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민주주의가 진전되면 항쟁은 잊혀진다?

김훤주 2008. 6. 7. 01:06
반응형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예수께서 하셨다고 성경에 기록돼 있습니다. 제게는 이 말이, 어름하게 아는 사람(=고향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된 값어치(=예언자)가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데 버팀돌 디딤돌 노릇을 했던 80년 5월 광주 항쟁을 진지하게 다룬 책들도 환영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뜻도 있고 가치도 퍽이나 있는 이런 책들은 어째서 잘 팔리지 않을까요? 민주주의가 진전되면 민주 항쟁의 역사는 잊혀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난달, 생애 처음으로 ‘5월 광주’를 찾았을 때 황풍년 편집국장이 있는 전라도닷컴 사무실을 들렀습니다. 들어가 커피 한 잔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사무실 뒷벽 책장을 보니 한 가지 책이 수 백 권 꽂혀 있었습니다.

왜 이런 책이 팔리지 않을까?

“저게 뭔 책이여?” 물었더니 황 국장은 “아 저 4년 전 찍었는데 참 안 팔리네. 윤상원 연구소 사람들이 원고 들고 와서 찍어달라는데 거절할 수가 있어야지. 당시 우리도 참 바쁠 때라서 품을 좀 앗았더니 책값도 많이 비싸져 버렸어. 1만2000원이에요.” 했습니다.

팔리지 않아서 꽂아뒀다는 그 책을 뽑아들었습니다. 제목이 <오월꽃 피고 지는 자리>입니다. ‘광주민중항쟁 전적지 답사 길잡이’가 부제로 달려 있었습니다. 창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스무 권 묶어 달래서 들고 나왔습니다. 황 국장이 자동차로 바래다 줬는데, 내릴 즈음에 책값조로 20만원을 거절하지 못하게 내밀었습니다.

저는 동료들에게 이 책을 나눠줄 요량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지부 집행부에게도 줬고 친애하는 설미정과 박민영을 만났을 때도 한 권씩 돌렸습니다. 설과 박은 제 설명을 들으면서 한 번 펼쳐보더니 “이런 책이 왜 안 팔릴까?”, 했습니다. 그러면서 “선배, 책 소개하는 글을 한 번 써 보세요.” 덧붙였습니다.

글을 쓸 생각은 없었습니다. 한 줄 보탠다고 책이 잘 팔려 나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쩌다 눈 밝은 이가 있어서, 제 글을 보고 한 번 구해서 봐야겠구나 마음먹을 수는 있을 것 같아, 이리 한 번 써 봅니다. 꼼꼼히 읽지 않아 내용이 알차지는 않습니다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체 153쪽에 정가가 1만2000원이니, 좀 비싼 편이기는 합니다. 윤상원민주사회연구소(www.dulbul.or.kr) 구성원들이 만들었습니다. 책날개를 보니 연구소장 정재호와 연구위원 이상호와 같은 연구위원 이강복 셋이 만들어 냈습니다. 윤상원은 80년 항쟁 당시 도청에서 전사한 유일한 지도부로 알려져 있습니다. 항쟁 전에는, 광주에서 들불 노동 야학을 하기도 했답니다.

책은 아주 깔끔한 편입니다. 항쟁 당시 전적지마다 간략하게 설명을 곁들이면서 사진과 그림을 붙였습니다. 우리 옛 지도 형식으로 약도를 그려 담은 것도 산뜻합니다. 항쟁과 항쟁 지도부를 민중성을 잣대로 삼아 정통성을 따지는 작업도 함께 진행했습니다.

책을 만든 원칙 : 현장성과 투쟁성

만든 이들은 글머리에서 원칙을 몇 개 늘어놓았습니다. 첫째는 현장성입니다. 답사가 5.18묘역으로 한정됨으로써 그 의미가 추모로만 쪼그라드는 데 대한 반성을 담았다 했습니다. 둘째는 투쟁성입니다. 피해를 강조하는 바람에 학살과 인권 유린에 초점이 맞춰지는 한계를 뛰어넘어 민주주의 쟁취를 위한 투쟁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려 했다는 얘기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효천마을 소개-아래에 시내버스 번호가 적혀 있습니다.

셋째는, 광주항쟁 역사의 중심을, 해방 광주를 실현했고 또 최후 저항이 있었던 전남도청으로 삼았다고 밝혔습니다. 전남대 앞 학생시위에 대한 무력 진압이라는 발생 중심 항쟁 인식으로 말미암아 항쟁의 의미가 사라지고 정권의 폭압이 도드라져 보이는 잘못을 고쳐잡겠다는 뜻으로 제게는 읽혔습니다.

