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7일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가 진주에서 설명회 겸 보고회를 했습니다. ‘해딴에’는 경남도민일보가 만든 경남형 예비 사회적 기업으로, 체험·여행을 지금 주로 하고 있습니다. 장소는 진주경찰서와 진주우체국 바로 앞 펄짓재작소였습니다.
지난 해 역사체험단 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과 부모들을 대상으로 1시간 가량 얘기를 나눴습니다. 펄짓재작소는 여느 건물과 다르지 않는 건물 3층에 있었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거기 소장으로 있는 김군미씨를 만났습니다.
1. 제대로 비어 있는 공간, 펄짓재작소
펄짓재작소는 내부가 다른 건물과 달랐습니다. 보통 단체들은 공간을 그냥 두지 않는답니다. 선전이나 조직 아니면 장식을 위해서라도 빼곡하게 채우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여기는 많이 비어 있었습니다. 장식이 별로 없었습니다.
조직을 알리는 글귀나 그림 따위도 없었습니다. 그냥 그대로 책상이 있었고 탁자가 있었고 방이 두 개 마련돼 있었답니다. 그뿐이었지요. 프런트로 쓰임직한 탁자는 조금 높았는데, 거기에 물 데우는 기구 따위랑 타 마실 수 있는 거리들이 몇몇 놓여 있을 따름이었고요.
권영란 기자 사진.
이렇게 공간을 비워놓을 수 있다니……. 물론, 마구잡이로 비어 있는 공간은 아니었습니다. 시쳇말로, ‘있을 건 있고 없을 건 없는’ 그런 식이었답니다.
보통은 여러 그림이나 작품을 걸어두는데 그런 장식품이 오히려 눈에 거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채움과 비움의 균형을 깨고 절제를 잃기 십상이기 때문이지요.
반대로 휑뎅그렁한 느낌만 주는 공간도 많습니다. 이런 경우는 어찌할 수 없음 또는 어찌할 줄 모름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절제로 말미암은 비움이 아니라 무지로 말미암은 없음인 것입니다.
펄짓재작소는 채움도 아니었고 없음도 아니었습니다. 비움이었습니다. 불편하지 않고 안정되기까지 한 비움이었습니다.
펄짓재작소 벽면에 놓인 물건들. 사진은 모두 권영란 기자가찍었습니다.
“하하, 원래 그랬어요. 앞에 건물을 쓰던 사람이 예술가였어요. 벽난로도 공간도 대부분 그대로 뒀어요. 그리고 이런저런 시설을 하는 데는 아는 분들이 도움을 많이 줬지요. 제가 한 것은 별로 없어요. 대신 화장실은 확 뜯어 고쳤어요.”
화장실은 아주 널찍하고 깨끗했답니다. 나무를 쓴 덕분인지 따뜻한 기운마저 감돌았고요. 간단하게 몸을 씻을 수 있는 시설도 돼 있었습니다. 펄짓재작소는 바로 이 공간을 빌려주는 일을 한답니다. 1시간에 1만원이고요. 아주 헐하지요.
2. 뻘짓과 진주(眞珠=pearl)는 통한다
‘펄짓’이 무엇일까? 김군미 소장이 말했습니다. “운영위원이 여섯 사람이 있는데 운영위원회에서 나온 말이에요. 경상도 지역말에 ‘뻘짓’이 있잖아요. 엉뚱한 짓거리지요. 여기에다가 진주를 더했어요. 진주(晉州)=진주(眞珠)=펄(pearl) 이렇게요.”
‘재작’소도 유별납니다. ‘제작’소가 아닙니다. 여기에도 뜻이 있습니다. 경상도말에 ‘재작지긴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장난친다는 얘기입니다. 부정적으로는 ‘뜻도 없고 보람 없는 짓을 한다’는 정도로 쓰이기도 하지요.
