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프랑스의 ‘연대’와 우리나라 ‘적선’

김훤주 2008. 6. 9.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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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등지에서 하는 ‘적선’

언론노조 경남도민일보지부에서 지부장을 맡아 있는 바람에 요즘 들어 서울에 가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케이티엑스를 타고 갈 때가 태반인데, 서울역에서 만나는 첫 서울 사람은 대체로 노숙자라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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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에서 사회단체 등이 나눠주는 밥을 노숙자들이 먹는 모습

이들은 서울역 앞에서 참았던 담배를 피울라치면 어김없이 저한테 다가와 담배를 하나 달라거나 돈을 한 푼 달라고 합니다. 저는 그러면 어쩔 수 없다는 듯 싱긋 웃으며 달라는 대로 담배나 동전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적선’을 하곤 합니다.

옛날에는, 그이들에게 돈이나 담배를 거의 주지 않았습니다. 그이에게 잠자리나 먹을거리 따위를 줘야 하는 주체가 국가(state)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그이들에게 무엇인가를 주면 그것이 국가가 그이들에게 제대로 된 복지를 제공하는 시점이 늦춰지는 악순환을 만들리라는 것이죠.

이제 생각을 바꿨습니다. 저는 제가 개인으로서 할일(또는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그만이고, 이와는 따로 국가로 하여금 우리 사회 구성원의 기초 생활을 보장하도록 다그치는 일은 그것대로 또 하면 그만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저한테 다가온 노숙자들은, 담배를 달라는 경우는 말로 그리 요구를 하지만 돈을 달랄 때는 그냥 ‘적선’이라는 말도 않고서, 최대한 불쌍해보이도록 얼굴을 찡그리고는 손을 내밀기만 합니다. 어깨를 움츠린 채로 제 얼굴을 올려보면서 말입니다.

지난해에는 부산에 일이 있어서 창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가 지하철 동래역을 자주 오가곤 했습니다. 동래역 2층 통로 구석에서 한 장애인이 돈통을 놓고 구걸을 하곤 했는데, 그 앞에 적선하세요라고 서투르게 쓰인 종이가 있었다고 저는 기억합니다.(아닐지도 모릅니다. 다른 데서 본 풍경하고 뒤섞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독일 프랑스 거지는 어떻게 ‘적선’을 청할까?

저는 이 ‘적선’이라는 말을, 예전에는 그냥 쓰는 말이려니 별 뜻 없이 받아들였는데, 이 낱말 하나에도 우리 사회를 바탕에서 관통하는 어떤 집단정신이라 할만한 무엇이 흐르고 있음을 눈치채게 됐습니다. 다른 나라 다른 사회에서는 다르게 한다는 말을 듣고서입니다.

2006년 1월 21일, 문화평론가 진중권을 우리 경남도민일보 독자 모임에서 모셔와 강연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주제는 박사 황우석의 줄기세포 연구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였지 싶습니다. 진중권은 이 때 우리나라를 다른 나라 다른 사회와 많이 대조해 보여줬습니다.

올림픽에서 선수가 메달을 땄습니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가슴 가득 뿌듯하게 느끼면서 우리나라 만세다 이렇게 생각하는 반면 유럽 또는 ‘심지어’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 사람들은 야 걔네들 대단하다, 저 친구는 참 좋겠네, 여긴다는 것입니다. 국가주의 의식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지나치다는 얘기지요.

이런 얘기들 가운데 하나가 거지들의 구걸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나라마다 역사가 다르고 전통이 달라서 방법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진중권은 자기가 유학하면서 겪은 일을 얘기해 줬습니다.

독일 거지는, 구걸에 앞서 자기가 이리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주욱 설명을 한답니다. 이를테면 무슨무슨 수상의 무슨무슨 정책 때문에 실직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리 된 상황에서 이런저런 취업 노력을 해 봤으나 다시 이런저런 사정으로 잘 안 됐다, 이래서 이제 빌어먹을 수밖에 없게 됐으니 여러분, 한 푼 주십쇼, 이렇게 이어진답니다.

