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최동원을 롯데가 진짜 위한다면

김훤주 2011. 10. 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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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동원 선수를 위한다는 영구결번식

롯데 자이언츠의 프로 야구 최동원 선수가 아깝게도 9월 14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뒤이어 9월 30일에는 부산 사직구장에서 최동원 선수를 기리기 위해 그이의 등번호 11의 영구결번식이 있었습니다.

9월 30일은 27년 전인 1984년 삼성과 펼친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최동원 선수가 4-0 완봉승을 거둔 날이라고 합니다. 롯데는 이를 기리려고 이 날 9월 30일을 '최동원 데이'로 정했다고 하지요.

롯데의 첫 번째 에이스였던 최동원을 위해 사람들은 관중석을 꽉 매웠고 유족도 함께했으며 현역 선수는 추모사를 읽었고 '11 최동원'이 새겨진 선수복 깃발이 올라가는 가운데 영구결번판도 제막됐다고 합니다.


또 부산시는 제54회 부산문화상을 최동원 선수에게 줬으며 롯데장학재단에서는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는 최동원 선수 아들 최기호씨에게 장학금도 줬습니다. 최기호씨는 이날 최동원 입었던 선수복을 입고 시구까지 했다지요.

9월 30일 부산 사직구장에 걸려 있는 최동원 선수 모습. /스포츠 경향 사진


그리고 이 날 롯데자이언츠는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한 경기에서 6-3으로 이겼습니다. 관중석을 가득 채운 부산 팬들의 응원도 승리에 한몫을 했겠다 싶습니다.

2. 최동원 선수에 대한 어린 시절 추억

이렇게 아쉽게 세상을 떠난 최동원에 대한 기억이 그이보다 다섯 살 어린 제게도 있습니다. 1975년부터 1977년까지 부산에서 학교를 다녔던 저는 집이 대신동 구덕야구장 옆에 있었던 덕분에 최동원 선수 경기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최동원 선수는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빛 나는 별이었는데, 게다가 제가 사하중학교 1학년이던 1976년 가을에는 최동원 선수가 소속돼 있던 경남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우리 학교에 와서 체력장 시험을 치르는 일도 있었습니다.

요즘 청소년들은 어쩌면 체력장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도 있을 텐데, 윗몸 일으키기, 왕복 달리기, 100m 달리기, 오래 달리기, 턱걸이(여자는 오래 매달리기), 멀리던지기, 윗몸 숙이기 등등을 해서 체력을 시험하고 대학입학시험에 그 성적을 반영했습니다.


그 때 최동원은 운동장에서 멀리 던지기를 했는데 보통은 두 번인가 세 번인가를 던져 그 가운데 가장 좋은 기록을 성적으로 삼았습니다만, 최동원은 단번에 공을 저 멀리 던져버리고는 두 번 다시 던지지 않았습니다. 그 엄청난 파워에 
저를 비롯한 아이들은 '우와~' 하면서 깜짝 놀랐지요.

최동원 선수는 그 때도 도도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아이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지요. 어떤 아이들은 최동원 선수한테서 지청구를 들었다고도 했습니다. 아마 아이들이 짖궂거나 귀찮은 짓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3. 아주 손쉽게 망가져 버린 최동원

1984년 한국 시리즈 우승 당시 최동원. /사진 롯데 자이언츠

제가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아시고 인정하는 바이지만, 최동원은 당대 영웅이고 스타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영웅이자 스타조차도 망가지려니까 그것 또한 아주 어렵지 않고 간단하더군요.


제가 무어라 씨부렁거리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어서 온라인 네티즌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에서 해당되는 부분을 끌어와 봅니다. 롯데자이언츠의 최동원 선수가 주동으로 나섰던 선수협의회 결성 사건입니다.

<<1988년, 최동원은 선수협의회를 결성하고자 했다. 해태 타이거즈 투수 김대현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고 선수 복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같이 운동을 하던 선수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도울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연습생 선수들의 최저 생계비나 선수들의 경조사비, 연금 같은 최소한의 복지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선수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최동원

명예욕에 따른 움직임이라는 일부의 편견도 있었다. 그러나 최동원은 "나는 1억 원의 연봉을 받는 선수였다. 그 돈이면 당시 강남에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었다. 내 욕심을 위해서라면 선수협을 결성할 필요가 없었다. 어려운 동료들을 돕고 싶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이렇게 최동원이 나섰던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이 또한 널리 알려진 일이기는 하지만, 한 번 더 '위키피디아'에서 가져와 봅니다. 제가 프로야구 자체를 좋아하지 않게 된 여러 계기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구단들의 강한 반발에 밀려 선수협 결성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 해 11월 최동원은 투수 오명록, 포수 김성현과 함께 삼성 투수 김시진, 전용권, 내야수 오대석, 외야수 허규옥을 상대로 한 3:4 트레이드로 이적했다.