뻘짓과 재작으로 펄(pearl)을 만든다, 이쯤 해석하면 꿈보다 해몽이 좋다 하겠지요. 어쨌거나 이렇게 비어 있는 공간은 세상에 드물다 싶었습니다. 이런 공간을 김군미 소장이 운영합니다. “실제로 ‘쓸데없는 짓을 한다’, ‘돈 안 되는 짓을 한다’ 이런 느낌을 이 공간을 만들 때 받았어요.”
비어 있는 공간.
“고민은 2011년 겨울부터 했습니다. 이런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요. 2012년 들어 준비해 여름 즈음에 계약하고 공사를 석 달 정도 한 다음 10월 중순에 문을 열었습니다.” 별 생각은 없었다고 합니다. 편하게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여겼고 그것을 실행으로 옮겼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중안동에 있는데요, 실은 조금 앞서 칠암동 한국과학기술대 근처에 공간을 얻었다가 개장을 않고 접은 적이 있어요. 셋이서 함께 준비했는데, 공간 운용에 의견 일치가 되지 않았어요. 조급했나 봐요. 공감대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깨끗하게 접었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새로 마련한 펄짓재작소 공간은 어찌 보면 서늘하고 썰렁합니다. 의지나 욕망으로 가득차 있는 공간이 아닙니다. 공간을 빌려 쓰는 사람이 공간의 주인 또는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공간입니다.
“자주 만나는 사람끼리, 진주YMCA 이사로 활동하면서 시민중계실 소비자 상담 자원봉사를 하면서 알게 된 여러 분들하고 여러 가지 하고 싶은 일 하려고 커피숍이나 이런 데 모였어요. 그러면서 편하게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처음에는 만화방을 하고 싶었어요. 편하게 얘기하고 또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는 그렇게 수 있는 그런 장소로 말이에요.” 그런데 만화방을 하면 수익을 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돈을 벌게 되면 공간의 성격이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고 여겨졌던 것입니다.
결국은 사심이 많이 들어 있는 생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사실은 그렇게 돈을 벌 자신도 없었다고 하고요. 도서관으로 해 보자는 의견도 있었답니다. 그런데 도서관은 형식에 메이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머리속에 떠올리기가 그렇습니다. 조용해야 하고 책을 읽어야 하고 어쩐지 좀 고상해야 할 것 같고……. 규격이나 틀에 들어가는, 강요되는 듯한 분위기가 좀 있지 않은가 싶어 그만뒀답니다. 그래서 지금도 펄짓재작소에는 만화책이 많습니다. 김군미 소장이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이는 여기 이 공간을 ‘최대한 심플하게’ 꾸몄다고 했습니다. “일단 복잡하고 화려하게 꾸밀 만큼 돈이 없었고요, 하하 저희가 추구하는 바랑 어울리게 하려고 그랬지요.”
3. 별다른 계획이나 작위가 없는 공간 운영
운영은 잘 될까? 꿈만 꾸다가 끝나는 그런 일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공간만 빌려줘 갖고는 유지·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았다는 얘기입니다.
“여기는 옛 도심인데, 집도 가까이 있고 도와주시는 분들도 가까이 있습니다. 언제든 다른 일 보러 나갈 수 있고 언제든 다른 분들이 도와주러 오실 수 있지요. 혼자서 할 수 있지 않고 여럿이 힘을 모아야지 할 수 있는 일이랍니다.
그리고 공동화되고 있는 지역이어서 집세가 쌉니다. 전세 2000만원에 월세 30만원입니다. 그런데도 공간은 이렇게 널찍합니다.”
운영위원들이 있다지만 들어보니까 김 소장을 거드는 수준이었습니다. “운영 전반에 책임진다”고는 하지만 “전적으로 (김 소장에게) 위임하고 맡겨 주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재능 기부를 하거나 회비를 내거나 사진 전시 같은 행사를 할 때 코디네이터가 돼서 돕거나 할 따름입니다.
