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죽을 때까지 호사를 누린 김성곤
성곡 김성곤(省谷 金成坤), 제 기억에서 까맣게 잊혀져 있던 이 이름이, 하동 쌍계사에서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 기억에 그이는 독재자 박정희 앞잡이이며 동시에 돈줄입니다. 그러면서 본인은 갖은 호사를 죽을 때까지 누렸습니다. 팔자도 참 좋습니다.
물론, 그이에 대한 악감정은 없습니다. 그냥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그이의 이름이 쌍계사 들머리 돌다리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아마도 오래 전부터 있었을 텐데, 제가 무심해서 이번에야 봤던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봤습니다.
“김성곤(1913~1975). 호는 성곡이며,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하고 금성방직· 동양통신·연합신문 사장, 쌍용양회·쌍용산업 회장을 지냈다. 1958년 제4대 민의원에 당선돼 정치가로 활동했다.
1959년 국민대학교 재단 이사장을 맡았으며, 1963년부터 제6~8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민주공화당 재정위원장과 중앙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1971년 10월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안 가결을 둘러싼 이른바 ‘10·2항명’의 핵심으로 지목돼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뒤 민주공화당을 탈당하고 정계를 떠났다.
1965년 성곡언론문화재단·성곡학술문화재단을 설립하고 1969년 국제언론인협회 이사로 선출됐으며 1973년부터 3년 동안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2. 항명했으나 경제계에서는 살아남아
박정희 시절에는 이른바 ‘항명’이라는 말이 두루 쓰였습니다. 박정희가 공화국의 대통령이 아니고 전제왕국의 군주였기 때문입니다. 그 아래에서 국회의원 등등을 하는 나부랭이들은 말을 듣거나(순명) 듣지 않거나(항명)였습니다. 다른 여지는 없었습니다.
1971년 10월 2일, 민주공화당 일부 국회의원들이 야당을 편드는 바람에 오치성 내무부장관의 해임 건의안이 가결됐습니다. 이를 두고 10·2항명 파동이라 하지요. 독재자인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항명의 객체고 이른바 공화당 4인방이 그 주체였습니다.
1971년 6월 독재자인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김종필을 국무총리로 삼아 내각을 개편했습니다. 이보다 앞선 1969년 3선 개헌을 할 때는 김종필이 이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기에 그이를 뒤로 미뤄놓고 있었습니다.
3. 유신본당 김종필 못지 않은 해악을 끼친
대통령 연임 금지를 폐지하고 세 차례 연임을 허용하는 개헌이었는데요, 그 해 9월 14일 일요일 새벽 2시 야당이 농성하고 있던 국회 본회의장을 피해 제3별관에서 여당 쪽 의원 122명이 기명투표방식으로 개헌안을 통과시켰고 10월 17일 국민투표에서 77.1% 참여에 65.1%의 찬성을 얻어 개헌이 성립됐습니다.
3선 개헌은 독재자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보장하는 유신헌법으로 곧바로 이어집니다. 박정희는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선거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다시 나섰습니다. 상대는 ‘박정희가 당선되면 더이상 대통령선거는 없다’고 예언했던 야당의 김대중 후보였습니다. 어쨌든 아슬아슬하게 당선됐고, 이듬해인 72년 유신헌법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 체육관 선거를 만듭니다.
3선개헌은 유신으로 가는 징검다리인 셈인데, 이 징검다리를 김성곤을 비롯한 이른바 4인방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김성곤 등등은 유신본당을 자처하는 박정희 시절의 2인자 김종필만큼이나 우리 역사에 해악을 끼친 인물입니다.
왼쪽 다리에는 삼신산 외청교라 적혔고 오른편에 시주 성곡 김성곤이 있습니다.
3선 개헌은 독재자 박정희의 뜻을 따라 이후락 청와대비서실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민주공화당 김성곤·백남억·길재호·김진만 등 4인체제가 주도했습니다. 물론 이들은 김종필 반대세력이었고 박정희는 3선 개헌을 위해 김종필과 그 날개들을 분질러 놓았습니다.
김성곤을 비롯한 4인방은 그 뒤 기세가 등등해졌습니다. 독재자 박정희는 당연히 이를 반기지 않았습니다. 71년 대선이 끝나자마자 김종필을 수반으로 내각을 짜고 오치성(육사 8기 출신, 5·16쿠데타 가담)에게 내무부장관을 맡겨 김성곤 일파를 견제했습니다.
실제로 오치성은 김성곤을 비롯한 4인방 계열로 분류되는 시장·군수와 경찰서장을 내쳤다는데, 때마침 야당이 실미도 사건과 광주 대단지 사태를 들어 오치성을 비롯한 몇몇 장관의 해임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이에 김성곤 등이 편승해 오치성을 날렸습니다. 그러자 독재자 박정희는 중앙중보부를 시켜 이들을 손보게 했습니다.
참고삼아 말씀드리면, 실미도 사건은 1971년 8월 23일 인천 앞바다 실미도에서 훈련받던 684부대 북파공작원들이 부대원을 살해하고 뛰쳐나와 빼앗은 버스를 타고 중앙청을 향해 진격하다가 자폭한 사건입니다.
광주대단지 사태는 1971년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지금 성남시) 일대에 서울 빈민촌 출신 10만 명 남짓을 집단으로 이주시켰으나 마실 물 등등 아무 대책 없음에 주민들이 폭발해 일어난 봉기 또는 폭동입니다.
4. 어쩌다 쌍계사에까지 이름을 새겼을까
그러나 박정희는 김성곤을 뿌리까지 뽑지는 않았습니다. 쌍용양회·쌍용산업 회장을 그대로 유지하게 했습니다. 더 나아가 상공회의소 회장까지 하도록 했습니다. 그에 걸맞은 대가가 박정희에게 돌아갔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치와 경제 양면에서 누릴 만큼 누리고 부릴 만큼 부린 사람이 그러니까 김성곤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이 박정희 치하에서 한둘이었겠습니까만, 아무래도 이 사람 고향이 저희 종가가 있는 경북 고령이다 보니 어릴 때부터 얘기를 많이 들었고, 그 얘기들이 20대 지나면서 나름대로 정리되다 보니 독재자 박정희의 앞잡이인 동시에 돈줄로 굳어졌습니다.
그 돈줄이, 여기 쌍계사까지 뻗었던 모양입니다. 김성곤은 무엇을 바랐을까요? 박정희에게서는 현세에서 누리고 부릴 수 있는 권력과 돈을 받았으니까, 부처님에게까지도 내세에서 누릴 그 무엇을 바랐을까요? 아무튼 앞으로는 여기 쌍계사 오면 이 돌다리를 넘을 때 ‘성곡 김성곤’ 그 이름에 눈길을 한 번 던지지 않을 수는 없겠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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