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드물게 남은 흙길을 시내버스로 찾아갔다

김훤주 2011. 12. 2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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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길이 무척 드문 세상이 됐습니다. 대부분 콘크리트나 아스팔트를 뒤집어 썼고요 아니면 잘게 부순 자갈을 깔아 흙기운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길이 거의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런데 밀양에 이런 흙길이 있습니다. 동천 물줄기를 따라 늘어선 둑길이 그렇습니다. 물론 모두 흙으로 돼 있지는 않습니다. 콘크리트가 깔려 있는 데도 있답니다. 하지만 걷기를 즐기는 이에게는 이런 정도라도 흙길이 남아 있으니 반가울 따름입지요.

동천 둑길 또한 다른 둑길과 마찬가지로 군데군데 끊겨 있습니다. 벼랑을 만나 둑을 쌓을 필요가 없는 데는 둑도 둑길도 없습니다. 대신 도로로 올라가야 하는데, 동천 둑길과 이어지는 도로에는 다행히도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답니다.

옛 국도 24호선입니다. 새 국도 24호선이, 옛 국도 24호선을 따라 생겨난 덕분입니다. 자동차는 새 국도를 타고 거침없이 내달립니다. 새 국도에게 군데군데 뜯어먹힌 옛 국도는 뜯어먹힌 부분을 콘크리트로 이었습니다. 옛 국도는 자동차가 없어 호젓합니다. 흙길이 아니라도 이런 정도면 좋은 편입니다.

동천 둑길.


동천 둑길의 미덕은 또 있습니다. 요즘 시골은 허름한 구멍가게조차 하나도 없기 십상이지만, 이번 둑길은 시작하고 끝나는 양쪽에 모두 가게랑 밥집이 달려 있습니다.

11월 29일 아침 9시 5분에 밀양 시외버스터미널에서 2000원을 내고 산내면 용전마을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는 아주 느리게 달렸습니다. 차창밖 한 달 전만 해도 알을 가득 매달고 있던 사과나무 가지들은 텅 비어 있습니다.


30분 남짓만에 용전다리 앞에 내렸습니다. 바로 옆 '점빵'에 들러 라면 하나 끓여줄 수 없느냐 여쭸습니다. 주인 할머니가 집안일 때문인지 바쁘다며 난감해 하시기에 곧장 생각을 바꿔 컵라면을 뜯었습니다.


점빵은 널렀습니다. 나무 때는 쇠난로는 열기가 후끈한데, 그 위 밥솥에 담긴 파란 플라스틱 바가지는 손잡이가 기다랗습니다. 컵라면에 부은 물은 김이 술술 나는 여기서 나왔습니다.


저쪽 벽면에는 '젊은 여자의 패션 비용이 대폭 절감된 옷차림'이 달력 속에 들어가 걸렸습니다. 안방 들머리에는 버스 시간표가 꽂혀 있습니다. 이 시간표를 인쇄하고 코팅해 뿌린 사람은 개인택시 기사였습니다. 버스와 택시의 공존입니다.


난로 건너편 간이 탁자에는 삶은 달걀이 밥솥에 담겨 있습니다. 밀양에서 만든 막걸리를 한 통 집어 삶은 달걀을 안주 삼아 한 잔 마셨습니다. 그 새 할머니는 김치를 한 보시 내오셨습니다. 상차림이 훌륭합지요. 라면 몇 가락 삼키니 온몸이 따뜻해졌습니다.


길을 나서며 보니 10시 5분, 다리를 건너지 않고 둑길로 들어섰답니다. 가까운 비닐하우스들에서 라디오 소리가 납니다. 일하는 사람이 있나 봅니다.


잠수교 저편 한쪽에서는 아주머니가 빨래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포근해 어쩌면 재미있을 수도 있겠지만 날씨가 차가워지면 저 또한 고역이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장하는 풍경도 있었습니다. 마당 한가운데 절인 배추가 잔뜩 쌓여 있습니다. 식구는 모두 다섯이었습니다. 커다란 고무대야는 두 개 나와 있었습니다.


낯선 이를 향해 짖어대는 개를 보고는 이 집 아들 아니면 손자인지 싶은 사람이 소리쳐 다잡았습니다. 이밖에 채소를 뽑는 할머니도 있고 삽을 들고 가는 아저씨도 있었습니다.

왼쪽 위에 난 새 국도 24호선. 그 바로 오른쪽 아래에 군데군데 뜯겨먹힌 옛 국도 24호선. 그 오른쪽 강가에 오토캠핑장.

옛 국도 24호선이 시들해지니까 그 옆에 달려 있던 이런 가게들은 숨이 끈헝지고 말았습니다.


둑길은 사람 말고 풍경도 품었습니다. 곳곳에 야트막하게 들어선 보들은 물을 풍성하게 보듬고 있습니다. 물이 잦아드는 즈음이면 갈대가 우거져 색다른 눈맛을 줍니다.

여기에 맞은편 산자락 단풍 풍경이 더해집니다. 가까이서 보면 바짝 말라 채 떨쳐지지 못한 이파리지만 멀리서 보면 여전히 남아 있는 초겨울 단풍이랍니다. 그리고 이 쪽에서는 물가에 솟은 바위들이 볼거리를 만들어 줍니다.

서두르지 않았는데도 7㎞가량 걷는 데 두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걷기에 편한 길이기 때문이리라. 점심은 끄트머리 금곡 마을 대풍잡어추어탕(055-353-4958)에서 먹었습니다. 동천서 잡은 물고기로 어탕 하나만 만듭니다. 6000원짜리인데 맛이 담백한 편이었습니다. 피리 조림 반찬도 흙냄새가 나기는 했어도 좋았습니다.

금곡삼거리 처녀다방 건너편에서 10분쯤 기다리다 12시 40분 즈음 시내 들어가는 버스(1300원)를 탔습니다. 앞에 앉은 할머니는 머리가 고왔고, 건너편 앉은 할머니는 웃는 얼굴이 좋았습니다.

금곡서 시내 나가는 버스는 참 많습니다. 얼음골·석남사나 표충사 들어갔던 버스, 단장면 구석구석 들어갔던 농어촌버스가 죄다 금곡을 들르기 때문이랍니다.


동천 둑길 걸을 때 신경써야 할 대목 두 개. 먼저 '강변모텔'이 나타나거든 바로 보를 타고 건너편 둑으로 갈 것. 둑길이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계속 가다가 태양열 주택이 두 채 있는 데서 다시 건너편 둑으로 나오면 됩니다.

둘째 들판에 저 혼자 서 있는 교회가 보이거든 그 마당을 가로질러 옛 국도로 올라갈 것. 둑길이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올라와 고개를 넘은 뒤에는 두 갈래 가운데 왼편 콘크리트길로 들어서야 다시 강가로 갈 수 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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