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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우리 전국언론노동조합 경남도민일보지부는 나름대로 뜻 깊은 일을 하나 해 냈습니다. 5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한 달에 두 번꼴로 모두 열여섯 차례 모여 노동교실 교육을 했습니다.

조합원 의식 기틀을 다지자는 취지로 했는데, 첫 강의는 경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인 장상환이 하셨습니다. 강의 내용과 질문-응답까지 모아서, 올 4월에 <공부해서 남 주자>는 제목으로 책을 하나 내기도 했습니다.

어지간해서는 하기 어려운 일을, 언론노조 본조의 도움을 받아 우리 지부가 치러낸 셈인데 이 책을 뿌듯하게 여기며 뒤적거리는데 어릴 적 기억을 깨우는 구절이 눈에 띄었습니다.

장상환의 두 번째 강의 ‘자본주의 바로 알기 2 : 해방 후 한국 자본주의 전개 과정’인데요, 50쪽 아래에 나오는 “1970년대 중반에 오면 재벌이 국민경제를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가 그것이었습니다.

국민학교 5학년 여름 배앓이 하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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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해서 남 주자> 50쪽 아래 마지막 두 줄.

저는 이 대목에서 갑자기 어릴 적 배앓이를 하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창녕국민학교 5학년이던 1974년 그해 여름 ‘달콤할 뿐만 아니라 부드럽기까지 한’ 얼음과자를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는 바람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제 기억에는, 그 때 ‘누가바’가 처음 나왔습니다. 지금은 700원 하는 줄 아는데, 그 때는 하나에 50원 했습니다. 시장통에서 창녕극장 대한극장 올라가던 모퉁이 평화의원 언저리에 가게가 있었는데 집에서 들고 나온 500원을 모두 써버렸습니다.

물론 ‘누가바’ 열 개를 단번에 사서 먹지는 않았고, 하나 사 먹고 나서 조금 있다가 또 하나 사 먹는 식으로 해치웠습니다. 깔끔한, 그리고 근사하게 그림이 그려져 있던 냉동고에서 그 녀석은 예쁜 포장을 하고 나왔습니다.

전에 사 먹던 굵은 팥이 듬성듬성 박혀 있는, 전체적으로 거무튀튀한, 아니면 마치 사이다를 얼린 것처럼 허여멀건한 그리고 때로는 전혀 달지도 않고 차기만 하던 ‘아이스께끼’랑은 비교가 되지 않는 맛이었습니다.(값은 ‘누가바’가 많이 비쌌던 것 같습니다.)

그날 이후로, 허름하고 썰렁했던 얼음집에서는 아이스께끼가 팔리지 않게 됐습니다. 학교 마치고 아이스께끼 가방을 울러메고 팔러 다니던 친구나 형도 줄었습니다. 아이스께끼 꽂는 막대를 열 개 주워 오면 아이스께끼를 하나씩 주곤 했는데, 이것도 점점 사라졌습니다.

20대 초반에 제 고향 창녕을 생각하다가 문득 느꼈던 바이기도 하지만,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창녕군 창녕읍 시장통에는 갖가지 구경거리가 많았습니다. 3일과 8일 서는 장날 말고 평소에도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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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오는 누가바



술도가, 국수공장, 쉐타공장, 오뎅공장, 대장간 등등

명덕국민학교 맞은편 창녕약국 옆에는 술도가가 있었습니다. 누구나 그런 기억이 있겠지만, 여기서 어머니 심부름으로 막걸리 한 주전자 받아오다가 꼭지로 홀짝홀짝 받아마시는 바람에 크게 취해 얼굴이 벌개져서 어질어질 쓰러진 기억이 제게도 있습니다.

냇가였지 싶은데, 거기에는 국수 공장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뽑았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데 방앗간처럼 피댓줄 걸어놓는 높은 데 있던 동력 전달 장치들에다 국수들이 길게 몸을 늘어뜨린 채 말려지는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잘 말린 이것을 기계칼로 토막토막 알맞게 잘라내고 포장하는 장면도 조금 흐리지만 남아 있는데, 이런 국수공장 옆에는 ‘쉐타’ 공장이 있었습니다. 탁한 연두빛으로 제게 기억이 돼 있는, 옆으로 널찍하고 납작한 기계(편직기라 하나요?)로 쉐타를 만드는 데였습니다.

양념은 물론 건어물까지 파는 동삼상회 맞은편에서는 장날마다 오뎅을 만들었습니다. 가로 한 뼘 세로 한 뼘 반쯤 되는 납작한 철판 가운데는 네모 모양으로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여기에다 물고기와 밀가루를 섞은 반죽을 얹었다가 다른 막대로 싹 깎아냅니다.

그러면 오뎅 모양이 바로 나왔고 그것을 바로 옆 펄펄 끓는 기름물에다 집어던진 다음 좀 있다가 건져내는 것입니다. 당시까지는 둥그렇게 생긴 오뎅은 나오지 않았고 모조리 네모 난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누가바 팔던 맞은편은 과자 도매상이었습니다. 어린 제가 과자가 도대체 얼마나 될까, 헤아릴 수나 있을까, 생각을 하곤 했을 정도로 아주 넓었습니다. 해태니 롯데니 큰 공장에서 나온 과자도 팔았지만, 자체 생산한 듯한 상표 허름한 과자들을 주로 팔았습니다.

