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광우병 국면에서 운동권이 남길 성과는?

김훤주 2008. 6. 12.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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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0일, 처음으로 촛불집회에 제대로 참여했습니다. 그동안 참가하지 못한 까닭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펼침막 나누기 운동을 하느라 시간을 낼 수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얼굴들을 마산 창동 네거리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마산희망자활센터에서 부장으로 일하시는 김미영 선배가 그런 대표입니다.

광우병 국면에서 갑갑함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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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촛불집회가 한 달 넘게 이어지면서 갑갑하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이른바 운동권(진보진영이라고도 합니다만)뿐 아니라 대중도 갑갑함을 느낍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갑갑함은 이명박 정부가 더 크게 느낄 것 같기도 합니다.

촛불집회에서 느끼는 갑갑함의 실체는 이런 것입니다. 대열에서 자연스럽게 “이명박은 물러가라!”는 구호가 터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따라 외칩니다. 그런데, 이명박이 물러간 대통령 자리는 누구 차지가 될까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입니다.

당장은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이지만, 이명박이 물러나면 다음 대통령으로 가장 앞서 꼽히는 인물이 아마 박근혜 말고는 없을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한나라당이 아닌 다른 진영에서는 이명박 퇴진 다음에 진행될 프로그램에 대비할 자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만들어진 자원이 없다면, 자원을 마련하려는 준비라도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이른바 ‘광우병’ 국면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때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펼쳐졌습니다. 아무 예상도 하지 못한 사람들한테 무슨 준비를 할 겨를이 있었겠습니까?

운동권은 갑갑해할 까닭이 전혀 없다

어제 문자메시지가 날아왔습니다. 촛불집회 주최 쪽에서 보냈는데, “정의로운 길에 나선 이상 승리는 우리 것입니다.”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잠깐 생각한 다음, “질 수도 있어요. 우리가 한 일 별로 없기 때문에 져도 억울할 일 없어요.”라고 답을 보냈습니다.

제 말의 요지는 ‘착각하지 말자.’입니다. 촛불집회가 정의로운 길이라면, 이 정의로운 길에 ‘나선’ 사람은 운동권이 아닙니다. 대중이 앞서서 정의로운 길을 열어 나아갔습니다. 만약 운동권이라 이를만한 집단이 있다면, 운동권은 그 길 가는 위에 얹혀 있을 뿐입니다.

물론 이리 말하면, 억울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역마다에서, 촛불집회 성사를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해온 운동권이 그렇습니다. 자연발생인 것처럼 비치는 촛불집회조차, 사실은 목적의식으로 애쓴 이들이 없으면 이뤄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번 광우병 국면을 두고 운동권이 한 일이 있고 그것이 작지 않다고 여기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이리 착각하니 바로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고 국면을 어떻게든 주도해야 한다는 다른 착각까지 하게 됩니다. 별로 내어놓은 것도 없으면서 이문을 챙기려 하면 도둑놈 심보라는 욕을 먹기 십상입니다.

대중의 자발성을 보호 촉진하자

지금 촛불집회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대중의 자발성입니다. 누구도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보기를 들자면, 우리 지부 조합원이 모두 75명이고 이 가운데 파견돼 나가 있는 이가 스물 가까이 되는데도, 10일 촛불집회에 참여한 이가 29명씩이나 됐습니다.

집행부가 아무리 다그쳐도 이렇게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스스로 관심을 갖고 무엇인가 표현해야겠다 마음먹지 않는 이상 이렇게 많이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운동권이 할일이란 바로 이 자발성을 촉진.보호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운동권이 조급증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넘어서, 이른바 ‘정권 퇴진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든지, 정부정책 전반에 대한 반대 투쟁으로 ‘전선’을 넓혀야 한다든지 하는 주장은 하지 않을수록 좋겠다는 얘기입니다. 여러 주장의 다양한 제기를 막을 필요는 없겠으나, 초점은 ‘광우병’에서 벗어나지 말자는 것입니다.

대중과 잘 소통하는 방법만 찾아도 큰 성과

대신에 날마다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는 촛불집회에 그냥 대중의 일원으로 열심히 참여하는 선에서 그치면 좋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촛불집회의 주인은 운동권이 아닌 대중이므로 그들에게 주인 대접을 하자는 말씀입니다.

‘재협상’이 이뤄지지 않는 이상 촛불은 절대 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대중의 요구가 ‘재협상’에서 다른 무엇으로 바뀌지도 않을 것 같고, 이명박 정부도 손쉽게 양보할 만한 내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타협할 여지도 없는 것 같습니다.

대중의 요구를 따라,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말고, 모두가 끝까지 터벅터벅 가보는 것입니다. 그리 하는 대열 가운데에서 대중이 요구하는 방식과 반응하는 방식을 똑똑하게 살펴, 이를 바탕으로 호응을 받으면서 다가가는 방법을 찾아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명박이 물러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따위 이런저런 변수를 두고 갑갑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별로 밑천을 들이지 않은(또는 못한) 운동권에게는 주제넘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래도 되고 저래도 상관없는 남의 일일 뿐입니다. 이런 데 정신 팔기보다는, 이들 주인의 행동양식과 사고방식과 말투 등을 알아내 장래 활동의 밑천으로 삼는 편이 남는 장사일 것입니다.

여태 운동권이 비판받아온 내용 가운데 으뜸이 바로 대중을 너무 모른다는 점이었지 않습니까? 운동권은, 상대방이 듣든 말든 하고 싶은 이야기만 운동권 ‘사투리’로 쏟아낼 뿐, 대중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대중이 얼마나 달라져 있는지 제대로 알아본다는 취지까지 더해 그들이 무슨 말 무슨 행동을 하는지 꼼꼼하게 알아보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대중의 언어로 똑바로 소통하지 못한다는 가장 큰 약점을 조금만이라도 극복한다면 커다란 성과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김훤주(전국언론노동조합 경남도민일보지부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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