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장삿속이지만 이렇게 가진 바를 내어놓는 사람이 지금은 드뭅니다. 옛날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요. 그이는 남의 말을 귀담아 들을 줄 아는 것 같았습니다.
15년 정도 전에 함께 어울리던 어르신 한 분이 해준 이야기를 듣고 새겼다가 그대로 했습니다. 물론 아무나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은 아니랍니다. 자기 가게 화장실을 그냥 아무나 쓸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 어르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길가에 집을 짓거든 변소를 내놓아야 한다.”
뿐만 아닙니다. 그이는 오가는 길손이라면 언제나 누구나 반깁니다. 가게에서 물건을 사먹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커피랑 군고구마 따위를 내놓아 주전부리까지도 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선창카페 주인 황 마담, 황일규씨.
1. 화장실을 길손에게 내어주는 가게 선창카페
1월 11일 마산역에서 시내버스로 진동까지 가서 바닷가를 걷는 행사를 치렀습니다. 충분히 준비하지 못해 성긴 구석이 있었지만 참가한 일행 40명 남짓은 산속과 갯가에 있는 오솔길을 걸으며 나름 즐거워했습니다.
아침 10시 조금 지나 마산역을 출발한 이들의 종착점은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다구 마을이었습니다. 광암 바닷가에서 얼큰한 생태탕으로 점심을 먹고 이리저리 산길을 헤맨 끝에 다구 마을에 닿았을 때가 낮 2시 30분 어름.
2시간 남짓 걸은 뒤끝이라 특히 여자들은 화장실이 급했던 모양입니다. 다들 산길이랑 갯길을 걸어오는 도중에 아무 동네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동네를 만났다 해도 그런 시골 마을에 지나가는 길손을 위해 개방돼 있는 화장실이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불청객을 위해 고구마를 굽고 있는 황 마담.
어쨌거나 일행은 동네 사람을 붙잡고 물었습니다. 이 동네에 화장실이 없느냐고요. 그랬더니 저기 어항 안쪽으로 놓여 있는 허름한 가건물을 가리키며 ‘저 가게 가면 된다’고 일러줬습니다. 사람들은 떼 지어 몰려갔고, 거기서 일을 볼 수 있었답니다.
다구 바닷가는 조용하고 아름답습니다. 마을 뒤쪽 언덕배기, 임진왜란 당시 평민 출신 의병장 제말 장군 무덤에서 내려다보면 이만한 풍경화가 없습니다. 오목하게 만입(灣入)한데다 양끝으로 산자락이 물리면서 잔잔하게 펼쳐져 나갑니다.
그리고 이게 결정적인데, 가운데에 조그만 섬이 하나 두둥실 떠 있어 파도와 바람의 거셈을 막아주는 것입니다. 이날 걷기에 참가한 일행들은 이런 풍경을 발바닥으로 누렸습니다.
때마침 드러난 갯벌에 들어가 스멀스멀 갯가를 쓰다듬는 바닷물이랑 평행선을 그려보기도 하고 바위를 딛고 걸으며 모퉁이를 돌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절반 정도는 위쪽 도로로 올라가 시내버스로 집에 돌아갔고 나머지 일행은 따끈한 커피라도 한 잔 마시려고 ‘카페’에 들렀습니다. 아까 화장실을 내어주었던 ‘선창 카페’였습니다.
2. 공짜 커피를 아낌없이 나눠주는 카페 주인
척후병처럼 남 먼저 뛰어 들어가 커피를 파느냐고 물었을 때 돌아온 답이 일단은 실망스러웠습니다. 팔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 얼떨결에 옆에 간판을 가리키며 ‘카페라고 돼 있는데……’ 하며 말꼬리를 흐렸더니 ‘어쨌든 들어와 몸이라도 녹이고 가시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반가운 말이었지만, 그래도 일행이 한둘이 아니라 스무 명쯤 되는데 그래도 괜찮겠느냐 했더니 무슨 상관이냐고, 막대 커피지만 커피도 한 잔씩 드리겠다면서 웃음을 지었습니다. 들머리 함지박에 들어 있는 명함을 봤더니, 이름이 황일규였습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이들을 위해 막대커피를 타고 있는 선창카페 황마담.
