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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버스 타고 즐기기 : 구형왕릉 일대

김훤주 2011. 5. 31.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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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산청 금서면 화계 마을 구형왕릉은 널리 알려진 명승지입니다. 김해 금관가야 마지막 10대 임금으로 신라 법흥왕한테 532(또는 562)년 나라를 넘겼습니다(讓). 그래서 양왕이라고도 하는데, 백제 계백 장군처럼 결사항전이라도 해 보지…… 하며 심드렁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나 사람살이가 어디 한 면만 있는가요. 이렇게 자기 힘의 한계를 알고 나라를 놓음으로써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겪지 않게 했으니 나름대로 미덕이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 싶은 것입니다.


구형왕릉 둘레에는 사연을 담은 유적들이 널려 있습니다. 가야 임금 족보를 기록한 빗돌도, 구형왕 손자인 김유신이 찾아와 활을 쏘았다는 사대도, 김유신이 할아버지 무덤을 지키고 당우를 지었다는 빗돌도 있습니다. 구형왕이 나라를 내어놓고 이리 들어와 살면서 옛적 도읍을 바라봤다는 망경루도 있습니다.

김유신 사대비. 나무와 숲이 멋졌습니다.


구형왕릉 올라가는 들머리에는 덕양전(德讓殿)이 있습니다. 구형왕릉만 돌로 돼 있는 줄 알았는데 가만 보니 여기 담장도 죄다 돌을 쌓아 만들었습니다. 다시 둘러보니 관련되는 건물들은 울타리가 모두 돌로 돼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일관됨이 한편 깔끔하면서도 착 가라앉아 적막한 느낌이 들도록 작용을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덕양전 안쪽을 넘겨다봤습니다.

덕양전 뒤쪽 대숲과 길가 느티나무. 그 앞으로 흐릿하게 덕양전 건물이 보입니다.

덕양전 뒷모습.


5월 10일 아침 8시 30분 산청종합버스터미널에서 군내버스를 타고 20분 남짓 지나 내린 데가 덕양전 앞. 돌담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덩굴과 뒤쪽 대밭이 그럴 듯했습니다. 1km 남짓 구형왕릉까지 이어지는 아스팔트길은 가파르지 않아 걷기에 좋았습니다.

구형왕릉 가는 길에 버스 타고 넘어온 꼬불꼬불 고갯길을 돌아봤습니다.


구형왕릉에서는 늦게 핀 왕벚꽃을 앞에 놓고도 사진을 찍고 잎이 부풀어오른 나무를 배경으로 놓고도 찍었습니다. 나라가 흥하든 망하든, 또 사람이 죽든 말든, 잎과 꽃은 피었다 시들고 맙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도 나라도 났다가 사라지기는 꽃이나 나무랑 다를 바 없습니다. 구형왕릉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한 바퀴 돌았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쓸쓸한 느낌이 조금 더 들었습니다.

온통 돌입니다.

오른쪽 옆에서 바라보니 층을 이룬 모습이 잘 보였습니다.

무덤가에 핀 겹벚꽃.


구형왕릉 들머리 주차장으로 나와 콘크리트 깔린 임도로 들어섰습니다. 시작 가로수로는 소나무였지만 조금 올라가면 고로쇠나무로 바뀝니다. 고로쇠는 아주 빨리 자라는 큰키나무랍니다. 가지도 왕성하게 뻗어 어린 나무인 듯한데도 그늘이 크고 싱그럽습니다.

고로쇠나무들.

고로쇠나무 늘어선 맞은편에는 병꽃도 피어 있었습니다.


조금 더 올라가니 양쪽 모두 고로쇠나무가 있어 나무그늘 터널을 이루고 있습니다. 고로쇠 터널이 없었다면 이번 나들이길의 시원함과 아름다움이 반으로 줄 뻔했습니다. 등짝에 조금 남아 있던 땀들이 그늘에 접어들자 시원스레 부는 바람과 더불어 사라졌습니다.

이 멋진 터널에 산짐승이나 사람이 하나 나타나 주면 멋진 사진이 될 텐데, 자동차조차 석 대밖에 지나치지 않았을 정도로 길은 호젓했습니다.


터널이 끝나는 데서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유의태 약수터가 있습니다. 나무그늘이 여기서도 시원했습니다. 조선 명의 허준의 스승인 유의태는 아래 화계 마을에 터잡고 사람 치료를 했습니다. 유의태는 한약을 달일 때 여기 물을 떠 썼다고 합니다. 지금은 화계 마을 상수원입니다. 한 바가지 떠서 마시니 달콤한 맛이 시원하게 몸을 감쌌습니다.

유의태약수터 가는 길도 그늘이 꽤나 좋았습니다.


길을 되짚어 화계 마을로 접어들었습니다. 화계(花溪)라……, 토종말로는 꽃내쯤 되겠습지요. 함양 유림면과 이웃해 임천강 곁에 들어선 마을입니다. 마을 담장에는 '식량 증산' '저축정신을 생활화하자' '퇴비 증산' 같은 70년대 구호가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입에 웃음을 물려줬습니다.

오른쪽 담벼락에는 평상을 붙여세워 놓았습니다. 비가 올까봐 그랬겠지요.

"저축정신을 생활화하자" 70년대 박정희식 구호입니다. 저 담벼락이 적어도 30년은 넘었다는 얘기입니다.


옛날 집터 가운데에는 텃밭으로 바뀐 데도 있었는데 사람들은 거기뿐 아니라 길섶 조그만 땅뙈기조차 놀리지 않고 채소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마을을 둘러보고 끄트머리 임천교에서 풍경을 바라보다가 돌아와 정오에 산청읍내로 들어가는 군내버스를 탔습니다. '할마시'도 여러 분이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는 길가에서 손을 드는 사람은 모두 태웠는데, 앞서 답사에서 어떤 가게에 들어가 "버스 정류장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난감해하던 가게 주인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정류장 표지판이 없는 대신, 이처럼 아무 데서나 사람을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버스에 탄 할마시들은 아주 '착하셨다'고나 할까요. 할마시들이 자기네끼리 이런저런 얘기를 방심한 채로 하고 있었는데, 운전기사가 길도 꼬불꼬불한데 신경 사납다면서 퉁명스럽게 떠들지 말라고 한 마디 던지니 그만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서로 마주 본 채 입만 오물거리기도 했고, 어떤 때는 손짓 발짓에 더해 가슴까지 내밀어 가며 의사 표현을 했는데, 절대 입으로 소리를 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모습이 어린아이처럼 귀엽고 천진스러웠습니다. 하하.


산청읍내서는 제대로 된 비빔밥을 맛보는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별 기대없이 장터에서 '건강식당'(055-973-2623)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거기 행운이 있었습니다. 여든셋 용띠 할머니가 주인이었습니다.


상추 머위 돌나물 정구지 따위 채소들을 버무려 내놓고 다른 반찬을 몇몇 곁들인 보리밥이었는데 싱싱하고 맛깔스러웠습니다. 할머니는 "미원은 절대 안 쓰지", 이랬습니다. '미원'은 상품 이름이 아니라 '화학 조미료'를 일컫는 대명사가 됐습니다.

보리밥은 4000원 또는 5000원이고 산청에 있는 도가에서 만든 막걸리는 2000원 했습니다. 두 통을 주문해 반 통만 남기고 일어섰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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