공간 운영에는 별다른 계획이나 작위가 없습니다. 대충 봤더니 되는대로 하고 닥치는대로 합니다.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 출판기념회(실제 이름은 ‘독자와 대화’)를 했고 동네 프리마켓을 지난해 11월과 12월과 올해 1월 둘째·넷째 토요일 열었으며 2월에는 ‘위대한 사진전 배길효 사진전’을 했습니다.
애들 생일파티에도 자리를 내어줍니다.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피자나 치킨 따위 주문해 먹는 잔치는 안 된다고 합니다. 집에서 손수 먹을거리를 장만할 때만 빌려주는 것입니다.
소비자 생활협동조합인 한살림 지역 모임 강좌·강의, 방송통신대학 모임, 학교 선생님과 학부모들의 만남, 매주 수요일마다 점심 먹으면서 하는 펄짓재작소 운영위원회, 기타 배우기 모임도 합니다.
또 있습니다. “설 지난 다음 집에 나물이 많이 남아 있어서 번개 점심을 한 번 해 봤어요. 스무 사람 넘게 호응을 했고 실제로 오기는 일곱 사람이었어요. 그 뒤 정기적으로 해보자는 얘기가 나와서 점심시간에 다큐멘터리 하나 보면서 점심을 먹는, 1000원 들고 오면 되는, 음식 준비는 제가 하고요. 그 의도는 공간에 사람들이 많이 오기를 바라는 뜻으로요.”
“지출은 전기요금, 수도요금, 월세, 인터넷 요금이 전부거든요. 따로 월급을 챙기지는 않으니까. 수입은 대관료랑 운영위원들 회비지요. 커피 같은 소모품은 기부해 주시는 이들이 많아요. 1시간에 1만원씩이라지만 그 이상 주시는 이들도 적지 않지요. 게다가 대관이 조금씩 늘고 있습니다. 이제 문을 열고 여섯 달 되는데요, 아는 인맥 아닌 데서도 문의가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4. 빌려 쓰는 사람이 주인인 공간
김 소장은 따로 계획을 미리 짜서 운영하지는 않는 듯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공간을 빌려주는 것으로 족하다고 여기는 듯했습니다. ‘누구나 대학’이라든지 ‘우리끼리 인문학’이라든지 몇몇 계획이 있기는 하지만 그 또한 그냥 하는 것이지 특별한 의미를 집어넣어 진행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홍보도 페이스북을 통해서만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주위에서는 적극 홍보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간단한 리플릿 정도는 만들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은 한답니다. 거기 무엇 하는 공간이냐고 묻는 사람들한테 보여줄 수 있는 그런 리플릿입니다.
그런데 정답은 이미 나와 있는 셈입니다. “궁금해서 물어보는 분이 많아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도 여기가 뭘 하는 덴지 잘 모르겠어요. 오시는 분이 알아서 하시면 되는 공간입니다.’”
생각해 봤을 때 지역 사회에 이런 공간이 있으면 매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런 쪽으로 의도·기획하는 바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가만 생각해 봤더니 그게 정답이었습니다. 찾아오는 사람이 자기 뜻대로 채울 수 있도록 하는 그런 공간을 운영하면서 지역 사회에 도움이 될지 되지 않을지를 가늠하는 것은 우스운 노릇이겠다 싶었습니다.
찾아오는 사람이 지역 사회에 도움이 되도록 하면 도움이 될 테고, 그렇지 않으면 도움이 되지 않을 테지요. 김군미 소장, 이런 면에서 고수입니다. 한 번 더 물어봤습니다. “시작은 지금 얘기한 대로인데 끝은 어쨌으면 좋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여기 찾고, 와서 편하게 놀다 가고……. 사람 모아 놀고 이렇게 하는 것은 잘 하는 것 같아요. 두 번 정도만 만나도 우리 집에 스스럼없이 올 수 있을 정도로 만드는 친화력은 있어요. 그런데 돈을 버는 쪽으로 하면 이게 어려울 것 같습니다.”