그날 일행은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편하게 아주 제약 없이 몸을 녹였으며, 주인이 타주는 커피 또한 아무 부담 없이 마셨습니다. 주인은 고구마를 난로 위에 올려놓기도 했는데, 사람들 식탐에 익을 새도 없이 사라지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인은 새로 고구마를 올려놓으면서 이리저리 말을 섞었는데 그이는 말을 재미나게 하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사방 벽에는 그럴 듯한 글귀들도 적혀 있었습니다. 동길산 시인의 ‘무화과 한 그루’라는 시에서 따온 대목도 있었습니다. “꽃 피는 기쁨이 없는 대신에 꽃 지는 아픔도 모르고 살게 내 안에 무화과 한 그루 키우면 좋겠습니다.”
다선(茶禪)으로 일컬어지는 초의선사 말씀도 적혀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곳곳에 걸려 있는 이런 것들이 전체적으로 좀 산만한 느낌도 있었으나 그 색다른 맛이 사람으로 하여금 한 번 빙 둘러보게는 만들었습니다.
또 이런 글 앞에서는 폭소가 터지기도 했습니다. “저승이 얼마나 좋은지, 한 번 갔다 하면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다.”
시인이나 작가보다 독자가 열 배는 더 행복하다는 말을 여기서 실감했습니다. 시인이나 작가는 쥐어짜거나 갖다붙여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고통을 겪어야 하지만, 독자는 그런 고통 없이 주어진 텍스트를 읽으면서 느끼고 즐기고 누리면 그만입니다.
그러다가 좋다 싶은 그럴 듯한 글귀를 만나면 이렇게 적거나 갖다 붙이면 또 그만이고요……. 여기 선창카페 주인장처럼 말씀입니다.
선창 카페는 굴구이와 조개구이가 전공이었습니다.(나중에 보니 실은 굽지 않고 물을 끓여 껍데기째 쪄내는데, 구이보다 훨씬 맛이 좋고 부드러우며 쉽사리 딱딱해지지 않는데다 냄새도 연기도 나지 않았답니다.) 커피 따위는 아예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음식이라도 조금 주문하려고 했더니, 다음에 한 번 찾아와 주시면 되지, 지금 일부러 사줄 필요는 없다며 손사래를 쳤습니다. 그렇게 30분 넘어 한 시간 가량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 나왔습니다.
여기 CD들은 다들 바로 쓰이는 것들이었습니다.
공짜로 나오면 뒤통수가 따가울 것 같아, 한 번 더 1만원짜리 한 장을 건네 보았으나 내민 손이 다시 머쓱해지고 말았습니다.
3. 쫄딱 망하고 나서 인연이 닿은 굴, 굴구이
그러고 나서 2월 4일 다시 찾았습니다. 여기서 언제부터 장사를 하시게 됐느냐고 물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다른 사업을 하다가 날려먹고 이 일을 시작한 셈이었습니다.
“평일은 문만 열어놓고, 주말 보고 하지요. 올해로 7년 됐어요. 다구 마을에 살지 않고 신마산 집에서 출퇴근합니다. 다구 마을에 아는 형이 있는데, 처음에는 그 분 뗏목에서 시작했어요. 10년 전에 쫄딱 망했습니다.
술만 마시고 담배만 피우면서 한 1년 정도 지샜는데, 어느 날 아내가 ‘남의 집에 일하러 나가야겠다’고 하는 거라. 정신이 번쩍 들었지.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한편으로는 술 살 돈도 담배 살 돈도 없어졌고.”
이 대목에서 아내가 일하러 나가는 것이 요즘 세상에 무슨 대수냐고, 다른 집들도 다 그런다고 추임새를 넣었더니 그래도 자기한테는 그렇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아내가 한 번도 남의 일을 나간 적이 없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을 이었습니다. “아는 사람 따라 굴 사는 데 자동차를 타고 온 적이 있습니다. 1kg에 4000원을 주고 사갔습니다. 그게 눈에 들어왔어요. 좀 있다 다시 돌아와 굴을 팔았던 어르신을 찾아갔습니다. 굴을 좀 팔고 싶은데 값을 좀 낮춰 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얼마면 되겠느냐고 물어. 알아서 해 주시면 됩니다 했더니 (1kg에) 3000원이면 되겠냐 했어. 그 길로 시작했어요.”