싸전 위에 있던, 땀으로 번들거리던 어깻죽지와 벌겋게 달아오른 쇠, 쉭쉭거리던 풀무 소리가 인상적이던 대장간도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습니다. 옆에는 강아지나 닭 같은 녀석들이 몰려나와 종종거리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나들이’ 의상실,이나 ‘신신’ 양복점,들도 제 기억으로는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그 때 우리 누나뻘 되는 여성들한테 정해진 스토리 가운데 하나가, 중학교나 국민학교 졸업하고 의상실 들어가서 기술 익혀 독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보다 세 살 많았지만 학년은 같았던 우리 동기 여자애 하나는, 국민학교 졸업도 하기 전에 이 쪽 길로 나서기도 했더랬습니다. 아마 그 친구는 이 쪽 길에서 보자면 막차를 탄 셈이지 싶습니다.

텔레비전도 막 대중 보급이 시작되는 시점이었지 싶습니다. 지금처럼 하루 종일 하는 방송이 아니었고 저녁 5시 30분인지 6시인지 뉴스로 프로그램을 시작했지 여겨집니다. 화면을 통해 유니나 샴푸나 줄줄이 사탕 등등 선전을 본 것도 이 즈음이다고, 기억은 제게 일러줍니다.

자동차 대중화와 함께 한 번 더 달라졌다

그런데, 중학생이 돼서 보니까 읍내가 완전 달라져 있었습니다. 과자 도매상도 국수공장도 아이스께끼 공장도 쉐타 공장도 사라졌습니다. 오뎅 만드는 모습도 어쩐 일인지 사라졌습니다. 창녕을 단위로 무엇인가 생산하던 모든 것들은 자취를 감추고 생기를 잃었습니다.

의상실 양복점도 당장 표시가 나지는 않았지만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조그만 전파상들도 사라졌고 가전제품 대리점들이 들어섰습니다. 무슨무슨전자 하는 커다란 간판을 내건 대리점들이 창녕읍 시장통 상가에 진출했습니다.

아마 이것이 경상대 교수 장상환이 말하신 ‘재벌의 국민경제 완전 장악’이구나, 그런 장악의 창녕판이 그것이었구나 생각이 듭니다. 중소영세자본의 몰락과 자본의 재벌 집중, 유통의 전국망 형성 들이 창녕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이렇게 이뤄졌을 것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처럼 생산이 사라진 자리에는 주로 서비스가 남았습니다. 사람들은 자꾸자꾸 마산이나 창원이나 대구 같은 도시로 빠져 나갔습니다. 이렇게 한 10년 남짓 가다가 90년대 접어들면서 또 한 차례 바뀌지 않았나 싶습니다.

자가용 자동차가 확 퍼졌습니다. 서비스 용역도 읍내에서 해결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거동 어려운 영감 할멈들만 읍내에서 합니다. 차를 몰 줄 아는 모든것들은 크고 깨끗하고 그럴듯한 도시로 갑니다. 이리 됨으로써 읍내 산업은 한 번 더 꺾입니다.

이리 보니까 ‘재벌의 국민 경제 완전 장악’이, 생산력 발전에 따른 당연한 흐름이라 해도, 뒷맛은 조금 씁쓸하게 남았습니다. 추억과 함께 버무려지니까, 아쉬운 데서 말미암은 변색도 조금은 이뤄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63년생인 저는 어린 시절 기억이 이처럼 ‘재벌의 국민 경제 완전 장악’과 관련돼 있었다면, 제각각 91년생과 94년인 제 아들딸은 어린 시절 기억을 어떻게 가져갈까요?

이들은 아마 IMF 환란 위기와 관계되는 기억을 할 것 같기도 한데요, 그 구체 모습이 어떨는지 사뭇 궁금합니다. 아니면 아이들 기억이 한미FTA랑 관련되는 무엇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쩌면!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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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느낌표 선정도서! 진실한 거짓말쟁이 신기종, 골방에 갇혀 천하를 꿈꾸던 골방철학자, 사랑스런 허영쟁이 장우림,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했던 검은제비, 내가 얻은 별명, 노란네모... 그곳에서 아홉살짜리가 배운 삶의 이야기. 십년 전에 출간 했던 책으로 장정을 새롭게 꾸며 다시 펴냈다. 작가는 그동안 장편소설 <고슴도치>와 <벼룩의 간>, <노동자 이야기주머니> 등을 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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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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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리아이 2008.05.06 1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70년대 중반 대한민국 읍내에서 사라진 것 중에는 목재소도 있습니다. 그런데 좀 천천히 없어졌습니다. 80년대 '리바트'인가 커다란 가구 전문 기업이 뜨면서 빠르게 시골 동네 목재소 죽어간 것 같습니다.

    • Favicon of https://100in.tistory.com 김훤주 2008.05.06 12: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맞습니다. 제 처가도, 그러니까 장인 어른께서도 목재소를 동업하셨는데(경기도 광명에서), 그만두신 때가 85년인가 그렇습니다. 사라진 때가 조금 늦지요.

      목재소 얘기를 하시니 생각나 한 줄 덧붙입니다. 목수일은 70년대 중반에부터 일거리가 크게 줄었던 것 같습니다. 나무로 짓던 집이 새마을운동 바람에 콘크리트로 친 집으로 옮겨갔기 때문이 아닐까 여겨봅니다. 저희 어릴 적 이웃에 목수 하시는 분이 계셨는데, 갈수록 살림이 쪼들렸습니다.(처음 형편도 아주 좋지는 않았지만)

  2. 풍류가객 2008.05.18 20: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네에 쌀가게, 석유가게 등도 사라졌죠. 특히 쌀가게는 봉투쌀도 팔고 있어 가난한 이들이 자주 이용했죠. 좋은 기사 잘 보았습니다.