5. 진짜 향기는 ‘자립’에서 난다
김군미 소장에게 진짜 향기가 난다면 그것은 이런 ‘펄짓재작소’라는 공간을 운영한다는 데 있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든 생각이랍니다. 그이가 진정 향기로운 까닭은 자기 삶에서 ‘자립’을 실행한다는 데 있지 않나 싶었습니다.
큰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이고 둘째아들 또한 같은 고등학생인데도 아이들 다 키웠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 참으로 드물지요. 김 소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등학교 들어가니 더 편하네요. 옛날보다 더 아침 일찍 등교하고 밤늦게 귀가하니까요. 엄마가 학교 찾아가야 하는 일도 없잖아요. 자유로운 시간이 많아졌어요. 아들이랑 같이 아침 6시 30분 즈음해 일어나 밥만 차려 주지요.”
남편 하는 일이 무엇인지 물어봤습니다. 자동차 딜러라고 했습니다. 그래 지나가는 말로라도, 다음에 차 살 일 있으면 연락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김 소장 웃으면서 하는 말, “아니에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것은 제 일이 아니고) 남편 일이에요.”
매사에 이랬답니다. 남편 하는 일이 남편 일이듯이 아이들 하는 일도 아이 일입니다.
“대학교에 가고 말고는 아이들 본인 몫이잖아요? 아이들도 자립적이라 크게 기대지 않습니다. 진주YMCA 이런 데서 청소년 활동을 고2까지 그러니까 올해 2월까지 열심히 했습니다. 서울에 1박2일로 간다든지 혼자서 다니고 동아리 활동도 많이 했습니다. 이제 고3이니까 이런 것 끊고 공부에 집중하는 모양입니다. 이 또한 자기 판단이고 선택입니다.”
학원에 보내지는 않았는지 물어봤습니다. “다녔어요. 다녔는데, 그 또한 아이 판단이었어요. 초등학교 5학년 영어 학원 다니다가 그만뒀는데 그게 그 친구 생각에 따른 것이지요. 계속 안 다니다가 중3 때 수학을 너무 못해서 수학을 좀 받아야 하겠다 싶어서 다니기 시작해 계속 다니다가 이번 2월에 정리했어요. 선생님과 상의해서 그 친구가 결정했습니다.”
김 소장은 귀가 시각이 늦다고 했습니다. 키우는 강아지한테 밥을 주려고 들어가는 경우가 있지만 그 때도 일이 있으면 도로 나온답니다. 사는 집이랑 펄짓재작소가 가까워서 이리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남편 또한 일 때문에 늦게 들어오고 아이들은 학교에서 오래 머물고 본인도 하는 일이 있으니까 일부러 일찍 들어갈 까닭이 없답니다.
“그래서요, ‘애가 없는 줄 알았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남편도 없는 줄 알았다’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저도 나름 신경을 써요.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래요. 얘기도 많이 하고 아이들하고 관계도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건물 3층 펄짓재작소 들머리.
그렇습니다. 아이나 남편한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아이나 남편한테 집착하지 않고 휘두르지 않으며 휘둘리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이나 남편을 위해 자기 인생을 파묻지 않는다는 얘기랍니다. 자기 인생을 위해 아이나 남편 인생을 파묻지도 않지요.
자기가 그렇게 하는 만큼 상대방한테도 그렇게 합니다. 김군미 소장이 이렇게 자립적으로 살기 때문에 펄짓재작소라는 공간도 탄생할 수 있었겠다 싶었습니다. 전세금 2000만원이 남편 또는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고 김 소장한테 소유권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도드라져 보였습니다.
“저는요, ‘제가 할 수 있는 일만 하자’는 주의랍니다. 2000만원은 제 돈이고요, 남편한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맞지 않다 싶어요. 그래서 돈을 되는대로 모읍니다. 집주인이 전세금을 올려달라든지(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김훤주
※경남도민일보가 펴내는 월간지 <피플 파워> 2013년 4월호에 실은 글을 거의 그대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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