이렇게 해서 황씨는 인터넷을 통해 굴 파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5000원을 받았습니다. 수수료 떼고 20%는 남았습니다. 잘 팔렸습니다. 같은 인터넷 쇼핑몰에 굴을 파는 사람이 12명 있었는데, 1등은 도저히 따라잡지 못했고 2등은 했다고 했습니다.
여기는 홍합도 많이 나는데 값이 헐하답니다. 그래서 ‘서비스’로 홍합을 조금씩 넣어주는 ‘상술’을 썼답니다. 그이는 이처럼 나누고 베풀면 반드시 그만큼 돌아온다는 정도는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날 참여했던 사람들 요청으로 제가 기념 사진을 찍어드리고 있습니다.
“9년 전입니다. 장화를 신었는데, 만원 주고 사서 작업을 하려고 장화를 신으려는데 눈물이 팍 날라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왜 잘사는 사람만 장화를 신을 수 있었잖아요? 보통은 비오는 날에도 깜장고무신 정도 신고 다녔지만 우리집은 좀 살아서 운동화 신고 비 오는 날은 따로 장화를 신었는데, 지금 물일 하기 위해 장화를 신어야 하니까 설움이 복받쳤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굴과 인연이 이어졌습니다. 신용이 안 되니까 자기 이름으로는 은행 통장을 만들 수 없어 다른 사람 이름으로 내고는 다구 마을에서 뗏목을 빌려 굴을 소포장에 담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 판매에 필수인 택배가 토·일요일에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토요일 일요일에는 여기다 탁자를 몇 낱 갖다 놓고 굴을 구워 파는 생각을 했습니다.
4. 전단 배포 막는 모텔 조바에게도 홍합을 건네고
“신마산에 모텔이 많잖아요? 명함에 약도 그려 갖고 모텔에 들어가 자동차에 뿌리기도 했습니다. 조바들한테는 명함 치우는 것도 일거리고 귀찮거든. 자동차에 명함을 꽂다가 조바를 만났어요. ‘아저씨, 이라지 마이소’ 하는 거라.
그래서 한 마디 눙쳤지. ‘아지매 나도 여기 고객이오’ 하하. 그러고는 홍합을 한 봉지 건넸지. 집에 갖고 가면 삶아 먹고 국 끓여 먹고 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아저씨 적당하게 하고 가이소’ 하는 거야.”
선창카페를 가득 메운 불청객들.
1959년생인 황일규씨는 군대 제대하고 나서 여러 사업을 했습니다. 유통업을 하는 친척 밑에서 일을 배우다 절임 배추를 일본에 수출하는 일을 시작해 비디오가게(촬영까지 했다), 노래연습장, 고철 수집, 종패 판매 등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중국에도 사업을 벌이고 주유소와 보험업체에 생활용품·자동차용품을 납품하는 일도 했습니다.
IMF를 맞아 망했지만 닦아놓은 신용을 바탕으로 다시 일어나 여덟 달만에 새로 집을 장만할 정도가 되기도 했답니다. 그렇게 잘 나가다가, 10년 전에 크게 망했습니다.
“돈을 빌려줬는데 못 받았어요. 대신 공장에서 만들어낸 제품들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 그것들 팔아 만회하려 했는데 잘 안 됐어요. 내 돈만 갖고 했으면 그래도 괜찮았을 텐데, 그러지를 못했어요. 손에 천만원이 있으면 천만원 어치만 해야 하는데, 눈에 3천만원 짜리가 보이면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여서라도 하고 마는 성미였어. 지금은 빌릴 데가 없어서도 그렇게 못하지만…….”
5. 스스로를 못 믿기에 바로바로 행동에 옮긴다는
그이는 한 번 더 돈을 벌고 싶다 했습니다. 돈을 벌어 멀리는 못하고 가까이 있는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돕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럴 때는 반론이 나게 마련이겠지요. ‘지금 하지 않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돈 벌어서 나중에 하겠다는 것은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냐’ 등등…….
