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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본 세상

4.19 원흉 최남규는 일본경찰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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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3.15의거나 4.19혁명 등 시민항쟁에서 시위대에 총질을 하거나 고문을 가한 악질 경찰관들의 전력을 찾아보면 일제 강점기 때 일본 경찰 출신들이 많습니다.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유기한 악질 경찰 박종표도 그런 케이스였죠. 그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에 이미 포스팅했으니 참고하시고... 친일헌병 박종표는 김주열 살해한 원흉이었다


오늘 소개할 사람은 당시 경남경찰국장으로 3.15부정선거를 지휘한 주범이자, 3.15 마산의거 당시 시민들을 살해하고 온갖 악행을 저질렀던 최남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3.15와 4.19로 이어지는 혁명 과정에서 최남규의 지휘를 받은 경남 경찰이 어떤 짓을 벌였는지 한 번 보시죠.


국회조사단 앞에서 증인으로 출석해 조사를 받고 있는 최남규(가운데).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60년 당시는 경찰력으로 정권을 유지하던 시절이었던 만큼 3·15 이후 부산지검 한옥신 부장검사팀의 수사가 시작된 후에도 마산 경찰의 기세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한옥신 검사의 회고록(국제신보 61년 3월 연재)에 따르면 당시 한 검사 등이 고문경관들을 조사하기 시작하자 당장 검찰총장으로부터 “큰일이 났다”며 연락이 왔다. 검사가 고문경관을 고문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검찰총장은 이것이 사실이라면 엄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출처를 알고보니 경남경찰국장 최남규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검사들까지 함정에 몰아넣으려는 경찰의 수작이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한 검사팀은 한동안 수사주도권이 흔들리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이에 수사팀의 김형대 차장검사가 최남규 경남경찰국장에게 “마산에 공공연한 바람을 일으켜서 되겠소?”하며 터무니없는 말을 퍼뜨린데 대해 힐난을 했더니, 최 국장은 오히려 “내 뒤엔 5,000 경찰이 있소”하며 공갈을 치더라는 것이다.


때마침 자유당에서도 한 검사팀에게 후퇴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고문경관들은 재빨리 상경해 권력자들을 찾아다니며 “우리를 잡아넣으면 나라가 망한다”면서 “검사들의 발을 묶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다.


민주당 도의원으로 3·15시위를 주도한 정남규씨를 빨갱이로 몰아가려 했던 것도 경찰의 아이디어였다.


한 검사가 그 근거를 밝히라고 했더니 경찰은 10여년 전에 형사들이 만들었다는 요시찰인명부를 들이밀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한 검사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개탄하고 있다.


“형사들이 함부로 만들었던 확인없는 시대의 유물이 그대로 효력을 가진다면 그것의 작성자는 법의 화신이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적색분자들과의 접선여부, 비노출당원 또는 전향을 가장한 당원의 혐의여부를 물었더니 그런 행동은 없었다는 것이다. 정남규씨의 남로당 비밀당원설이 요시찰인명부에서 나왔고 오열의 행동이 단정된다면 형벌권의 발동이 일개 순경의 힘으로써 형성된다는 무서운 결론이 나온다.”


당시 경찰의 악행은 이 뿐이 아니었다. 북마산파출소 방화범을 날조하고 숨진 학생의 호주머니에 ‘인민공화국 만세’가 쓰인 불온문서를 넣어놓고 이들을 ‘빨갱이’로 몰려고 했다가 들통난 적도 있다. 더 분노할 일은 3월 15일밤 닥치는대로 시민들을 잡아들인 경찰이 어떤 묘령의 여성을 성폭행하기도 했다고 하니 80년대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만행이 이미 60년 마산에서 자행됐던 셈이다. 경찰관은 그 여성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시청 옆으로 끌고가 욕을 보였다는 것이다.


한옥신 검사는 이 사건에 대해서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어둠과 전율 속에서 대꾸한번 못해본 정조의 유린이었다. 나는 이 정보를 얻은 후 시청주변에 있는 여러 사람을 광범위하게 조사했다. 그러나 혼란과 어둠 속에서 악몽같이 스치고 간 이 사건은 피해자가 나타나질 않아 끝내 꼬리를 잡아내지 못하고 말았다.”


시민을 향한 경찰의 발포도 상식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검찰 수사관이 부상자들을 조사한 결과 대부분이 뒷등에 맞은 관통상이었고 심지어는 골목골목을 찾아다니며 집안에서 놀고 있는 아동에게까지 총질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그때도 오히려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기세등등하게 검찰의 조사에 응했다고 한다. 남성동 파출소의 발포경관 김종복은 한 검사가 은근히 “얼마나 수고를 했느냐”고 위로의 말을 던졌더니 이 사람은 영웅이나 된 듯이 자기가 겪은 일을 털어놓았다. 그는 “파출소에 들어오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쏴 죽이라고 지시했다”고 당당히 말했던 것이다.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시민, '쓰리쿠숑' 원리로 변명


그러나 최남규 경찰국장은 이후 경찰의 발포를 변명하며 당구의 ‘쓰리쿠숑’ 원리를 강변했다고 한다. 즉 하늘을 보고 공포를 쏘았는데 그 총알이 공중으로 날아가는 도중 군중이 던진 돌멩이와 ‘키스’를 하여 되돌아오다가 군중의 뒤통수에 맞았다는 것이다.


부정선거 원흉으로 최남규가 10년 구형을 받았다는 동아일보 기사.


