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밀양 표충사에는 동전 수북한 샘물이 있다

김훤주 2010. 9. 23.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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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석(一石) 이희승 선생 

일석 이희승(1896~1989) 선생이 있습니다. 일석 선생은 일제 강점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탄압을 받았던 빼어난 국어학자이기도 하지만 수필도 아주 잘 썼습니다.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일석 선생이 쓴 수필집 <한 개의 돌이로다>가 있었습니다. 표제작인 '한 개의 돌이로다'에는 당신이 호(號)를 일석(一石)이라 짓게 된 경위가 나옵니다. 40년이 다 된 일이기는 하지만 그 때 읽은 기억이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일석 이희승 선생이 원래 지어 가졌던 호는 천석(泉石)이라 했습니다. 둘 다 조그맣고 또 소중한 존재는 아니지만 돌처럼 변함없고 샘처럼 새롭기를 바라서 지은 호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사람들 호에 천(泉)이 들어가는 경우가 참 많더라고 했습니다. 그래 알아보니까 일석 선생 당신처럼 '늘 새롭기를 바라서' 샘 천(泉)을 쓰는 것이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돈이, 재물이, 부귀영화가, 솟아나는 샘물처럼 펑펑 쏟아지기를 바라서 자기 호를 지으면서 그렇게 천을 쓴다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화수분 갖기가 소망이었던 셈이지요. 

그래서 이희승 선생은 자기 처음 지은 호에서 천(泉)을 빼고 대신 길 가에 굴러다니는 '한 개의 돌이로다' 하는 심정을 담아 일석(一石)이라 하게 됐다는 에피소드를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2. 창원공단의 화천기계라는 회사 

여기 딱 맞아 떨어지는 보기를 저는 창원공단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화천기계가 있습니다. 질 좋은 공작 기계를 잘 만들어내는 그럴듯한 알짜배기 중소기업인 줄로 저는 압니다. 

화천기계에서 화는 돈 화(貨)이고 천이 바로 샘 천(泉)입니다. 아주 직설적이라 느끼한 느낌이 오히려 덜한데요, 돈이 샘처럼 솟아나라는 바로 그런 뜻을 회사 이름에 담은 것이지요. 

(물론 나쁘다는 뜻은 여기에 전혀 없습니다. 자본가가 돈 욕심을 내는 것은 당연하고 그것이 사회 통념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추구된다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비슷한 보기는 또 있습니다. 어느 날 길을 가는데 진보당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니, 진보정당이 저기 왜 걸려 있지?" 하는 생각으로 다가가 보니 그 진보는 進步가 아니고 進寶였습니다. 보석 가게 상호였습니다. 하하. 

마찬가지입니다. 진보정밀·진보기계 같은 이름이 달린 공장이 있습니다. 여기에 쓰이는 진보 역시 進寶였습니다. 보물·재화를 향해 나아간다는(또는 나아가겠다는) 굳은 의지가 야무지게 담겨 있습니다. 

3. 밀양 표충사의 옛 이름 영정사 

사천왕문에서 내려다본 표충사 들머리 마당.


밀양 표충사는 원래 이름이 죽원정사(竹園精舍)였습니다. 신라시대 654년 원효 스님이 여기 산문을 열 때 지은 이름이라고 돼 있습니다. 지금도 표충사 가서 보면 뒤에 둘러 서 있는 대숲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다가 영정사(靈井寺)로 바뀌었습니다. 같은 신라 시대 829년 흥덕왕의 셋째아들이 문둥병(한센병)에 걸렸는데 여기 죽원정사에 있는 샘물로 씻고 마셨더니 씻은 듯이 나았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깔려 있습니다. 

임금이 이 기쁜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신령스러운 우물이 있는 절간'이라는 뜻으로 영정사라 지어 바꾸게 했습니다. 지금도 표충사가 물이 좋으며, 이것은 절간 뒤에 있는 산 이름 재약산(載藥山)에도 담겨 있습니다. 

약(藥)을 잔뜩 싣고(載) 있는 이 산 마루에는 산들늪이라는 습지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사자평'이라 했는데요, 곳곳에서 물이 솟아 예전 한 때는 사람이 살면서 논농사까지 지었습니다. 영정의 뿌리는 산들늪입니다.