저랑 얘기를 나누고 있는 마담 황일규.
“맞아요! 나도 생각이 그래요. 가게에 돈통 놓고 만원 아래 잔돈을 모아 다른 사람 도와볼까도 생각했지만, 나는 내를 못 믿는 사람이거든. 그렇게 모았다가도 필요하면 돈통을 털어 홀라당 쓰고 말 사람이 바로 나거든.
지금 당장 하고 있는 일은 이렇습니다. 먼저 택시를 타면 내릴 때 거스름돈을 돌려받지 않습니다. 며칠 전에도 택시를 탔는데 일흔셋 되는 어르신이 몰았어. 6300원이 나왔는데 만원짜리 드리고 잔돈을 안 받았어요.
가게서도 음료수는 돈을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게 찾아오는 손님한테 때때로 마을에서 나는 오만둥이를 조금씩 나눠드립니다. 소주 한 병 맥주 두 병 오뎅 하나 달걀 세 개 갖고 아는 동생 작업장에 가면 오만둥이 한 ‘바께쓰’ 퍼오거든. 그러면 스무 사람한테 줄 수 있어요.
여기까지 찾아와 주는 게 고맙잖아요. 이렇게 하면서 동네 사람한테 손님 연결도 해주고요. 동네 사람은 하루 열 번 만나면 열 번 다 인사를 합니다. 그게 좋고 편합니다.
또 동네 사람한테는 술값을 한 병에 2000원만 받습니다. 동네에 구멍가게가 없거든요. 구멍가게 와서 마신다 생각하면 됩니다.” 장삿속이라 해도 이런 정도면 괜찮다 싶었습니다.
그이는 ‘뽄지기기(멋부리기)’를 타고났다고 했습니다. 그이는 오른손으로 머리를 매만지고 왼손으로는 오른손을 받치는 시늉을 하면서 “나도 머리를 ‘요래요래’ 하고 다닌 사람”이며 “밥은 안 먹어도 구두는 닦아야 하는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인간성은 좋은 사람이라고도 했습니다. 인간성 더러웠으면 빚잔치하고 어떻게 그대로 눌러 살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습니다.
6. ‘단디’ 해서 한 번 더 돈을 벌어보고 싶은 사람
“아버지가 늘 하신 말씀이, ‘자슥아 단디 해라’였습니다. 하지 말라는 말씀은 절대 하시지 않았어요. 아버지한테 한 맺히게는 하지 않았지만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으니까 불효자지요.
‘불효자는 언제나 당신 떠나고 나서 웁니다.’ 이제 정말 아버지 말씀대로 ‘한 번 하되 단디 해’ 보고 싶습니다. 이자는 몰라도 원금은 건지고 싶어요. 8~9년 있었는데 내가 여태 몰랐던 것이 여기 있더라고요.
나는 바다 사람들이 무엇 먹고 사는지도 몰랐습니다. 여기 처음 왔을 때는 ‘이런 데도 사람 사나?’ 싶었지요. 그런데 이제는 여기 다구 마을 바닷가에서 보고 듣고 배운 바를 바탕삼아 다시 한 번 돈을 벌어보고 싶습니다.”
재미나게 말을 잘하는 사람, 조금은 손해 보고 사는 인생이 잘 사는 것이라 여기는 사람, 그러면서도 다시 한 번 돈을 제대로 벌어보고 싶은 사람…….
그이는 오늘도 ‘선창카페’에 출근해 휴대전화번호가 확보된 800명 남짓 되는 손님들한테 문자를 보내면서 틈 나는대로 등(燈)을 만든답니다.
황 마담이 등을 만드는 작업실.
이렇게 만든 등들을 선창카페를 밝히는 데도 쓰고 아직은 열어주지 못한 아내의 찻집을 위해 한 켠에 쌓아도 둔답니다. 그러다 갖고 싶어 하는 손님이 나타나면 비싸지 않은 값에 팔기도 한답니다.
그래서 여기는 어두워도 환한 공간이 됐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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