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폭력과 배타는 '우리' 말고 '너희'의 문제다?

김훤주 2011. 5. 24.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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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는 무엇이고 어디일까

5월 19일 저녁 8시 부산 블로거 거다란님 소개로 부산 광복동에 있는 극단 새벽의 연극 '니르바나로 가는 길'을 봤습니다. 5월 19일부터 7월 30일까지 상연하는 이 연극을 자세하게 모두 소개하기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고요, 다만 아주 재미나게 봤다고는 해 놓겠습니다.


극본을 쓴 이성민 연출가의 문제의식도 제게는 좋았고, 그 문제의식을 연기로 형상화한 배우 세 명의 실력도 마찬가지 대단했습니다. 1시간10분남짓한 공연에서 흐름이 어색한 대목은, 제가 잘 모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거의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긴장감이 끝까지 유지됐으며 무거운 분위기를 덜어주는 장치도 알맞게 갖춰져 무거운 연극에 익숙지 못할 수도 있는 관객들을 배려도 했습니다. 주제를 향해 깊숙하게 들어가는 대목 언저리에다 가볍게 웃을 수 있는 소재를 마련해 둔 것이었습니다.


줄거리가 시간 순서로 평퍼짐하게 진행되는 대신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게 얘기를 주고받는 구조에다 다른 시공에서 벌어진 얘기를 재생해 들려주는 방식을 쓰는 등 입체적이고 탄탄하게 짜인 구조도 긴장감을 높이고 유지하는 데 이바지한 것 같습니다.

지문도에서 펼쳐지는 '우리' 이야기

극단 새벽 제공. 왼쪽부터 미자 할머니, 그 옆에 옥이 고모를 위한 돌탑(납골당), 사회복지사, 마을 이장.

19일 공연을 마치고 인사하는 출연진. 가운데가 미자 할머니, 오른쪽이 이장, 왼쪽이 사회복지사.


공간 배경이 되는 서해의 외딴 섬 지문도는 원래 무인도였다가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설정돼 있습니다. 일제시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했던 강제부역자들이 개신교 교회 목사 인도 아래 집단으로 들어와 살게 된 것입니다.

뭍에서 벌어지는 박해를 피해 들어온 것이지요. 이런 마을에 목사 여동생 옥이 고모가 미자 할머니와 함께 15년 전에 들어와 살게 됩니다. 1943년 당시 18살이었던 옥이 고모는 일본에서 근로정신대 노릇을 하다 뒤늦게 돌아온 것입니다.


옥이 고모보다 한 살 많은 미자 할머니는, 나중에 알려지지만, 한국이 아닌 오키나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키나와 사람도 같은 일본 사람이라 여기지만, 실제로 일본에서는 한 때 불가촉천민으로 취급받고 한 데 섞이지도 못했던, 이를테면 내부 식민지인 또는 내부 피지배집단이랍니다.


그래서 옥이 고모와 마찬가지로 2차세계대전 당시 근로정신대로 끌려갔고, 옥이 고모와 마찬가지로 다시 일본군 위안부 노릇까지 당한 끝에 이런 사실을 모르는 지문도로 옥이고모랑 함께 들어와 서로 기대며 살게 됐습니다.


이런 줄거리를 미자 할머니(유미희)와 나현숙 사회복지사(변현주) 이현식 마을 이장(황구현) 셋이 풀어갑니다. 마을 이장은 옥이 고모의 오빠인 목사의 아들로 설정돼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대표하는 구실을 하는 셈입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이장으로 대표되는 마을 주민들은 아픈 상처를 안고 있으면서 역사 속 피해자와 현실 속 가해자로 나옵니다. 피해는 옥이 고모와 미자 할머니에게 주어집니다. 미자할머니가 '일본 사람'임을 우연히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옥이 고모는 모든 사실을 마을 사람들이 죄다 알게 됐다고 착각하게 됐습니다.


착각 속에서 옥이 고모는 태풍이 부는 날 밤 바다로 뛰어들어가 신발 한 짝으로 돌아옵니다. 사고사인지 자살인지를 두고 말들이 나오고 미자 할머니는 옥이 고모를 위해 탑을 쌓습니다. 납골당정도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사회복지사는 미자 할머니와 이장 사이를 오가며 줄거리를 풉니다. 이들 얘기를 통해 관객들은 무엇이 어떻게 돼 있는지를 알아갑니다. 미자 할머니는 개망초꽃을 한 짝 남은 옥이고모 신발에 심어 꽃배를 띄운 뒤 세상을 떠납니다. 자기가 켜 놓은 촛불에 집이 타는 바람에 그렇게 되는데요, 자살 혐의가 짙어 보입니다. 