마지막 넷째로 ‘나홀로 답사’를 가능하게 하는 길잡이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이 책의 가장 아름다운 장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실 여태까지 광주에 간다 해도, 잘 아는 사람이 있어 전체를 이끌어주지 않는다면, 어디가 어디인지 몰라서라도 전적지를 둘러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이런 원칙에 따라 항쟁 전적지를 다섯 무더기로 나눠 보고 있습니다. 도청과 광주역과 무등경기장과 윤상원 생가와 주남마을 일대가 그것입니다. 저는 이 가운데 주남마을 일대와 무등경기장 부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주남마을 일대는 학살과 저항이 이뤄진 곳이었습니다. 이른바 ‘시민군’의 지역방위대 활동이 가장 왕성하게 벌어졌던 데라는 얘기도 적혀 있었습니다.

또 무등경기장 일대 부분에서는, 상무대가 돋보였습니다. 상무대 전투병과사령부는, 항쟁이 진행 중일 때는 계엄분소가 있어서 전두환 쿠데타 세력의 진압지휘부였고 항쟁이 끝난 뒤에는, 항쟁 세력을 가둬두고 고문 폭행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여러 증언들이, 여기에 실려 있었습니다.

“감방에서는 군기를 잡는다고 날뛰는 헌병에게 맞기 일쑤였고, 화장지가 지급되지 않아 성경책을 뜯어 사용해야 했고, 항상 부족한 밥 때문에 식사 때만 되면 마주앉은 사람끼리 신경전을 벌이기 일쑤였다. 형무반장은 화가 나면 군홧발로 영창에 들어와 무조건 걷어차고 두들겨 팼다. 헌병 근무장의 하루는 우리를 영창 철장에 거꾸로 매달리게 하는 기합 등으로 괴롭히는 것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섯 개 무더기마다, 지도가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개별 개별 소개마다, 지하철이라든지 시내버스 노선이 각주로 달려 있습니다. 혼자서 돈 적게 들이고 둘러볼 수 있게 한 배려입니다.

51쪽 도청 둘레 지도의 경우, 지도부가 있던 도청에서 시가전이 벌어진 금남로와 계엄군 최초 발포 총성이 터진 통일회관과 학살이 자행된 공용터미널과 나눔공동체가 있던 양동시장까지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담았습니다. 미덕입니다.

민중의 말글로 쓰지 못했다는 단점

<오월꽃 피고 지는 자리>는 그러면 장점과 미덕만 있고 단점과 악덕은 없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먼저 책을 만든 이들이 밝혀 놓은 한계가 있습니다. 광주 말고 다른 지역 이를테면 나주나 화순 따위에 있는 전적지를 담지 못했고, 광주만 해도 중요 지역만 꼽다 보니 전체로 볼 때 빠진 데가 여럿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볼 때는 다른 악덕도 있습니다. 민중의 말글로 쓰여지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아무 데나 짚어도 그런 구석이 나옵니다. ‘광주민중항쟁의 성격’을 설명하는 126쪽입니다.

“광주민중항쟁은 1980년 정치권력의 창출을 둘러싸고 전개된 정치공간의 집중적 체험자,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의 종결자, 정치투쟁의 패배자가 됐다.”

그다지 어려운 낱말들은 아니나, 그 조합이나 전체 글투가 대중의 그것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표현입니다.

저는 이런 책들이, 전국 곳곳의 도서관에 책꽂이에 꽂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서관은 잘 팔리는 책은 갖춰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잘 팔리는 소설이나 시집 수필집 따위는, 도서관에서 빌리는 대신 개인이 사서 읽어도 됩니다. 그러나 이처럼 가치롭기는 하지만 잘 팔리지 않는 책은, 대중이 공유할 필요도 있는 책이어서, 반드시 도서관이 갖춰놓아야 할 필수품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도서관 사서 가운데에, 눈 밝은 이가 여럿 있으리라고 저는 믿고 또 믿습니다. 개인에게도 있으면 좋을 책이지만, 도서관에서는 사서가 하루빨리 사들여 장만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김훤주

오월꽃 피고 지는 자리:광주민중항쟁 전적지 답사 길잡이 상세보기
정재호 외 지음 | 전라도닷컴 펴냄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의 현장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안내서. 당시 항쟁지도부의 최후 항전지였던 전남도청, 계엄군의 총칼이 난무한 금남로, 학살의 현장이었던 공용터미널 등 5.18 관련 전적지를 테마별로 답사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