프랑스 거지가 어떻게 하느냐도 진중권은 일러줬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노숙자 같은 이들이 지하철 같은 데서 동냥을 할 때, ‘여러분 저에게 연대의 손길을!’ 이렇게 하소연한다고 말해 줬습니다. 저는 독일 거지 얘기까지는 진지하게 듣다가 이 대목에서 그냥 웃음을 크게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프랑스는, 제가 알기로, 연대의 나라입니다. 노동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아닌 학생이나 농민을 위해서도 파업을 하는 나라, 그리고 그렇게 해도-우리나라 같으면 조중동 같은 불량 휴지들이 개 떼 같이 들고 일어나 물어뜯겠지만-대부분이 당연하게 여기는 나라…….

전에는 그러리라 생각도 못했지만, 듣고 보니 정말 그럴 듯했습니다. 앞뒤 빈 틈 없이 따지기 좋아하는 독일 사람들은 그리할 수밖에 없는 필연을 논리로 설득하고, 해방(Liberte)과 평등(Egalite)을 위해 형제애(Fraternite)로써 민중들이 연대(Solidarite)해 대혁명을 일으켰던 프랑스에서는 그리 할만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프랑스대혁명은 1789년 터져 1871년 빠리꼬뮌까지 이어집니다. 시작 전후와 마감 전후까지 치면 거의 100년에 걸쳐 있는 대사건입니다. 그러니 사회 전반에 넓고도 깊은 영향을 새겨 넣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1789년 직후에는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연필이 잘 써지지 않으면 “연필 참 봉건적이군!” 했다니 말입니다.

우리나라 ‘적선’과 프랑스의 ‘연대’

우리나라 적선은 어떤 정신 또는 전통 위에 놓여 있을까요? 제가 단정을 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선업(善業)을 쌓는다는 뜻일 텐데, 이것이 단순한 기복(祈福)에서 왔는지 아니면 거지나 자기 자신이나 다 같은 생명이고 공동체 구성원이라는 연대 의식에서 왔는지를 저는 뚜렷하게 알지 못합니다.

제 어릴 적 기억에 비춰보면, 아침마다 거지 한둘이 찾아오게 마련이었는데, 어머니는 이들을 나중에(집안 식구 밥 먹고 나서) 오라고 돌려보내시거나 정말로 밥이 없어서 돌려보내신 적은 있어도 다른 까닭으로 돌려보내시지는 않았는데, 자기보다 처지가 못한 이들을 거둬주는, 연대의식의 발로일 개연성이 더 높아 보이기는 합니다. 또 선업이 쌓이면 복덕을 누리게 되리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독일 거지하고는 닮은 점이 없는 것 같고, 프랑스 거지와는 조금 많이 닮아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대혁명의 전통 속에 있는 프랑스 거지는 혁명 정신을 오늘날에도 실현해 달라는 얘기를 ‘연대’라는 낱말로 나타냈고, 우리나라 거지는 나중에 복덕의 효과를 누리리니 이를 믿고 지금 선업을 쌓으시라는 식으로 ‘연대’의 정신을 돌려 말한 셈이 아닐까 여겨봅니다.

‘적선(積善)’에 담긴 정신만큼은 이어나가기를!

다른 이를 위해, 재물이든 정신이든 자기에게 있는 일부를 떼어서 내놓는 일을 일러 적선이라 하는 관행만큼은 내내 없어지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점점 이 말을 쓰는 경우 자체가 점점 사라지고 있으니 조금은 씁쓸하고 쓸쓸합니다.

하지만 내친 김에 말씀드리자면, 더욱 나아가, 거지한테 동냥을 준다는 사회문화역사적 맥락을 조금은 벗어나와, 적선의 원래 뜻을 조금만이라도 되찾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해서,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벌이는 운동이나 투쟁을 연대운동이나 연대투쟁이라 하지 않고 적선운동, 적선투쟁이라 일컫는 쪽으로 승화 발전(?)시키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저는 마냥 해보는 것입니다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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