경찰의 만행은 김주열의 처참한 시체를 유기하는데 이르러 극에 달했다.


전북 남원 출신으로 이모할머니가 있던 마산에 온 16세 소년 김주열은 마산상고에 입학시험을 치른 후 3월 15일 밤 마산시청 앞에서 벌어진 시위에 형 광열군과 함께 합류했다. 그러나 주열은 이곳에서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에 오른쪽 눈이 관통돼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시위군중이 모두 진압되고 어두운 거리엔 매캐한 화약냄새만 남아있을 때였다. 마산경찰서 경비주임이었던 박종표 경위는 이날 밤 10시쯤 교통주임으로부터 마산 남전지점 앞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괴이한 형상의 시체를 발견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손석래 경찰서장으로부터 “알아서 처리하라”는 언질을 받고 그길로 지프차를 타고 현장에 나가 시체를 담아싣고 일단 경찰서로 되돌아 왔다. 여기서 그는 시체를 유기하기로 마음먹은 후 다시 월남동 마산세관 앞 해변가로 시체를 가져가 순경 한대진과 지프차 운전수의 조력으로 김군의 시체를 바다에 던졌던 것이다.


이 같은 만행을 저지른 박종표는 일본 헌병출신이었다. 그의 이름은 ‘아라이(新井)’였고 계급은 오장(伍長)이었다. 일제시대부터 이미 민족운동가들을 숱하게 고문학살해온 조선민중의 원흉이었던 것이다.(홍중조. <3·15의거>, 1992)


이렇게 유기된 김주열의 시신은 그로부터 27일 후인 4월 11일 오전 10시 중앙부두 앞 바다에 참혹한 모습으로 떠올랐다. 당시 부산일보 허종 기자는 이 모습을 단독촬영해 보도했고, 이 사진은 AP통신을 통해 전세계로 타전됐다.


경찰은 김주열의 시신발견으로 또다시 마산시민이 벌떼처럼 궐기하자 4월 14일 아무도 모르게 시체를 빼내 고향 남원으로 보내고 말았다.


주열의 싸늘한 시체를 실은 앰뷸런스가 남원 고향집에 도착하자 경찰은 김군의 모친 권찬주 여사에게 시체 인수증의 서명을 요구했다.


거의 실신상태에 있던 권 여사는 어금니를 깨문 채 벌떡 일어나 싸늘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시체를 못받겠으니 부정선거로 당선된 이기붕이한테 갖다주시오!”


경찰의 만행은 이랬습니다. 그러면 최남규라는 인간이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찾은 최남규의 인적사항입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일제 때 경부보를 했던 인물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구체적인 행적을 찾아봤습니다.


최남규(崔南奎) / 대산영일(大山榮一) -순사-순사부장-경부보

 

190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32년 12월 경성 본정경찰서 순사(월35원)를 지냈다.

1937년 3월 본정경찰서 순사부장(월39원)을 지냈다.

1937년 7월 7일부터 1940년 4월 28일까지 본정경찰서 외근 순사부장을 지냈으며, 이 기간동안에 동원소집 및 징발업무, 일본군 군사수송 경계업무, 방공 방위 방첩 및 군기(軍機) 보호업무, 군대 및 유가족 후원업무 등을 수행했다.

1940년 4월 29일 중일전쟁 당시의 공로자로 공적조서가 작성되어 훈포상이 상신되었는데, 은사금 수여금액은 70원, 훈격은 공로(功勞), 관등은 판임관 4등대우였다.

1940년에서 1943년 사이 본정경찰서 순사부장을 지낼 때 1940년 7월 월47원, 1943년 2월 월51원을 받았다.

1944년 3월 31일 경기도 인천경찰서에서 도순사를 지내던 중 경기도 도경부보로 임명되어 월56원을 받고 경기도경찰부 형사과로 발령되었다.

해방 후 1945년 경기도경찰부 경부를 지냈다. 1947년 경기도경찰청 수사과에서 근무했다.

1949년 종로경찰서 경감을 지냈다.

1950년에서 1952년 사이 서울특별시 경찰국 수사과장(총경)을 지냈다.

1953년 치안국 정보수사과 제1계장을 지냈다.

1954년 4월 4일부터 1955년 4월 6일까지 총경으로 제10대 경북 남대구경찰서장을 지냈다.

1955년 치안국 보안과 총포화약계장을 지냈다.

1955년 4월 6일부터 같은 달 12일까지 제11대 서울 서대문경찰서장을 지냈다.

1955년 8월 17일부터 1956년 8월 22일까지 총경으로 제15대 서울 영등포경찰서장을 지냈다.

1956년 경북 남대구경찰서 서장을 지냈다.

1956년 전남경찰국 사찰과장을 지냈다.

1957년 서울시경찰국 사찰과장을 지냈다.

1957년 7월 10일부터 1958년 2월 25일까지 제16대 경북 대구경찰서장(총경)을 지냈다.

1958년 경북경찰국 사찰과장을 지냈다.

1958년 치안국 특수정보과 제4계장을 지냈다.

1959년 경상북도 경찰국장(경무관)을 지냈다.

1959년에서 1960년 사이 경상남도 경찰국장(경무관)을 지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3·15부정선거의 핵심주범으로 체포되었다.



이후 신문자료를 찾아보니 부정선거 주범으로 체포돼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 중 병보석 상태에서 1962년에 죽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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