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도 걷기 좋은 마산 둔덕 골짜기

여항산은 마산과 함안을 가른답니다. 여항산 북쪽은 함안군 여항면이고 남쪽은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이랍니다. 비가 내리면 여항산 마루가 분수령이 돼서 함안쪽으로는 함안천 물줄기를 이루고 마산쪽으로는 진전천으로 물이 모여 흐릅니다.

함안천은 함안 일대에 평야와 습지를 이룬 다음 남강과 낙동강을 거쳐 바다로 풀려나가고, 진전천은 바다로 곧바로 나가면서 둘레에 사람들 부쳐먹을 농토와 더불어 창포만에다가 너른 갯벌을 베풉니다.

여항산은 골짜기가 깊은 덕분에 거기서 발원한 이 두 물줄기에 네 철 거르지 않고 풍성하게 물을 내어줍니다. 진전면 둔덕에서 의산 마을 이르는 골짜기가 두루 여유로운 까닭이 여항산에 있는 셈입니다.

둔덕은 여항산 마산쪽 비탈에서 가장 깊숙한 데 있는 마을이랍니다. 마을 뒤쪽 산자락에는 함안으로 지방도 1029호선을 잇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시내버스는 여기를 종점으로 삼습니다. 미리 장만한 떡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한 뒤 11월 1일 오후 1시 20분 진동환승장에서 올라탄 75-1번 버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시 조금 못 미쳐 내려 둘러본 마을은 이미 산그늘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보통은 마을 바깥쪽에 정자나무가 있게 마련인데 여기는 별나게도 마을 안쪽에 커다란 느티나무 두 그루가 버티고 섰습니다. 어쩌면 옛날에는 이 마을 사람들이 산 넘어 함안이나 진주로 주로 드나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길가에는 콩대가 깔려 있고 맞은편 농로에서는 할머니 한 분이 무엇인가를 털고 있습니다. 아래쪽 들판은 대부분 가을걷이가 끝났습니다.

언덕배기에서는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고 개울가에서는 주로 갈대가 머리를 주억대고 있습니다. 일찌감치 돌보기를 그만둔 듯한, 피가 사람 키 높이만큼 자랐고 반면 벼는 낟알이 제대로 여물지도 않았을 만큼 새들새들한 논도 한 배미가 있습니다.

버스를 타고 들어온 길을 되짚어 걷습니다. 도로가 넓지 않아도 크게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2시간 20분 남짓 걷는 동안 도로에서 만난 자동차를 세어봤는데 열넉 대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한적한 길이 도심 가까운 데 여태 남아 있다는 사실이 고맙습니다. 이런 고마움이 오래 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여기 지방도 1029호선이 함안과 마산을 이어 여항산 어깻죽지를 넘나들게 되는 날이 머지 않은 듯하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걸을만한 길이랍니다. 여기에 더해 양쪽 골짜기도 나름 그럴 듯합니다. 혹할 정도로 빼어난 풍경은 아니지만 이렇게 거닐면서 스멀스멀 단풍 드는 모습을 즐기는 눈맛이 나쁘지 않았습니다.(이런 길은 겨울에 걸어도 꽤 괜찮답니다.)

지난해와 견주면 올해는 단풍이 그다지 아닌데도 이 정도면 괜찮겠지 싶었습니다. 소나무가 우거진 젊은 산은 단풍이 제대로 들지 않습니다. 여기 늘어선 산들은 그렇게 젊지 않고 기슭에서부터 마루에 이르기까지 잎이 넓고 키가 큰 나무들이 많아 골고루 단풍이 들고 있었습니다.

들판을 보니 올해 나락 농사는 대체로 끝난 듯했습니다. 콩이나 깨는 거두는 일이 조금 남았지 싶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농사를 위해 벼를 심었던 논을 새로 갈고 골을 탔습니다. 그렇게 하고 비닐을 씌운 땅에다 사람들 파를 심는 모습이 많았습니다.

감나무도 많았지요. 집안에도 많고 집밖에도 많습니다. 산기슭 높다랗게 솟은 감나무 한 그루에는 참 많이도 감이 열려 있었는데 한 사람이 그 나무 중간 즈음에까지 올라가 바지랑대로 감들을 끌어담고 있었습니다. 그 바로 아래쪽 논에는 그렇게 딴 감이 실린 경운기가 한 대 있었고요.

이밖에도 산비탈이나 개울가에는 돌감나무가 여럿 있었답니다. 가까운 나무에 다가가 감을 세 개 땄습니다. 씨가 하나도 없어서 먹기가 좋았습니다. 거의 홍시가 된 상태여서 달콤했는데 뒤에는 조금 떫은 맛이 남았습니다.

이렇게 들판을 거니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길섶에서 마주치는 것들에게서 나온답니다. 돌감나무도 그 가운데 하나지만 가을 겨울에서 으뜸은 억새랍니다. 억새 하얀 품은 가을이 쓸쓸하지 않다고 착각을 하게 만들고, 그 꽃술을 깔끔하게 날려 보내고 나면 그 단출한 모양이 상큼합니다.

일부러 살피지 않아도 갖은 꽃들이 피고 또 시들었습니다. 빨갛고 하얀 여뀌와 개여뀌, 아직은 파란 데가 많은 까마중, 자줏빛 쑥부쟁이, 노랗게 무리지어 피는 산국, 하얀빛이 내비치는 구절초, 꽃잎 끄트머리가 각진 밝고 노란 고들빼기꽃. 이름을 아는 것만 해도 이런 정도고 모르는 것까지 치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여기에 더해 개똥참외까지 만났답니다. 개똥참외는 사람이 참외를 먹고 나서 자연으로 돌려보낸 그것을 다시 개가 먹고 돌려보낸 그것에서 나온 열매를 일컫습니다. 돌고돌아 나온 녀석들 서넛을 매단 덩굴이, 길가 축대 아래에 늘어서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6km 남짓을 여유롭게 걸은 다음, 의산 보건 진료소 앞 정류장에 닿아 시내버스를 기다렸습니다. 10분이 채 못 돼 76번 버스가 왔겠지요.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36분이었답니다.

김훤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