는 까닭은 돈과 관련돼 있습니다. 전두환은 나라에 내야 할 돈(추징금)은 내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내야 할 돈을 부정불법하게 빼돌렸다는 얘기를 듣고 있습니다. 전두환 아들이 국제 조세 회피 지역에서 페이퍼 컴퍼니를 만든 사실까지 확인됐습니다.

 

전두환은 이처럼 골고루 죄인입니다. 전두환이 끼친 폐해는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 있습니다. 정치 경제 역사 문화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습니다. 그런 폐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기 조상과 관련된 역사 왜곡입니다.

 

앞장서 역사를 왜곡한 더러운 이름들. 여기 적힌 글을 써준 이는 이가원(李家源)이라는 인간입니다.

 

경남 창녕 영산면에 가면 만년교가 있습니다. 조선 시대 지어진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로 둥글게 봉긋 솟아오른 다리를 건널 때면 마치 그네를 탈 때와 같이 상승감이 입체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다리를 건너 왼편으로 보면 갖은 기념물들이 있습니다.

 

‘영산 남산호국공원’입니다. ‘호국공원’은 1982년 5월 여기에 전국 처음으로 들어섰는데, 그 뒤 다른 데서 이 같은 호국공원이 만들어졌다는 얘기는 제가 들은 적이 없습니다. 남산호국공원에 있는 기념물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전혀 인물이 되지 않는 사람을 대단한 영웅인 마냥 그려놓았습니다. 이마저도 어쩌면 세월이 흐른 뒤에 문화재가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렇다 해도 바로잡아야 할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왼쪽 영산현감전제장국충절사적비와 오른쪽 임진왜란호국충혼탑, 그리고 가운데 임진왜란화왕산승전도.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한(그래서 전혀 엉터리 인물은 아닌) 전제(全霽) 장군이 장본인입니다. 바투 있는 산꼭대기에는 영산 3·1운동기념비와 봉화대, 그리고 6·25전승기념탑이 있고 아래에 ‘영산현감 전제장군 충절사적비’·‘임진왜란 호국충혼탑’ 등이 있는데 사실과 다른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임진왜란호국충혼탑. 앞에 놓인 국화들은 이런 역사왜곡을 알고 있을까요?

 

이런 사적비와 충혼탑에 적힌 내용을 비롯해 안내문까지 죄다 거짓을 이르고 있습니다. ‘사적비’에는 전제 장군이 △1591년 영산 현감으로 부임해 임진왜란 당시도 현감이었으며 △의병을 모은 의병장이고 △박진·정암·화왕산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 적혀 있습니다.

 

거짓말하는 사적비.

 

하지만 합천군에서 발행한 <임란사>를 따르면 전제는 당시 △합천군 초계에 있는 당숙 전치원의 아래에서 장정을 모았으며 △조호장(調護將)을 맡아 낙동강 적선 차단을 위해 곽재우와 호응했고 △무계·마수원·성주 전투에 참가했을 따름입니다.

 

게다가 전제 장군이 영산현감으로 부임한 때는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크지는 않으나마 의병장으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현감 자리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전제가 큰 공을 세웠다는 박진·정암 전투는 의령 출신 의병장 곽재우가 주도했습니다. 그리고 전제가 화왕산성 전투에서도 크게 공을 세웠다고 돼 있는데, 사실 화왕산성에서는 이렇다 할 전투가 아예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 도지사 이규효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1597년 일본이 다시 침략해 왔을 때 민관의 피해 최소화를 위해 곽재우 주도로 농성(籠城)을 했을 따름입니다. 그러니까 충혼탑에 적혀 있는, “임진왜란 때 영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 휘하에 왜군을 물리쳤다”는 내용은 두 말이 필요 없는 잘못이랍니다.

 

<임란사>를 따르면 당시 합천(지금 초계·삼가면까지 포괄하는)과 고령·성주를 총괄하는 의병장은 정인홍이었습니다. 전제는 전제 출신 지역인 초계까지 총괄하는 의병장인 정인홍의 직계도 아니었습니다. 합천 초계에서 의병을 일으킨 전치원·이대기 아래에서 조호장을 맡았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휘 계통이 달랐던 의령·창녕 의병장 곽재우와는 상하 관계가아니라 서로 협조하는 관계만 있었습니다. 전제가 곽재우 휘하에 있었던 것은 1597년 봄 화왕산성 쌓을 때와 7월 21일~8월 21일의 수성(守城) 때뿐입니다.(아마도 전제가 영산현감으로 있던 시기일 것입니다.)

 

다섯 해 전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 전제의 활동상은 전치원·이대기 휘하에서 “(창녕군) 남지의 산성들과 낙동강 유역 박진 등에서 성을 고쳐 쌓고 북상하는 왜병에 저항”(<창녕군지>)하는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선조실록>은 전제 장군에 대해 정유재란 때 울산 도산전투에서 싸움을 피하다가 권율에게 참수를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그런데도 영산 남산호국공원의 충혼탑 옆에 있는 부조를 보면 전제 장군이 크게 돋보이게 돼 있습니다.

 

가운데 돋보이는 인물이 전제입니다. 옆에 군기에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반면 총대장 곽재우는 한 쪽 구석에 쪼그라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경남 출신 인물 58명 전기를 모아 1999년에 발행한 <경남인물지>에는 전제 장군이 아예 포함돼 있지 않습니다.

 

당연한 노릇입니다. 전제는 조전장(助戰將)-그러니까 주장(主將)이 아닌 부장(部將)밖에 안 되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당시 대통령으로 권력을 오로지하던 전두환의 14대 조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전두환은 자기가 대통령을 하던 시절 동학농민혁명의 주인공 전봉준조차 같은 전씨라는 이유만으로도 기리는 사업을 많이 벌였습니다. 그러니 14대 조상이 되는 전제 장군에 대해서는 따로 말할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실 전제 장군은 죽고 나서 더 불행해졌습니다. 비록 권율에게 참수당했다고는 하지만, 전제 장군의 공적은 크든 작든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토록 지나치게 크게 포장됨으로써 많은 이들의 비웃음을 두고두고 사게 됐습니다.

 

전제 장군은 경남도청 대회의실에도 ‘향토 출신 선현’ 6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초상이 봉안돼 있습니다. 왼쪽에서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함께 걸려 있는 문익점·김종직·조식 선생이나 사명당·정기룡 장군이랑 견주면 아무래도 품격이 크게 떨어집니다.

 

당시 지역 위정자들의 과잉 충성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과잉 위선(爲先)이 빚어낸 합작품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지역 사회에서는 이를 바로잡으려는 애씀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아니거나 사소한 문제로 여기기 때문일까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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