4. 영정에 수북하게 담긴 저 동전들

산들늪에서 시작돼 표충사 앞마당에서 솟아나는 영정이 지금도 있습니다. 가서 보면 ‘영정’이라고 한자로 적혀 있기까지 합니다. 옛날 신라 왕자들이 마시고 씻고 해서 한센병을 고쳤다는 바로 그 샘물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절간에는 없는 모습이 여기 표충사 영정에서는 보이고 있습니다. 영정에 놓인 조그마한 대접에 크고작은 동전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입니다. 


절간에서 이런 동전을 보기가 어려운 노릇은 아닙니다만, 표충사 사천왕은 입에도 동전을 물려 있더군요. 이 또한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사천왕 입 안에까지 동전을 집어넣어 놓았습니다.

죄는 여기 짓밟힌 여자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죄가 아름답고 달콤하지 않으면 누가 저지르겠습니까.


영정 샘물에 동전이 들어 있는 이 낯선 모습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봤습니다.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마음을 먹으면서 저렇게 동전을 집어넣었을까? 무슨 소원을 빌면서 자기 마음을 담아 동전을 던졌겠지요.

소원의 대부분은 부귀영화일 것이고요. 저도 마찬가지지만 소원에는 대부분 욕심이 덕지덕지 묻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 존재가 바로 인간이지요. 그러니 그것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숱한 사람들로 하여금 영정에 동전을 저처럼 수북하게 던져 넣게 만든 소원들도 그럴 것입니다. 어떤 소원이 이뤄지면 그 바탕 위에서 더 큰 욕심을 소원으로 삼아 이뤄 주십사 빌게 마련이겠지요.

집 한 채 장만해 주십사, 사업 성공시켜 주십사 빕니다. 다음에는 더 큰 사업을 들고 와 성공시켜 주십사 빕니다. 사업은 갈수록 커지고 벌어들이는 돈 또한 마찬가지 많아집니다. 확대 재생산되는 ‘무한 도전’입니다. 

5. 돈은 왜 버는 것일까? 

돈은, 이른바 거대담론으로 얘기하자면 ‘죽은 노동’이고 동시에 '산 노동에 대한 지배'가 됩니다. 더 나아가면 '노동의 소외'까지 운운하게 되겠지만 그러지 말고 대부분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얘기하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의 한살이는 바로 ‘돈 벌기’와 '돈 쓰기'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돈을 버는 목적은 돈을 쓰는 데 있습니다. 돈을 쓰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문제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와 바로 이어집니다.
제가 존경하는 선배 한 분은 한 번씩 이런 관점에서 스스로를 돌아본다고 했습니다.

오늘 자기가 무엇을 하는 데 얼마나 돈을 썼느냐 따져보는 것입니다. 돈이 가는 데에 마음이 가게 마련이고, 거꾸로 마음이 가는 데에 돈이 가게 마련이거든요.

일용할 양식을 마련하는 데 말고, 남에게 해코지를 하지는 않는 즐거움을 누리는 데 말고, 남을 결과적으로 괴롭게 하는 데에 스스로 돈을 쓰는 경우가 있지는 않은지 따져본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쓴 돈이, 더 큰 탐욕을 실현하기 위한 밑천이나, 더욱 많은 욕망을 누리기 위한 떡밥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는지 헤아려 본다는 얘기였습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다른 존재를 위해서도 돈을 쓰기는 했는지 헤아려본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러면 거칠게나마 자기 삶이 돌아봐질 때가 있답니다.(물론 선배는 잘난 척 자랑하려고 이런 얘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어떨 때는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돈을 쓰도록 만든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까지 되살펴본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돈을 쓰게 하면 그게 자기한테는 짐이 된다고도 했습니다.

남에게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 받기만 하고 사는 팔자도 있지만, 그리 되면 그 사람 인생은 ‘세상에 짐만 될 뿐’이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저는 그 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영정 앞에서, 여기 솟아나온 샘물이 사람을 치유했다는 전설이 있는 영정 앞에서, 십중팔구는 돈 많이 벌게 해 주십사 빌면서 던졌을 저 수북한 동전을 보면서, ‘돈 쓰기’에 대해 잠깐 생각해 봤습니다.

김훤주

산사의숲계곡에발담그다
카테고리 기술/공학 > 환경/소방/도시/조경 > 환경 > 환경이야기
지은이 김재일 (지성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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