죄다 상처 입은 사람들입니다. 상처와 그 상처로 말미암아 내면에 자리잡게 된 생각들이 어떻게 무슨 일을 일으키는지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을 꿰뚫는 핵심 낱말이 '우리'입니다. '우리'에 드는 사람과 '우리'에 들지 않는 사람, 이 '우리'와 저 '우리'…….

다양하게 겹쳐지고 변형될 수 있는 주제 의식

그리고 '우리'가 '나' 또는 '너' 또는 '그'에게 작용하는 방법과 방향과 세기 등등이 뒤이어 끌려나오는 문제의식들입니다. 극단 새벽의 연출가 이성민은 연출 단상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왼쪽이 연출가 이성민. 연극 마치고 나서 블로거 등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우리' 속에는 수많은 '나'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나'듥은 숫자만큼 다양하고 각양각색이며 때로는 서로 융합되지 못하고 충돌을 빚기도 한다. 이 충돌의 순간 '우리'는 '나'와 '너'로 분리를 선언하고 날선 이질성을 표면화시키기 시작한다. 이제 '우리'는 융합되지 못한 '너' 또는 '너들'과 분리된 '나'들을 소집하고 저편을 '차단', '고립'시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우리'의 배타성이며 허울 좋은 '공동체주의'의 폭력성"이라 했습니다. 제 생각에 문제는 이렇습니다. 배타성과 폭력성이 어디 한 군데에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발현이 이를테면 자기를 가해한 집단이나 사람이 아니고 또다르게 피해를 입은 집단이나 사람을 향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우리'가 배타적이고 '공동체'가 폭력적이라 해도 사람이 살면서 '우리'나 '공동체'를 완전하게 버리거나 벗어나 살기 어렵기도 하다는 사실도 겹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에게 고유한 배타성과 폭력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이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 끊임없이 살펴야 하지 않을까요? 피해와 가해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자기와 자기가 속한 '우리'와 '공동체'의 조건을 끊임없이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일방적으로 가해만 하는 집단이나 사람, 일방적으로 피해만 당하는 집단이나 사람은 없다는 사실 또한 함께 새겨야 하지 않을까요? '니르바나로 가는 길'은 그래서 "'우리'가 분리하거나 차단시키고 있을지 모를 '너' 혹은 '그'에 대한 극단 새벽의 성찰"입니다. 이 성찰이 극단 새벽을 넘어 더 많은 이들에게 퍼져나가면 좋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남녀 한 쌍이 관극을 끝내고 출연진과 더불어 사진을 찍고 있다.


깨달음이 녹아 있는 빛나는 대사들도

연극을 보는 재미가 이런 주제의식과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앞서 드린 말씀은 '니르바나로 가는 길'이 기본을 탄탄히 갖췄다는 정도로 받아들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말고도 가슴을 꿰뚫고 머리를 시원하게 헹구는 대사들이 곳곳에서 반짝입니다. 성찰, 직관, 아니면 일상을 통해 깨달음에 이른, 그래서 사람들 마음을 치면서 빛을 내는 것들입니다. 유행가 가사보다 더 잘 형상화돼 있습니다.


'거짓말'과 '비밀'의 차이, 그리고 그 둘의 관계를 짐작게 해 주는 생각들, 외로움이 무엇인지 색다르게 풀어내는 대사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을 울립니다. 이런 극단이 부산에 있다는 것은 부산 사람들에게는 축복입니다.


관람료 할인도 되고

2011년 상반기 기획전입니다. '니르바나로 가는 길'은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표 극작가인 아돌 후가드의 '메카로 가는 길'을 읽고 영감을 받아 창작한 작품이랍니다. 어른 2만원이고 청소년은 1만5000원입니다.

홈페이지(
http://saebyeok.communeart.net/)에서 예매를 하면 10% 할인되고 25% 할인되는 지정 홍보처도 있는데 홈페이지에서 확인됩니다. 수요일은 5명 이상이면 50% 팀 할인 되고 토요일은 가족 단위에게 30% 할인됩니다.

일·월·화는 공연을 하지 않으며 수·목·금은 오후 8시, 토요일은 오후 5시 시작입니다. 19일 마산 합성동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가서 지하철 남포역에서 내려서 갔는데요 1시간30분 걸렸습니다. 전화 051-245-5919.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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