롯데가 아닌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는 것은 최동원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트레이드 사실보다 최동원을 힘들게 한 것은 구단이 자신의 의도를 본의와 다르게 받아들였다는 점이었다. 구단에 대한 섭섭한 마음과 함께 선수 생활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그럴만도 했겠습니다. 물론 선수협은 롯데 자이언츠뿐만 아니라 모든 구단 전체를 상대로 한 것이었고 그래서 롯데만의 의도로 최동원이 삼성으로 트레이드됐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롯데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오히려 가장 큰 책임이 있었다 해야 마땅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선수들의 '불온하게' 움직이는 기세를 꺾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누군가 나서서 그렇지 않다고 얘기한다면, 일제 강점기 조선인한테 악랄하게 굴었던 조선인 출신 순사를 두고 "그 사람은 죄가 없고 조선총독부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최동원은 꺾였습니다. 롯데는 1984년 한국 시리즈 우승의 영웅 최동원을 이렇게 꺾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꺾임은 그에 앞서 있었습니다. 1984년 한국 시리즈에서 롯데 자이언츠가 최동원 혼자서 4승을 올리게 한 '사실'이 역으로 웅변하고 있습니다.


'혹사'였습니다. 이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물론 당시는 이렇게 혼자서 마운드를 책임지는 일이 그다지 드물지 않았음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30년 전인 당시에도 '혹사'에 대한 전문가들의 걱정과 지적이 있었음 또한 '사실'입니다. '위키피디아'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최동원은 1990년까지 삼성에서 뛰었고 1991년 시즌이 시작하기 전 마운드를 떠났다. 가족들과 의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32살이었다. 아마추어 야구 시절부터 혹사 당한 게 조기 은퇴로 이어진 것이 아니냐는 견해도 있었다.


"아마추어 시절이나 프로에서 무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시대에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 세 글자에 부끄럽지 않게 맡은 바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 최동원>>

4. 사과 유감 표명해야 하는 롯데 자이언츠

제가 생각할 때, 롯데 자이언츠는 최동원한테 잘 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최동원 등번호 11번 영구 결번을 이번에 한 데서도 조금은 그런 사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최동원을 진짜 롯데맨으로 생각했다면 1991년 최동원이 은퇴를 했을 때 그랬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롯데는 하지 않다가 세상을 떠난 뒤 야구팬들이 크게 반향이 울리자 뒤늦게 영구 결번을 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여러 조건이 다르기는 하지만, 지난해 9월 19일 은퇴하면서 영구 결번이 된 삼성라이온즈의 10번 양준혁과 견줘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양준혁도 최동원과 마찬가지로 1999~2001년 해태(KIA), LG 등으로 떠돌이 생활을 했고 2000년 선수협의회 결성으로 구단 전체에 밉보이기도 했습니다.

2010년 9월 19일 SK와이번즈와 치른 은퇴 경기에서 1루로 달리고 있는 양준혁. /뉴시스


물론 양준혁은 2002년 삼성으로 돌아왔다는 점이 최동원과 다른 점이고 여기에는 양준혁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롯데가 최동원을 끌어올 생각이 별로 없었기 때문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저는 합니다.

어쨌거나 롯데자이언츠는 이번에 최동원 영구 결번식으로 크게 이름도 날렸고 흥행도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해마다 9월 30일 '최동원 데이'까지 활용해 대중의 추억을 감성으로 자극하는 이벤트를 터뜨림으로써 금전과 명예를 계속 쌓을 것입니다.

그러나 롯데 자이언츠의 이런 일들이 나름대로 정당성을 얻은 위에서 진행되려면 먼저 '롯데 자이언츠 프로 야구 투수 최동원 선수'에 대한 사과와 유감 표명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뤄져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1988년 선수협 사건으로 내쳐 깊은 좌절 속에 낭인처럼 떠돌게 한 데 대해서는 사과해야 마땅하고 1981년 실업야구 롯데 실절은 물론 1983년부터 해마다 눈에 띄게 혹사를 한 데 대해서는 유감이라는 말이라도 해야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산 장사꾼' 롯데가 '죽은 선수' 최동원을 악용해 돈벌이에나 골몰하고 있다는 비난을 잠재우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있을 때는 박대하다 죽고 나서 저러니 뻔한 장삿속이 들여다보인다는 생각이 든다고, 저 혼자만이라도 이리 떠들고 다니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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